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강 [2.16.5-7] 죽음의 값을 치르신 그리스도의 죽음과 장사되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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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 | 2.16.5-7 (2권 462-471페이지)



죽음의 값을 치르신
그리스도의 죽음과 장사되심


[『기독교 강요』, 2.16.5.]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기까지 복종하시는 그 무조건적, 전적, 값없이 베푸시는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의 전 역정에 미친다’라고 칼빈은 이야기합니다. ‘역정’(歷程)이라 하면 선수가 달려야 될 전체 ‘track’, ‘course’, 라틴어로 ‘cursus’라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잉태 때부터 죽음의 때까지 모든 예수님께서 다 이루신 것, 그것이 우리 구원[의] 전 과정에 역사하는 은혜라고 칼빈은 말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5장 19절에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라고 선언합니다. 

사도는 우리를 율법의 저주로부터 구출해내는 은총의 원인이 그리스도의 전체 삶에 미치는 것으로 여긴다(causam veniae quae nos eximit a maledictione legis, extendit ad totam Christi vitam).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16.5.

     사도 바울은 우리를 율법의 저주로부터 구출해 내는 은총의 원인이 그리스도의 전체 삶에 미치는 것으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4장 4-5절의 말씀에서도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려 하심이라”[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칼빈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심이 예수 그리스도의 전 생애의 의에 미침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잉태되신 것, 나신 것, 사신 것, 고난당하신 것, 죽으신 것, 전 생애의 역정이 다 우리를 위한 것이다, 그래서 그가 율법 아래에 나셨음은 율법에 순종하심으로 그 의로 우리를 또한 온전히 하셨다’라는 부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종의 신분을 입으신 때로부터 그리스도는 우리를 구속하시려고 해방의 값을 치르기 시작하셨다(ex quo induit personam servi, coepit ad nos redimendos pretium liberationis solvere).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16.5.

     예수님은 세례를 받으실 때 세례를 받으심이 합당한 것은 ‘모든 의를 이루기 위함이다’라고 말씀했습니다. 이리하여 ‘모든 의를 이룸이 합당하다’라고 마태복음 3장 15절에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시지만은 죄 사함에 이르는 회개의 세례를 받으신 것은 그가 우리의 자리에 서시기 위하심인 것입니다.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되 우리의 자리에서,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종의 형체를 취하고 곧 사람이 되신 것은 우리를 구속하고 그 값으로 우리를 해방하기 위하심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자기 목숨을 … 대속물로 주려” 하심이었습니다(마 20:28).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주님께서 죽으셨습니다(롬 4:25). 우리의 타락과 우리의 죄가 없다면 왜 주님이 성육신하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겠습니까?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신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셨습니다(요 1:29).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값없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그가 베푸시는 은혜로 의롭다 하심을 얻게 되었습니다(롬 3:24). 예수의 피가 곧 화목제물이요, 예수님이 곧 화목자로 우리를 위하여 서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피가 우리를 의롭다 합니다. 그의 죽음이 우리를 화목하게 합니다. 죄를 알지도 못하는 그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죄인의 자리에서 죽기까지 복종하신 것은 곧 그 의로 우리를 의롭다 하게 하려 하심이었던 것입니다(고후 5:21). 이와 같이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다 이루신 의는 곧 우리를 위한 것이요, 우리의 구원 대속을 위한 것입니다. 

사도들의 신앙의 고백, 이른바 ‘사도신경’에는 그리스도의 탄생에서부터 죽음과 부활에 이르는 흐름이 최상의 순서로 배열되어 있다. 그곳에는 구원의 완전한 요체가 존재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리스도가 일생 동안 수행하신 나머지 부분의 순종을 제외해서는 안 된다(in symbolo fidei quod apostolicum vocant, optimo ordine statim a natalibus Christi fit transitus ad mortem et resurrectionem, ubi perfectae salutis summa consistit. Neque tamen exauditur reliqua pars obedientiae qua defunctus est in vita).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16.5.

