89강 [2.16.8-12] 지옥 강하로 표현되는 영혼의 극심한 고통을 당하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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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 | 2.16.8-12 (2권 471-483페이지)



지옥 강하로 표현되는
영혼의 고통을 당하심


[『기독교 강요』, 2.16.8.]

     칼빈은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고 장사되시고 그리고 지옥에 내려가셨다, 이제 이곳에서 지옥 강하(地獄降下, descensus ad inferos), 이것에 대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지옥에 내려가심이 주요한 교리라고 칼빈은 이야기하는데, 사실 ‘지옥에 내려갔다’는 의미가 아니라 ‘극심한 영혼의 고통(dolores, angor)을 당하심,’ 이렇게 칼빈은 이해하고 있습니다. 이제 이 부분을 우리가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칼빈은 예수님께서 지옥에 내려가심, 곧 지옥 강하, 이것이 “구속의 효과”(effectus redemptionis)를 논하는 데 적잖이 중요한 사안이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사도신경에서 이 부분이 초대 교회 이후로 나타난다는 것을 또한 지적합니다. 사도신경에서 ‘[예수님이] 지옥에 내려가셨다’라는 고백은 후기본에 나타납니다. 그런데 칼빈은 이 교리가 아주 중요한 교리다, 그리고 “유용하고 무시해서는 안 될 비밀”(utile ac minime spernendum mysterium)을 담고 있다고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초대 교부들 중에 ‘[예수님이] 지옥에 내려가셨다’라는 이것을 말하지 않은 교부는 거의 없다라고도 또한 칼빈은 말합니다. 그러면 과연 ‘[예수님이] 지옥에 내려갔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사도신경에는 모든 “구속의 요체”(summa redemptionis)가 있고, “가장 순수한 말씀”(purissimum Dei verbum)이 사도신경에 새겨져 있으며, [사도신경은] 모든 구원의 세목(細目)을 담고 있는 “절대적인 신앙의 요체”(absoluta fidei summa)라고 칼빈은 이야기하고요. ‘이러한 사도신경의 고백 중에 지옥 강하를 뺀다면 아주 큰 유익을 잃어버린다’라고 이야기합니다. 무슨 유익이냐,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심, 그 유익을 우리가 잃어버리게 된다라고 이렇게 말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내려가셨다,’ 과연 예수님께서 지옥에 내려가신 것입니까? 칼빈은 결코 ‘예수님이 죽고 장사되시고 지옥에 내려가셨다’라고 할 때 [그] 내려가심은 장소적이고 실제적인 의미가 아니라고 이야기합니다. 그것은 영적인 의미고, 그것은 아까도 이야기했듯이, 영혼의 고통 당하심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기독교 강요』, 2.16.9.]

     로마 가톨릭은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장사되시고 지옥에 내려가셔서, 구약 시대 때 죽었던 믿음의 조상들을 구출해서 천국으로 옮기셨다라고 이야기합니다. 이것이 바로 로마 가톨릭의 극악한 ‘조상 림보’ 사상 혹은 ‘선조 림보’(limbus patrum)라고도 합니다. 구약 때 죽었던 믿음의 백성은 바로 천국에 가지 못하고 머물러 있는데, 그것을 로마 가톨릭은 ‘림보’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 머물러 있었던 사람들, 아브라함도 이삭도 야곱도, 머물러 있었던 구약의 믿음의 조상들을 예수님이 죽으신 후 내려가셔서 데리고 올라가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전혀 성경적 교리와 가닿지 않습니다. 그들은 베드로전서 3장 19절을 인용하면서 예수님께서 옥에 내려가서, 이 옥은 망대라고도 번역할 수 있습니다, 그 옥중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셨다, 이 구절을 근거로 삼아서 이런 주장을 합니다. 그러나 이 본문은 예수님이 낮아지시고 높아지시는, 예수님의 죽으심의 권세가 미치지 않은 곳이 없음을 그것을 이야기하는 것이죠. 이것이 예수님이 실제로 내려가셨다라는 것을 의미한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기독교 강요』, 2.16.10.]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모든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만약 그리스도가 단지 육체적인 죽음만을 죽으셨다면 그 어떤 것도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Nihil actum erat si corporea tantum morte defunctus fuisset Christus).…그렇기 때문에 심지어 그는 지옥의 군대와 영원한 죽음의 공포를 상대로 마치 손을 내밀어 샅바를 맞잡듯 씨름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Unde etiam eum oportuit cum inferorum copiis aeternaeque mortis horrore, quasi consertis manibus, luctari).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16.10.

