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강 [2.16.1-4] 그리스도의 대리적 무름에 따른 속죄와 용서와 화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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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 | 2.16.1-4 (2권 455-462페이지)



그리스도의 대리적 무름에 따른
속죄와 용서와 화목


     『기독교 강요』 2권 16장에서 칼빈은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의 낮아지심과 높아지심, 곧 비하(卑下)와 승귀(昇貴)에 대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비하’라 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아버지의 뜻에 따라 모든 대속의 의를 다 이루심, 그리하여 비하는 예수님의 잉태, 탄생, 사심, 고난당하심, 죽으심, 장사되심을 아우르는 개념입니다. 그리고 ‘승귀’라 함은 이제 다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하나님에 의해서, 아버지에 의해서 대속의 의로서 받아들여지고,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행하신 것이 효력을 발휘하게 되는 그것이 바로 높아지심, [즉] 승귀입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의 승귀는 부활, 승천, 재위, (재위[在位]라 함은 보좌 우편의 계심을 뜻합니다.) 그리고 재림, 이 네 가지를 아우르는 개념입니다. 

[『기독교 강요』, 2.16.1.]

     먼저 이곳에서 오늘 칼빈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구속의 의를 다 이루시고 그 값으로, 보아스가 룻을 사듯이, 우리를 위한 기업을 무르셨다, 분깃을 무르셨다[는] 이 부분을 다루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아니라면 그 누구도 죄의 종의 신분에서 해방될 수 없고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죄로 말미암아 저주받고 죽고 파멸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의 의로써만 이제 의(iustitia)를 얻고, 자유(liberatio)를 얻고, 생명(vita)을 얻고, 곧 구원(salus)을 얻게 됩니다. 
     그러므로 천하 만민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은 없습니다(행 4:12). 오직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주시므로 그 이름을 믿는 자만이, 예수의 이름을 믿는 자만이 구원을 얻게 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의 이름은 천사에 의해서 이미 잉태되시기 전에 알려지셨습니다.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마 1:21)라고 이렇게 천사 가브리엘이 요셉에게 미리 알려 주신 것을 우리가 알 수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 오셔서 값을 대신해서 지불하시는, 우리를 위하여 죄의 값을 치르시는 “구속주의 직무”(munus redemptoris)를 감당하셨습니다. 그래하여 우리를 구원하시는 주, “구주”(salvator)가 되신 것입니다. 

만약 그가 우리를 줄곧 이끄셔서 구원의 마지막 목표에 이르도록 계속적인 진보를 이루게 하지 아니하신다면 여전히 우리의 구원은 사지가 잘린 불구와 같이 불완전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아주 조금이라도 그에게서 벗어나자마자 그에게 견고하게 자리 잡고 있는 우리의 구원은 점차 사라지고 말 것이다. 누구든지 그 안에서 머물러 쉬지 않는 사람은 자원해서 자기 자신으로부터 모든 은혜를 걷어 내게 된다(tamen mutila esset redemptio, nisi per continuos progressus ad ultimam usque salutis metam nos perduceret. Itaque simulac vel minimum ab eo deflectimus, sensim evanescit salus, quae solida in eo residet: ut se ultro privent omni gratia quicunque in eo non acquiescunt).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16.1.

     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줄곧 이끄셔서 구원의 마지막 목표에 이르도록 계속적인 진보를 이루게 하지 아니하시면, 곧 전 구원의 과정의 의를 다 이루셔서 그 의로 우리가 구원을 얻게 하시지 아니하시면, 우리의 구원은 그저 불완전하고, 마치 사지가 잘린 신체와 같은, 완전치 못한, 무능한, 그러한 불완전한 구원이 될 수밖에 없다라고 칼빈은 그렇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살아남도 살아감도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요, 칭의와 성화가 모두 은혜라는 것을 이미 이곳에서 말하고 있음에 다름 아닙니다. 

예수의 이름은 빛일 뿐만 아니라 또한 양식이다. 그것은 또한 기름이다. 그것이 없다면 영혼의 모든 양식은 고갈될 것이다. 그것은 소금이다. 그것의 조미(調味)가 없다면 우리에게 차려진 모든 것은 맛이 없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것은 입 속의 꿀, 귀 속의 가락, 가슴속의 환호이자 의약이다. 이 이름이 울리지 않는다면 논의되는 어떤 것도 무미건조할 뿐이다(non modo lucem sed cibum quoque esse nomen Iesu; oleum etiam esse, sine quo aridus est omnis animae cibus; salem esse, sine cuius conditura insipidum est quidquid proponitur; denique esse mel in ore, in aure melos, in corde iubilum et simul medicinam; et quidquid disputatur insulsum esse, nisi ubi sonat hoc nomen). -베르나르두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16.1.