     사도신경에서는 예수님의 탄생에서부터 죽음과 부활에 이르는 예수님의 전 생애의 역사, 그 은혜가 잘, 최상의 순서로 배열되어 있습니다. 그리하여 칼빈은 ‘사도신경을 [말하기를,] 구원의 완전한 요체가 그곳에 존재한다, 사도신경에서 고백된다’라고 그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우리는 주님이 일생 동안 수행하신 그 순종의 모든 것을 우리를 위한 대속에서 제외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 하나라도 제외해서는 안 됩니다. 모든 것이 다 우리를 위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죽기까지” 아버지께 복종하셨다고 빌립보서 2장 7-8절에서 전하는데, 이것은 죽음만이 우리를 위한 의가 아니라 모든 의가 우리를 위한 것이라는 것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과연 죽음 자체에서도 그의 자발적인 순종은 첫 번째 자리를 차지한다. 왜냐하면 자원해서 드려지지 않는 희생제물은 의를 이루는 어떤 효력도 나타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sane in ipsa quoque primum gradum occupat voluntaria subiectio: quia ad iustitiam nihil profuisset sacrificium nisi sponte oblatum).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16.5.

     예수님은 “자발적인 순종”(subiectio voluntaria)을 하셨습니다. 구약 시대 때 인격적인, 자원적인 제물을 드렸듯이 예수님은 스스로 원하셔서 자기 자신을 희생제물로 드리셨습니다.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요 10:15, 18). 그리하여 거역하지 않고 거부하지 않고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과 같이” 순종하시며(사 53:7; 행 8:32) “죽기까지 복종하”신 것입니다(빌 2:8). 어떤 드러내는, 소리나는 변호도 없이 묵묵히 빌라도 앞에서 징계를 받고 재판을 받으셨습니다(마 27:12, 14). 

실로 이는 투쟁이 없이 된 것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는 우리의 연약함을 취하고 계셨으며, 이러한 방식으로 그가 자기의 아버지께 순종을 보이셨다는 사실이 입증되었어야 했기 때문이다(Non id quidem absque certamine; quia et infirmitates nostras susceperat, et hoc modo probari oportuit quod patri suo praestabat obsequium).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16.5.

     그가 우리를 [위하여] 연약함 가운데 계셨고, 그 연약함 가운데서 순종하심으로, 그러나 죄가 없으시고, 우리의 자리에서 죄인인 우리를 위하여 죄가 없으신 그분이 우리 대신 죽기까지 복종하심으로 우리를 향한 비교할 수 없는 사랑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 “범상치 않은 표본”(non vulgare specimen)이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이라고 칼빈은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극악한 공포와 씨름하셨”습니다(luctari cum horribili formidine), 잔인한 고문을 당하셨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아버지의 원(願)을 구하였습니다, 아버지의 뜻을 구하였습니다. 아버지께서 이 일을 감당하여 주십사 기도했습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땅히 이 땅에 오셔서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고, 자기 자신을 합당한 제물로 드리심으로 그 아버지의 뜻 가운데 우리를 대속하시는 그 창세 전의 작정을 이루셨던 것입니다.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내가 왔나이다. 내가 원하나이다. 내가 주의 뜻을 행하고자 하나이다.’ 히브리서 10장 7, 9절에서 이와 관련된 말씀이 나타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과 원하심, 그리고 하나님의 법의 성취를 위하여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우리를 위한 생명의 질료(質料)가 그리스도의 죽음에 자리 잡고 있으니 말이다(in morte Christi statuitur nobis vitae materia).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16.5.

그리스도 자신 및 그의 순종이 구원의 의로서 대속의 값이 됩니다. 즉 구원의 질료인입니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16.5, 각주 847.