     그의 고난 당하심은 육체의 고난뿐만 아니라 영혼의 고난도 포함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당하신 영혼의 고난은 어떤 것이 있을까요? 칼빈은 제일 먼저 징계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신문을 당하시고 심판을 받으시는 그 징계 받으심, 그것이 영혼의 고난이라는 것입니다.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라고 이사야 53장 5절에서 말씀하고 있는데, 이 예수님께서 안나스, 가야바, 헤롯, 빌라도 앞에서 심판을 받으신 것, 그것이 영혼의 고통이라는 것입니다. 

[『기독교 강요』, 2.16.11.]

     그리고 이 영혼의 고통의 두 번째 중요한 사건은 겟세마네 기도입니다. 예수님께서 번민하시고, 고통 가운데서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신 것이죠. 히브리서에서는 ‘예수님께서 눈물과 심한 통곡으로 간구하시고 그의 두려움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으셨다’라고 했는데(히 5:7), 칼빈은 이 겟세마네 기도를 영혼의 고통이라고 그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 십자가에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시 22:1; 마 27:46), 이것은 예수님이 버림받은 우리의 자리에서 하나님께 탄원하시는 것입니다. 기도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아버지가 아들을 버리심이 아니죠. 아버지가 아들을 통하여 대속의 의를 이루심이죠. 이 유기의 고통, 이것도 영혼의 고통이라는 것입니다. 
     네 번째, 가장 큰 영혼의 고통, 그것은 바로 죽음 자체입니다. 우리는 어떤 육체의 고통이 어떠함에 따라 ‘편하게 죽었다,’ 또 ‘고통스럽게 죽었다,’ 이렇게 말하지만 사실 죽음 자체는 육체의 고통이 아니라 영혼의 고통입니다. 영혼과 육체가 분리되는 죽음의 고통. 아무리 편하게 죽는 사람에게도 죽음의 고통, 영혼의 고통이 있습니다. 이러한 영혼의 고통, 물론 다른 곳에서도 많이 나타나지만, 대표적으로 칼빈은 이 부분에서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징계 받으심, 곧 심판, 재판 받으심, 그리고 겟세마네의 기도, 그리고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의 그 우리를 대신한 유기를 당하심, 그리고 죽음, 죽기까지 복종하심, 이러한 것이 영혼의 고통이고, 이 영혼의 고통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 ‘지옥에 내려가셨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라는 것입니다. 
     저주 받고 버림받은 인간의 무수한 고통들을 영혼으로 겪으심으로 더욱 대단하고 뛰어난 어떤 값으로서 넘겨지셨다는 사실인 것입니다. 죽음은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는 것이지 않습니까. 육체의 죽음도 있고, 영적 죽음도 있는 것입니다. 그 영적 죽음은 바로 저주이고, 그 저주는 하나님의 진노와 하나님의 버림을 받는 자리, 그것이 바로 영적인 사망입니다. ‘예수님께서 지옥에 내려가셨다’라고 표현하는 것은 초대 교부들도, 또 우리 종교개혁자들도 전부 ‘[예수님이] 지옥에 내려가셨다’라고 고백할 때 그 의미는 영적 고통 당하심, 그것을 뜻한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강요』, 2.16.12.]

     중세 시대 때는 예수님의 육체의 고통은 우리를 위한 것이지만 영혼의 고통은 예수님 자신[의] 완성을 위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육체의 고통만 우리를 위한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종교개혁기에 ‘[예수님이] 영혼과 육체의 모든 고난 당하심, 고통 당하심이 우리를 위한 것이다,’ 이 진리를 강조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지옥에 내려가셨다’라는 고백이 아주 주요한 요체고,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이 고백을 빼 버리면 죽음의 유익을 삭감하게 됐다, 그렇게 칼빈이 이야기했지 않습니까. 바로 이런 의미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지옥에 내려가셨다,’ 지옥 강하 교리가 중요하다 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영혼의 고통 당하심도 우리를 위한 것이라는 것을 이 ‘지옥에 내려가셨다’는 표현으로 우리가 강조하게 되기 때문에, 그것이 귀하다는 것입니다. 

이 중보자는 우리를 도우시기 위하여 불쌍한 자들에게 더욱 가까이 하셔서 우리의 비참함을 무릅쓰고 우리의 연약함을 경험하셨다(mediatorem hunc expertum esse nostras infirmitates, ut ad succurrendum miseris propensior sit).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16.12.