     중세 신학자 베르나르두스(Bernardus, 1090-1153)는 아주 유명한 이야기를 하는데요. ‘예수의 이름은 빛일 뿐만 아니라 양식이고 기름이다. 예수의 이름이 없다면 영혼의 모든 양식은 고갈되고 또한 그것은 소금이고 그 예수의 이름이 없다면, 그 소금에 맛을 더하는 조미가 없다면, 모든 우리에게 차려진 것이 무미건조할 것이다, 맛이 없을 것이다. 그래야 예수의 이름은 입속에 꿀이요, 귓속에 가락이요, 가슴속에 환호다. 그리고 그 이름은 우리를 온전케 하는 의약이다. 그래서 예수의 이름이 울리지 않는다면, 그 어떤 논의도, 그 어떤 말도, 담화도 다 무미건조할 뿐이다’라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그 이름만이 우리를 살리고, 살게 하고, 우리를 부요하게 하고, 유익하게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구원의 조성자입니다. 우리는 오직 그 이름으로만 구원을 얻고, 오직 그 이름 가운데 영적 감화를 얻게 되고, 오직 예수를 믿음으로써만 굳건한 구원의 버팀목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진리의 확실성(certitudo),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는 그러한 확실성,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는 진리의 담대함인 것입니다. 

[『기독교 강요』, 2.16.2.]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이 “거저 베푸시는 호의”(favor gratuitus)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보내셔서 대속의 주로 삼으시고, 그 아들을 믿는 자마다 구원을 얻게 하셨으므로, 하나님이 아들을 통하여 우리를 구원하시는, 값없이 구원하시는, 그 거저 베푸시는 호의, 이것이 우리 구원의 첫 번째 원인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은혜가 회복되기 전까지는 모든 인류와 원수 관계에 계셨던 것입니다(롬 5:10). 사실 인류가 하나님을 떠난 것이죠. 우리가 나무 뒤로 숨은 것이죠. 우리가 죄를 지으므로 빛과 함께 할 수 없는 어둠의 상태, 저주의 상태에 놓이게 된 것이죠. 그런데 그 하나님이, 마치 아담을 당장 죽이지 아니하시고, 아담에게 가죽 옷을 입혀 주셨던 그러한 일반적 은혜를 인류에게 베푸신 그 하나님이 그 일반적 은혜에 그치지 아니하고, 이제 아들을 주셔서, 희생 제물로 삼으셔서, 그 아들을 믿기만 하면 모든 죄가 사함을 받고, 불법이 속량함을 받고, 저주가 은혜 상태로, 화평 상태로 바뀌게 하셔서, 하나님을 다시 아버지라 부르는 자리로 세우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무조건적 베푸시는 호의에서 비롯되는 은혜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서 우리를 다시금 자녀 삼고자 원하셨습니다. 본래 아담과 언약을 맺으셔서 아담이 순종했으면 자녀가 됐을 터인데 아담의 불순종으로 그 누구도 자녀 될 수 없는 전적 무능, 전적 부패, 그러한 오염 상태에 놓이게 되었는데, 하나님이 아들을 보내셔서, 곧 그 자신의 아들, 그 자신의 몸을 통하여서 우리가 하나님과 다시금 화목하고, 한 몸으로 다시금 접붙임 받도록, 그래서 하나님과 분리되었던 우리가 다시금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그 자리로 나아가게 하시는 은혜를 베푸신 것입니다. 
     이러므로 아버지의 사랑과 아들의 은혜가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함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스스로 기뻐하시는 뜻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입니다. 스스로 원하셔서 거저 베푸시는 하나님 자신의 너그러움(indulgentia), 여기에 우리 구원의 제1차적 원인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간구해서도 아니고, 우리가 어떤 조그마한 의라도 하나님 앞에 받을 만한 것으로 내세워서가 아니라, 거저 베푸시는 하나님의 전적인 구원의 호의, 은혜, 그것이 바로 우리를 구원하신 제1의 원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거룩한 가르침 가운데, “거룩한 교리”(doctrina sacra) 가운데 배움을 얻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가 계시지 않으면 그 누구도 하나님과 화목하게 할 수 없고, 그 누구도 하나님과 화평한 자리에 설 수 없고, 다 파멸하고, 다 수렁에 빠져 있고, 죽음 가운데 처하여 있는데,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오직 그의 공로로, 그의 의로 그의 이름을 믿는 자 안에서만 “하나님의 선하심과 부성적 사랑”(benevolentia eius[Dei] paternaque caritas)이 부여되어서, 이제 그 큰 은혜 가운데 하나님의 자녀로 큰 누림을 얻게 된다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 구원의 도인 것입니다. 