     그 자신을 순종의 값으로, 대속의 제물로, 공로로 드리셨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자기 자신이 우리 “생명의 질료”(materia vitae)가 되셨습니다. ‘질료’(質料, materia)라 함은 ‘실체’ 그 자체를 의미합니다, ‘값’ 그 자체를 의미합니다, ‘의’ 그 자체를 의미합니다. 
     우리의 죄의 값으로 우리는 다 하나님을 떠나는 영적 사망의 상태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이 영적 사망의 상태, 저주의 상태를 가져가시려고 우리 주님께서 본디오 빌라도 앞에서 정죄되셨습니다. 죄가 없으신 분이 죄인으로 판단받으셨습니다. 우리가 책임을 지어야 할 죄값을 그분이 대신 안으신 것입니다. 우리가 그 자리에 징계를 받아야 되는데 주님께서 징계를 받았습니다. 우리가 채찍을 맞아야 되는데 주님께서 맞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얻었다고 예언한 것입니다(사 53:5). 
     예수님은 “우리의 구속의 값을 무르시기 위해서”(redemptioni nostrae satisfaceret) 대속의 죽음을 [겪]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의 종류는 대속의 죽음입니다. 그 대속의 죽음 가운데서 우리의 정죄를 예수님이 가져가시고 마땅히 우리에게 정하여야 될 죄를 예수 자신의 죄로 정하셔서 그 죄의 값을 자신에게 지우시므로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를 해방시키시는 <그러한> 대속의 죽음을 우리 주님께서 [겪]으신 것입니다. 

그가 피고로 법정 앞에 불려 세워져 여러 증언들을 내세운 심문과 협박을 당하고, 담당하는 재판관의 입을 통하여 죽음의 선고를 받게 될 때, 우리는 이 증거들을 통해서 그 자신이 죄인과 악한(惡漢)의 역할을 감당하고 계신다(ipsum personam sontis et malefici sustinere)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16.5.

     아무 죄가 없으신 분입니다. 흠이 없으신 분입니다. 죄를 알지도 못하시는 분입니다. 그분이 죄인이라고 여겨지셨습니다. 그리고 우편, 좌편[의] 강도와 함께 악한으로 여겨지셨습니다. 그래야 우리 인류의 죄를 가져가신 것입니다. “그가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음이니라”라고 이사야 선지자는 예언한 것입니다(사 53:12; 막 15:28). 빌라도는 예수님을 신문(訊問)했지만 예수님에게서 어떤 죄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손을 씻고 ‘나는 그의 형벌에 대해서 무관하다’라고 빌라도는 이야기한 것입니다(마 27:23). 
     그러나 예수님은 거저 우리에게 베푸신 것입니다. 시편 69편 4절에 “내가 빼앗지 아니한 것도 물어 주게 되었나이다”라고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이것은 로마서 4장 6절에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서 무엇을 앗아간 적이 없습니다. 주님이 갚아야 할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마치 우리에게서 무엇을 가져가신 듯이 우리를 위해하여 갚으신다는 것입니다. 그 자신의 죄가 하나도 없습니다. 타인의 죄를 그가 대신 지신 것입니다. 본디오 빌라도 앞에서 죄인으로 여겨지셨지만은, 범죄자 중 하나로 여겨지셨지만은, 그는 우리를 위하여 죄를 뒤집어쓰신 것이지 아무 죄도 그에게는 없습니다. 그리하여 빌라도가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였노라”(요 18:38)[라고 하여] 그 악인의 입을 통하여서라도 예수님의 어떠하심이 나타나게 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위하여 죄인의 자리에서 죽으시므로 우리가 무죄 방면(無罪放免, absolutio)을 얻게 하셨습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죄의 값을 치루시므로 우리가 형벌(poena)의 노예에서, 죄의 삯인 사망의 노예에서 해방되어서 이제는 은혜 아래, 생명 아래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게 하셨습니다. 그 아들이 머리가 되고 우리가 지체가 되므로, 예수와 함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예수의 ‘대신 갚음’(compensatio)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곧 대속으로 말미암은 것이다라고 칼빈은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기독교 강요』, 2.16.6.]

     예수님의 대속의 죽음, 그 십자가는 바로 가장 저주스러운 죽음입니다. ‘장대에 달리는 자마다 저주의 죽음이다’[라고] 신명기에 예언된 말씀대로(신 21:23) 주님은 저주(maledictio, exsecratio)의 죽음을 죽으셨습니다(갈 3:13), 죄인의 죽음을 죽으셨어요, 형벌의 죽음을 죽으셨습니다, 구약의 희생제물(victima), 화목제물, 속건제물, 속죄제물(expiatrix), 그 자리에 서셨습니다, 우리의 죄를 무르는 제물로 서셨습니다. 그가 모든 죄의 값을 가져가셨어요. 그리하여 “오점과 형벌”(macula et poena)이 더 이상 우리의 것으로 남아 있지 않도록 하신 것입니다. 
     아버지가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이는] 고린도후서 5장 21절에 전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죄가 없는 아들이 죄인의 자리에 섰으므로, 죄인인 우리가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다”라고 선포한 것입니다. 