     마귀의 권세, 죽음의 공포(horror), 지옥에 맞서는 [예수님의] 영혼의 고통(dolores) 당하심, 타락한 인류가 갖게 되는 무서움, 공포, 전율, 고민(moeror), 이런 모든 영혼의 비참함을 우리 주님께서 가져가셨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그리스도의 영혼이 형벌에 참여하지 않으셨다면, 예수님은 우리의 몸만을 위한 구속주가 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의 근심(anxietates)과 슬픔, 우리의 징계, 우리의 유기, 우리의 죽음 자체의 고통, 그것을 모두 가져가셨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예수님께서 자원해서 당하신 모든 고난, 육체의 고난뿐만 아니라 영혼의 고난도 우리를 위한 것이다, 어떤 악도 없고, 흠도 없고, 어떤 죄도 없고, 어떤 징계에도 속하지 않는, 어떤 공포에도, 전율에도, 번민에도 속하지 않는 예수께서 그의 정서 가운데 슬픔(tristitia)과 두려움(metus)과 공포(pavor), 이 모든 영혼의 고통, 이것이 얼마나 절실한지 겟세마네에서 기도할 때 그의 땀이 피가 되는, 얼굴로부터 핏방울이 흘러내리는 이러한 극렬한 고통 당하심(눅 22:44), 이것이 ‘예수님께서 지옥에 내려가셨다’라는 그 고백의 의미라는 것입니다. “믿기지 않는, 영혼의 고초”(incredibilis amaritudo animi), 이것을 표현하는 것이 ‘예수님께서 지옥에 내려가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망의 고통에 매어 있으실 수 없습니다(행 2:24).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사망을 이기시고 생명으로 우리에게 역사하십니다. 그 생명은 저주로 [인해] 멀어졌던 인류를 다시금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품 안에 들이시는 것입니다. 그 은혜는 단지 몸의 은혜가 아니라 영혼의 은혜입니다, 영적인 자유함입니다. 이제는 더 이상 고통과 번민과 실의와 좌절과 극적인 고초, 영혼의 그러한 곤고함[에] 사로잡혀 죽음의 종노릇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 죽기까지의 고난 당하심으로 우리의 영혼을 해방하시고, 우리를 하나님 앞에서 화목하게 하셨다, 이것이 바로 ‘지옥에 내려가셨다’라는 고백의 의미라는 것입니다. 
     지옥 강하에 대한 칼빈의 입장은 분명합니다. 이것을 칼빈이 주요한 고백의 요체라고 한 것은 결코 ‘예수님이 지옥에 내려가셨다’라는 뜻이 아닙니다. 로마 가톨릭과 루터란(루터파)과 동방정교회에 속한 사람들은 [예수님이] 실제로 내려가셨다라고 그렇게 오해합니다. 그러나 초대 교부들, 정통신학자들, 우리 종교개혁가들은 그렇게 다루지 않습니다. 영혼의 고통 당하심이라고 보거나, 혹은 예수님이 죽고 장사되심, 장사되심은 죽음 가운데 계심을 의미하거든요, 이것과 같은 말이라고 봅니다.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에도 그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이것은 우리가 칼빈이 다루는 부분 이상의 이야기지만, 과연 우리가 ‘[예수님이] 지옥에 내려가셨다’라고 고백해야 될까요? 이것은 제가 한번 간략하게 제 의견을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첫째로 사도신경의 ‘지옥에 내려가셨다’는 지옥 강하 부분은 사도신경의 후기본에 나오는 것입니다. 핵심 부분이라고, 본질적인 부분이라고까지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두 번째, 이들로부터 ‘지옥에 내려가셨다’라는 고백이 거의 다 나오지만, 그러나 정통적인 입장에 서 있었던 신학자들은 그 누구도 이것을 실제로 내려가셨다라고 그렇게 인정하지 않습니다. 
     셋째로 성경에 ‘예수님이 지옥에 내려가셨다’라는 말씀이 없습니다. 우리가 성경에서 ‘스올’이라든지 이런 개념은 물론 장소적 개념도 있지만, 스올에 내려가셨다라는 것은 죽음 자체를 의미하기도 하고 고난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결정적인 구절이 없습니다. 
     넷째, 종교개혁자들 그리고 우리가 칼빈에게서 보듯이, 또 헤르만 바빙크나 찰스 핫지나, 우리가 정통 신학자들을 통해서 보듯이, 또 칼빈과 동시대 종교개혁자들, 부써나 이러한 신학자들 통하여서도 보듯이, ‘지옥에 내려가셨다’는 것은 영적 고통 당하심, 극심한 영혼의 고초, 그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지옥 강하가 영혼의 고통 당하심이라고 본다면 그것은 죽고 장사되심의 고백으로 충분합니다. 굳이 ‘지옥에 내려가셨다’고 고백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우리가 이것을 그렇게 이해한다면, 영혼의 고통 당하심[을], 죽음 자체가 고통이니까 ‘예수가 날 위해 죽으셨다’고 고백하고, ‘장사되셨다,’ 장사되심은 죽음 가운데 사흘 동안 계심을 뜻하거든요, 그렇게 고백한다면 별도의 고백이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다섯 번째, 예수님이 지옥에 내려가셨다고 할 때, 그러면 ‘어떤 모습으로 내려가셨느냐?’라고 우리가 질문하게 된다면 그 답을 줄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죽으시고 인성에 따라서는 영혼이 낙원에 계십니다. 그러므로 로마 가톨릭이나 루터란(루터파)이나 동방정교회에서 영혼만이 내려가셨다, 영혼과 육체가 내려가셨다, 부활 전에 또 다른 부활이 있었다, 이런 궁한 변명들은 참으로 성경의 진리에 부합하지 않습니다. 
     결론적으로 여섯 번째로 말씀드리면 우리가 ‘지옥에 내려가셨다’라고 신앙 고백을 하게 되면 많은 성도들이 이 부분을 오해할 것입니다. 실제로 제가 외국인들에게 물어 보면, 그들은 ‘[예수님이] 실제로 내려가셨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결론적으로, 지옥 강하는 우리가 또 다르게 덧붙여서 고백할 부분은 아니다라고 저는 여깁니다. 

