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이곳 15장에서 칼빈은 중보자 그리스도의 ‘삼중직’(munus triplex)에 대한 논의를 진행합니다. 삼중직은 ‘선지자직’(munus propheticum), ‘제사장직’(sacerdotium), ‘왕직’(regnum)으로 우리가 익히 알고 있습니다. 선지자직은 하나님 편에서 대리[입니다]. 하나님이 그의 백성에게 하나님의 지식과 그리고 그 지식대로 이루어지는 성취, 이러한 역사를 이룰 때 중보자 그리스도가 그 직을 감당한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제사장직은 사람 편에서 하나님께로 올라가는 그 대리[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들을 위하여 제사를 드리시고, 그리고 기도를 드리시는, 신약으로 말하면 예배와 기도를 드리시는 이러한 영역이 제사장직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왕직은 여러 가지로 정의할 수 있겠으나, 보좌 우편에서 보혜사 성령을 부어 주시므로 자신의 의를 그의 백성의 것으로[서] 삼아 주심으로[써] 다스리시는 [것입니다.] 베푸심이 다스리심이거든요. 그래서 칼빈은 이곳에서 먼저 선지자직을 1절과 2절에서 다루고 3절에서 5절까지는 왕직을 다룬 후 6절에서 제사장직을 다룹니다. 그래서 순서로나 또 분량으로 봤을 때 우리는 먼저 1절과 2절, 6절에 걸쳐 있는 선지자직과 제사장직을 먼저 살펴보고 다음 강좌에서 3절에서 5절까지 전개되는 왕직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기독교 강요』, 2.15.1.]
아우구스티누스는 비록 이단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을 선포하기는 하지만 그들과 경건한 사람들 사이에는 공통된 기반이 없으며 그 이름은 오직 교회의 고유한 소유로만 남아 있다고 합당한 주장을 한다. 만약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것들이 무엇인지를 부지런히 살펴본다면 우리는 이단들 가운데는 실체 자체가 아니라 단지 이름으로만 그리스도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Recte Augustinus, quamvis haeretici Christi nomen praedicent, commune tamen illis cum piis fundamentum esse negat, sed manere ecclesiae proprium; quia si diligenter considerentur quae ad Christum pertinent, nomine tenus invenitur Christus apud eos, re ipsa non est).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15.1.
아우구스티누스는 ‘그리스도의 이름을 선포하기는 하지만 경건한 사람들과 오직 교회에 속한, 교회의 고유한 소유에 속한 사람들에게만 이 삼중직의 교리가 남아 있다’라고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이름으로는 부르지만은 그가 살아 계셔서 역사하시는, 또 다 이루신 그것을 지금 우리 것 삼아 주시는 그런 ‘구속사적 성취’와 ‘구원론적 적용’의 은혜를 진정 경건한 사람들과 교회에 속한 사람들 외에는 믿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붙들고 살아가는 그의 지체된 자들입니다. 예수님은 언약의 머리십니다(골 2:19). 그가 다 이루신 것을 우리 것 삼아 주시기 때문에 우리가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원 자체시고 우리는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의 은혜를 누립니다. 이런 부분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구원의 질료’(materia salutis)가 되신다라고 이렇게도 표현합니다. 바로 구원 자체, 구원의 공로, 값, 의,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 이런 것들이 다 우리의 은혜가 된다는 것이죠.
이러한 것이 어떻게 이루어졌고 어떻게 우리에게 작용하냐? 예수 그리스도는 단번에 영원한, 온전한 제사를 드림으로 자기 자신이 제물로서 드려지는 구원의 모든 의를 이루셨습니다. 이러한 ‘구속사적 성취’가 있고, 이제 그런 측면에서 모든 중보자직을 완성하셨습니다. 이제 완성하셨기 때문에 그 다 이루신 것을 우리 것 삼아 주시는 또 중보를 계속하십니다. 이것은 ‘구원론적 적용’의 중보라고도 볼 수 있겠습니다.