[『기독교 강요』, 2.16.3.]

     “최고의 의”(summa iustitia)가 되시는 하나님은 불법(iniquitas)을 사랑하실 수 없습니다. 절대 의, 절대 선, 절대 거룩, 하나님의 속성상 하나님은 죄와 함께 하실 수 없고, 불법을 용납하실 수 없으십니다. 하나님은 죄를 죄 된 가운데 그 누구도 사랑하실 수 없습니다. 그 죄를 의로 바꿔야 하는데, 이는 타락한 인류로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여호와는 우리 안에 있는 자기의 것을 잃어버리길 원치 아니하시며, 여전히 자기의 인자하심을 드러내셔서 사랑하고자 하시는 무엇을 찾으신다(Verum…Dominus quod suum est in nobis perdere non vult, adhuc aliquid invenit, quod pro sua benignitate amet).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16.3.

     그러나 여호와는 본래의 뜻을 굽히시지 아니하십니다. 하나님의 인류를 창조하신 것은 그 인류의 순종을 통하여서 영광을 받으시고, 그 인격적 순종을 통한 영광 가운데 그 인류를 자녀 삼고자 하심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결코 인류를 영 잃어버리고자 원치 않으셨습니다. 그리하여 그중 얼마를 구원코자 하셨고, 그들에게 “순전히 거저 베푸시는 사랑”(mera et gratuita dilectio) 가운데서, 그 은혜 가운데서 그들을 자녀로서 받아들이고자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거저 베푸시는 호의의, 자비의, 사랑의 하나님이시자, 공의의 하나님이시므로 아들을 보내셔서 그 죄의 값을 치르게 하시고, 그 아들 안에서 우리를 거저 사랑하시는 그러한 무조건적 사랑의 은혜를 베푸신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자기의 사랑으로 앞질러 행하셔서, 먼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와 화목을 이루신다. 참으로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요일 4:19), 이후 우리를 그 자신과 화목하게 하신다(sua dilectione praevenit ac antevertit Deus pater nostram in Christo reconciliationem. Imo quia prius diligit, postea nos sibi reconciliat).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16.3.

     예수 그리스도의 이 땅에서의 다 이루심, 그가 죽기까지 복종하시는 그 속죄(expiatio)가 없이는 인류의 어떤 죄도 사함을 받지 못합니다. 죄의 값은 사망이고, 사망은 어두운 가운데 있는 것이고, 마귀 사탄의 흑암의 권세 아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죄의 값은 사망이요, 그 사망 안에 있는 어둠의 종노릇하는 자들은 아무도 하나님과 화목(reconciliatio)을 누릴 수 없으나, 오직 예수 그리스도 그의 은혜 가운데 이제 하나님과 화평케 되고, 하나님의 품에 거하게 되고, 그 화목을 이루어서 하나님의 사랑을 누리고, 또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께 은혜를 충만히 받는, 전 구원의 과정의 은혜를 받는 그런 것을 우리가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자기의 죽음으로 우리를 도우시기 전까지는 “하나님의 분개”(indignatio Dei)는 결코 그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죄에 대해서 하나님이 노하시는 것은, 우리의 불법에 대해서 하나님이 분노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공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시자 은혜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 공의 가운데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친히 길을 내셨으니, 오직 그리스도가 우리를 하나님과 하나가 되게 하실 때에만 우리가 “하나님과 충만하고 확고한 결속”(plena firmaque cum Deo coniunctio)을 누리게 되는, 그 자리에 서는, 오직 은혜, 전적 은혜,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 의, 값, 그의 순종 가운데 구원을 얻게 하시는 그 길을 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땅히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여 우리의 눈(oculus)을 고정하고 우리의 마음(mens)을 고정해야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의만, 그가 우리에게 베푸시는 은혜만이 우리의 구원의 유일한 값이요, 우리의 길입니다. 그의 의를 우리의 것으로 삼아 주심, 곧 전가해 주심, 이것이 우리에게 구원의 유일한 길이 되는 것은 우리의 죄를 그가 가져가시고, 그의 의를 우리 것으로 삼아 주시는,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받아야 될 진노(ira), 사망, 그 값은 주님이 치르시고, 우리를 위하여 친히 이루신 것을 우리 것 삼아 주시므로 우리가 구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 강요』, 2.16.4.]