모든 악으로부터 지극히 순수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가 저지른 불법의 수치와 모욕을 입으셨다. 그리고 그 대신에 자기의 순수함으로 우리를 싸매셨다(filius Dei, omni vitio purissimus, iniquitatum tamen nostrarum probruin ac ignominiam induit, ac sua vicissim puritate nos operuit).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16.6.

     모든 악으로부터 지극히 순수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가 저지른 불법의 수치와 모욕을 입으셨습니다. 그의 순수함으로 우리의 더러운 것을 싸매셨습니다. 그 “육신에 죄를 정하”셔서(롬 8:3) 더러운 우리의 육신을 정결케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를 무르는 제물로서”(pro victima satisfactoria), 보아스가 룻의 기업을 물렀듯이, 그 배상금(litatio)을 다 지불하시고, 형벌을 지불하시고, 우리를 값 주고 사셨습니다. 여호와께서 모든 죄악을 그의 아들에게 담당시키셨습니다(사 53:6). 그 “전가의 옮겨 받음을 통하여서”(per translatitiam imputationem) 우리가 의롭다 함을 얻게 된 것입니다. 
     “그가 못 박히신 십자가”(crux, cui affixus est)가 바로 이 의를 다 이루신 정점의 자리입니다.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저주의 죽음을 십자가에서 [겪]으시므로 나무에 달려서 우리의 죄를 친히 담당하신 것입니다. 그가 우리의 저주의 상태로 들어가시고, 저주의 죽음으로 죽으시므로 저주를 다 깨뜨리시고, 저주로부터 은혜로, 축복으로 우리가 옮김 받게 하신 것입니다(갈 3:13-14; 신 21:23). 

믿음은 그리스도가 당하신 저주 안에서 무죄 방면을, 그리스도가 당하신 정죄 안에서 은총을 붙잡는다(fides in Christi damnatione absolutionem, benedictionem in maledictione apprehendit).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16.6.

     ‘믿음은 그리스도가 당하신 저주 안에서 무죄 방면을 얻게 하는 것이고, 그리스도가 당하신 정죄 안에서 은총을 붙들게 하는 것이다’라고 칼빈은 이야기합니다. 십자가는 모든 수치와 능욕과 모멸과 고통과 목마름과 모든 저주가 있는 곳입니다. 그곳에서 모든 흑암에 속한 것을 가져가신 것입니다. 의문에 속한, 그 증서에 속한, 모든 것을 지켜 행하여야 구원에 이르는, 그러나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인간의 상태, 그래서 율법이 이제는 그 자체로는 저주가 될 수밖에 없는 그러한 타락한 인류에게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모든 의를 이루심으로 그 의문을, 증서를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우리를 구원하신 것입니다(골 2:14). 

그리스도가 뿌리신 피는 배상금의 가치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더러움을 씻어 내는 대야의 작용도 하였던 것이다(Quanquam non modo ad litationem valuit effusus Christi sanguis, sed lavacri etiam vice fuit, ad sordes nostras purgandas).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16.6.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가(히 9:14) 자기 자신을 드리므로 그 “대속, 속죄, 화목”(ἀπολύτρωσιν  καὶ  ἀντίλυτρον  καὶ  ἱλαστήριον)의 주로서 예수님이 우리의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그리스도가 뿌리신 피는 배상금의 가치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더러움을 씻어 내는 대야의 작용도 하였다’라고 칼빈이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기독교 강요』, 2.16.7.]