먼저 선지자직에 대해서 살펴본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한 진리시고, 또 구원에 관한 모든 가르침, 그 ‘유용한 교리’(doctrina utilis)를 우리에게 알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택함 받은 경건한 사람들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시므로 그 빛을 영접하고, 그 말씀이시자 지혜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의 말씀을 듣고, 그리하여 참 가르침에 서게 됩니다. ‘메시야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리다’(요 4:25)라고 사마리아 여인이 이야기했을 때 예수님은 자신이 메시야이심을 드러내셨습니다. 이사야 55장 4절에서는 “보라 내가 그를 만민에게 증인으로 세웠고 만민의 인도자와 명령자로 삼았나니”[라고 말씀합니다]. 바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가 증인이시자 모든 지식의 인도자시고 또 그것을 지시하시고 알게 하시는 명령자라고 그렇게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위대한 지혜의 사자(使者, angelus)’시고 ‘해석자’(interpres)이시다(사 9:6; 28:29; 참조. 렘 32:19). ‘사자’라는 말이 바로 소식을 전하는 자[인데],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러한 소식을 전하시는 분이고 그 소식을 해석해 주시는 분이다라고 그렇게 선지자는 이야기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없이는 우리를 구원하시는 그 하나님의 사랑, 아들을 주시기까지 사랑하시는 복음 교리의 완전함이 찬미될 수 없습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소식, 이 복음은 이미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나타났던 것입니다. 그것이 마지막 날에 “아들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제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에게 친히 말씀되었다는 히브리서 1장 1-2절에서 이를 전하고 있습니다.
다니엘서에서도 보면 “환상과 예언”을 인치는 시간이 다니엘에게 알려졌는데(단 9:24)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시므로, 그가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신 그의 빛의 계시[입니다]. 그 빛을 영접하고 믿기만 하면 자녀가 되고 그 자녀들은 지식을 얻고 지혜를 얻고 생명의 말씀을 얻는 그것을 이미 예언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어떠한 유익한 지식이 있을 수 없습니다. 구원에 이르는 지식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지식이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지식입니다.
[『기독교 강요』, 2.15.2.]
구약하에서는 율법을 통하여서 제사장들과 왕들 그리고 선지자들, 그들[에게] 기름을 부어서 그들을 통하여서 하나님의 일이 이루어지고 또 대언되고 알려지고 그렇게 했습니다마는, 이제 메시야가 이 땅에 오시고, 약속된 중보자가 이 땅에 오셔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그분 한 분만이 우리의 진리시요, 은혜시요, 또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것을 우리가 그 안에서 누리게 되는 이러한 선지자와 제사장과 왕직의 은혜가 우리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는 먼저 선지자로서 우리에게 그것을 알려 주십니다. 이사야 61장 1-2절의 말씀, 이것은 또한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펼쳐서 읽으셨던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겸비한 자에게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자유를 선포하고 은혜의 해를 선포하고. 이렇게 선지자 직분을 전면에 내세워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원의 도를 가르치시고 선포하시고, 그 가르치시고 선포하신 것이 역사하는, 그래서 병자가 낳았고, 많은 사람이 돌이키는 이것이 바로 선지자 직분의 핵심이라는 것입니다.
기름부음을 받은 예수 그리스도, 그는 구약의 선지자들이 그러하였듯이 하나님의 소식을 전하였는데, 이제는 단지 미래에 오실 분에 관한 소식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그분 자신으로서 은혜의 실체이고 성취고 그분이 그 자체시고 그것을 전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선지자직은 단지 진리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그분이 그 진리의 성취이심이라는 것, 이 두 가지가 예수 그리스도의 선지자 직분에 포함된다는 것입니다. 그분이 당사자시요, 그분이 증인(testis)이시요, 그분이 지식이시요, 그분이 그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는 전령(傳令, praeco)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가르치는 역할을 감당하시려고 단지 그 자신이 기름부음을 받으셨을 뿐만 아니라 복음이 계속적으로 선포되는 일에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게 하시려고 자기의 몸 전체로 기름부음을 받으셨다(non sibi modo unctionem accepisse, ut fungeretur docendi partibus; sed toti suo corpori, ut in continua evangelii praedicatione virtus spiritus respondeat).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15.2.