     이것이 “창세 전에”(ante mundi creationem) 이미 작정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그리스도 안에서(in Christo) 확정되고 기초가 수립됩니다. 에베소서 1장 4-5절에서 이 말씀이 잘 증거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3장 16절에 보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이 세상은 택한 받은 백성입니다. 하나님이 그 백성을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시고 그리하여 누구든지 그의 이름을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는, 그래서 아버지의 사랑과 아들의 공로와 무조건적 은혜를 베푸시는 믿음의 선물, 이것이 우리 구원의 유일한 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은혜에 돌이키기 전까지는 아무도 하나님 앞에서 자녀 됨을 누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불가해하고 불변하다. 그가 우리를 사랑하기 시작하신 것은 우리가 그의 아들의 피를 통하여 그와 화목하게 된 때부터가 아니었다. 그는 세상이 조성되기 전에 우리를 사랑하셨다. 그리하여 우리가 도무지 무엇이 되기도 전에 우리 역시 그의 독생자와 함께 자녀들이 되게 하셨다(Incomprehensibilis…ac immutabilis est Dei dilectio: non enim ex quo ei reconciliati sumus per sanguinem filii eius, coepit nos diligere, sed ante mundi constitutionem dilexit nos, ut cum eius unigenito etiam nos filii eius essemus, antequam omnino aliquid essemus).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16.4.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의 사랑은 불가해하고 불변하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기 시작한 것은 우리가 그의 아들의 피를 통하여 그와 화목하게 된 때부터가 아니라 오히려 세상이 조성되기 전에 우리를 사랑하셨다’[라고] 아주 강하게 역설적으로 표현합니다. 우리가 사랑했을 때 비로소 우리가 은혜를 받는 것이 아니라, 창세 전에 우리를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작정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누리기 전에, 낳기 전에, 창세 전에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택하셨는데, 그것이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은혜 안에서 우리를 자녀 삼으시는 그 역사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 독생하신 하나님, 독생자, 그와 함께 우리가 자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5장 8절에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다[라고 말씀합니다]. 아들이 죽으시므로 아버지의 사랑이 확증되었다. 그래서 아버지의 무조건적 호의, 자비, 사랑, 그것은 아들의 공로 안에서 베풀어지는 역사이다라고 칼빈은 이 성경 구절을 인용하며 강조하고 있습니다. 

[결론]

     이제 이 부분을 한번 정리해 보겠습니다. 
     첫째, 그리스도 자신이 구원의 조성자로서 구주이시며, 그가 마지막 목표에 이르도록 줄곧 이끌지 아니하시면 완전한 구원은 있을 수 없습니다. 
     두 번째, 그리스도의 대속은 최고의 의가 되시는 하나님이 스스로 원하셔서 순전히 거저 베푸시는 부성적 사랑, 부성적 호의, 부성적 너그러움, 부성적 선하심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셋째로, 주님이 자기 몸을 드리신 속죄와 화목의 제사로써 우리를 하나님과 하나되게 하셔야만 우리는 하나님과 충만하고 확고한 결속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넷째, 창세 전에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죽음에 내어 주심으로써 우리를 그 독생자와 함께 자녀로 삼으시는 사랑을 베푸시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이야기했듯이, ‘우리가 은혜를 받았을 때, 그때 비로소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가 나기 전에 이미 그 사랑을 작정하시고 우리를 정하셨다’라고 칼빈은 강조하는 것입니다. 



87강 결론


  1. 그리스도 자신이 구원의 조성자로서 구주시며, 그가 마지막 목표에 이르도록 줄곧 이끌지 아니하시면 완전한 구원은 없습니다.  
  2. 그리스도의 대속은 최고의 의 되시는 하나님이 스스로 원하셔서 순전히 거저 베푸시는 부성적 사랑, 호의, 너그러움, 선하심에서 비롯됩니다. 
  3. 주님이 자기 몸을 드리신 속죄와 화목의 제사로써 우리를 하나님과 하나 되게 하셔야만 우리는 하나님과 충만하고 확고한 결속을 누립니다. 
  4. 창세 전에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죽음에 내어 주심으로써 우리를 그 독생자와 함께 자녀로 삼으시는 사랑을 베푸시기로 작정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