[결론]

     이제 이 부분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첫째, 그리스도의 지옥 강하는 그의 영혼이 우리를 대신하는 형벌을 받으심으로써 그가 우리의 몸뿐만 아니라 영혼의 구속자가 되심을 선포한다는 점에서 칼빈은 유용한 비밀을 담고 있다라고 한 것입니다. 
     둘째, 주님은 성육신 때 취하신 영혼과 육체 모두를 대속의 값으로 치르셨습니다. 저주 받은 우리 영혼에 부과된 징계, 유기, 죽음을 극심한 눈물과 통곡 및 고초 가운데 주님이 대신 감당하셨습니다. 이 영혼의 고통 당하심에 지옥 강하의 뜻이 있습니다. 
     셋째, 지옥 강하를 말하면서 주님이 죽음 이후 부활 전에 실제로 지옥에 내려가셨다거나, 그리하여 구약의 믿음의 조상들을 구출하셨다거나, 지옥에서 복음을 선포하셨다거나, 이러한 주장들은 모두 성경적 근거가 없습니다. 
     넷째, 사도신경은 모든 세목에 완전하고 절대적인 신앙의 요체를 함의하며, 가장 순수한 성경 말씀이 새겨져 있으므로, 말씀의 가르침에 따라야 합니다. 분명한 것은 사도신경의 고백은 말씀의 뜻 가운데서 우리가 받아들여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89강 결론


  1. 그리스도의 지옥 강하는 그의 영혼이 우리를 대신하는 형벌을 받음으로써 그가 우리의 몸뿐만 아니라 영혼의 구속주가 되심을 선포한다는 점에서 유용한 비밀을 담고 있습니다. 
  2. 주님은 성육신 때 취하신 영혼과 육체 모두를 대속의 값으로 치르신바, 저주받은 우리 영혼에 부과된 징계, 유기, 죽음을 극심한 눈물과 통곡 및 고초 가운데 대신 감당하셨음에 지옥 강화의 뜻이 있습니다.
  3. 지옥 강하를 말하면서, 주님이 죽음 이후 부활 전에 실제로 지옥에 내려가셨다거나, 그리하여 구약의 믿음의 조상들을 구출하셨다거나, 지옥에서 복음을 선포하셨다고 주장하는 것은 모두 성경적 근거가 없습니다.  
  4. 사도신경은 모든 세목의 완전하고 절대적인 신앙의 요체를 함의하며 가장 순수한 성경 말씀이 새겨져 있으므로 말씀의 가르침에 따라 이해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