     예수님이 ‘죽고 장사되셨습니다’(mortuum fuisse et sepultum). 장사되심은 죽음 가운데 계심을 뜻합니다. 그리스도는 죽으시므로 우리를 구원하셨고, 생명을 우리에게 도입하셨습니다, 우리가 생명의 자녀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셨습니다(히 2:9), 그리하여 그 ‘죽음으로[써 우리의] 생명을 구속하셨습니다’(morte sua vitam nobis redemit), 죽음에 복종하셨지만 죽음을 이기셨습니다, 죽음을 삼키셨습니다. 그리하여 죽음에 속한 자들, 한평생 죽음의 종노릇 하는 우리를 해방시키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습니다(히 2:15). 

우리가 그의 죽음에 동참함으로써 그것이 지상에 속한 우리의 지체들을 죽여 이후로는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없도록 하거나, 우리의 옛 사람을 죽여 더 이상 무성해질 수도 결실을 맺을 수도 없도록 하는 데 있다(quod participatione sui membra nostra terrena mortificat, ne suas in posterum actiones exerceant; veteremque nostrum hominem enecat, ne posthac vigeat ac fructificet). 그리스도의 장사도 여기에 적용된다. 즉 우리 자신이 그 장사에 참여하는 자들로서 죄에 대하여 장사된다(Quo etiam sepultura eius pertinet: nempe cuius consortes peccato et ipsi sepeliamur).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16.7.

     그가 죽음 가운데 사흘 동안 계신 것은 그의 죽으심과 함께 우리도 함께 죽고 함께 사는 그 은혜를 누리게 하려 하심입니다. 그의 장사와 함께 우리도 죄에 대하여 못 박혀 죽고 그와 함께 우리가 죽으므로 우리가 다시 생명을 얻고 그와 함께 살아나게 하려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으시므로 우리가 죽음으로부터 해방되고, 우리의 생명을 얻고, 우리의 육체가 거룩해지는, 그래서 우리의 육체를 죽이는 그 은혜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결론]

     이제 이 부분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첫째, 그리스도의 속량은 예수님이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드리심에 이르는 순종의 역정 전체의 미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의롭다 함을 얻고 율법의 저주로부터 구출되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는 은총을 누리게 됩니다. 
     둘째, 주님이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자기 몸을 희생제물로 삼아 자원해서 드리심으로써 우리를 대신하는 구속의 값이 치러져서 우리의 죄책이 방면되고 우리가 노예 상태로부터 해방되었습니다. 
     셋째, 주님이 자기 육신을 죄로 정하사 죄를 무르는 제물로 드리신, 전가의 옮겨 받음을 통하여 우리의 오점과 형벌이 우리에게 전가되지 않고 우리가 그의 저주와 정죄 안에서 무죄 방면과 은총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넷째, 주님의 피는 생명을 구속하여 죽음에서 해방하는 배상금, 그리고 우리를 씻어 육체를 죽이고 거룩한 삶의 열매를 맺게 하는 대야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다섯째, 이러한 진리가 사도신경에는 잘, 순서대로 기록되어 있어서 구원의 완전한 요체를 함의하고 있고, 예수님의 탄생으로[부터] 죽음, 부활에 이르는 그 도가 잘 우리를 통하여 고백되도록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88강 결론


  1. 그리스도의 속량은 그가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드리심에 이르는 순종의 역정 전체에 미치는바, 그리하여 우리가 의롭다 함을 얻고 율법의 저주로부터 구출되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는 은총을 누리게 됩니다. 
  2. 주님이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서 자기 몸을 희생제물로 삼아 자원해서 드리심으로써 우리를 대신하는 구속의 값이 치러져 우리의 죄책이 방면되고 우리가 죄의 노예 상태로부터 해방됩니다. 
  3. 주님이 자기 육신을 죄로 정하사 죄를 무르는 제물로 드리신 전가의 옮겨 받음을 통하여 우리의 오점과 형벌이 우리에게 전가되지 않고 우리가 그의 저주와 정죄 안에서 무죄 방면과 은총을 누리게 됩니다.   
  4. 주님의 피는 생명을 구속하여 죽음에서 해방하는 배상금과, 우리를 씻어 육체를 죽이고 거룩한 삶의 열매를 맺게 하는 대야의 역할을 합니다. 
  5. 사도신경에는 구원의 완전한 요체가 함의되며 주님의 탄생으로부터 죽음과 부활에 이르는 흐름이 최상의 순서로 배열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