여기에서 그리스도의 선지자직이 ‘가르침’(doctrina)과 ‘선포’(praedicatio)에 모두 미침이 천명됩니다. 가르치는 교회(ecclesia docens, teaching church)와 선포하는 교회(ecclesia praedicens, preaching church)로서의 교회의 당위가 이로부터 연원합니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15.2, 각주 803.
예수 그리스도의 그 선지자 직분은 보혜사 성령을 받은 우리 안에서 역사합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가르친 것을, 또한 그가 말씀하신 것을 생각나게 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예수님이 선포하셨던 완전한 가르침이 우리 안에 역사합니다. 그러므로 변화산에서 소리가 났을 때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마 17:5)라고 이야기했고 요엘 선지서에서는 “너희 아들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딸들이 환상을 볼 것이며”(욜 2:28)라고 했는데, 주의 구원과 함께 이 말씀이 선포되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에 이르는 자들에게 이제 예언의 영과 그리고 지식의 영이 충만할 것을, 곧 진리를 알게 됨에 이를 것을,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신 예수님을 통하여 은혜와 진리를 누리게 될 것을 선지자 요엘이 예언했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지혜의 말씀으로 주어지셨습니다(고전 1:30). 그분 안에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습니다(골 2:3).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내가 작정하였다(고전 2:2)라고 사도 바울은 이야기했는데, 이것은 중보자 그리스도의 대속의 공로와 의가, 그 은혜가 우리의 생명의 지식이요, 그리고 영구히 불변하는 하나님의 진리임을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점에서 복음은 단순한 것입니다. 믿기만 하면 역사하는 은혜의 말씀인 것입니다. 그 복음의 요체(summa)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시고, 그 안에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으며, “완전한 지혜의 모든 조목”(omnes perfectae sapientiae numeri)을 예수 그리스도 그분 안에서 그리고 그분이 행하신 그 사역 안에서 우리는 발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강요』, 2.15.6.]
그리스도가 자기의 거룩하심으로 하나님을 우리와 화해시키시는 순수하고 흠 없는 중보자가 되신다([Christus] sit mediator purus omni macula, qui sanctitate sua Deum nobis conciliet).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15.6.
이제 제사장직에서 살펴본다면, 칼빈이 6절에서 이야기하고 있듯이, 그리스도가 자기의 거룩하심으로 하나님을 우리와 화목하게 하시고 화해시키시는 순수하고 흠 없는 중보자가 되심을 칼빈은 이야기합니다. 제사장은 제사를 드리는 직분입니다. 구약의 속죄제사(piaculum), 희생제물(sacrificium), 속건제, 모든 제사가 제사장을 통하여 드려졌다면,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제사장 직분을 감당하심으로 우리를 위하여 제사를 드리십니다.
자기 자신의 몸을 드리셔서 그 그리스도의 피가 유일한 우리의 대속의 제물이 되어서 우리가 참 성소에 들어가는 담력을 얻고, 그의 몸의 휘장이 갈라져서 우리가 지성소로 들어가는 은혜를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제사장이 중간에 계시지 않으면 그 누구도 하나님께 나아갈 자 없습니다. 하나님의 노여움을 풀고(propitiare Deum)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는 가운데 우리의 하늘 길이 열리지 않겠습니까?
히브리스 7장에서 10장까지는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단번에 영원히 온전한 제사를 드렸다. 그 자신의 피로 참 성소에 들어가서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위하여 대언하신다. 그리하여 우리가 이제는 소와 양의 반복적인 제사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피 제사로 영원한 구원에 이르게 되었음’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자기의 죽음을 희생제물로 삼아서 단번에 영원히 드려지지 않았다면, 우리의 구원은 여전히 불완전하고 여전히 미완성인 상태로 남아 있게 될 것입니다.
의심할 여지없이 하나님은 자기가 아신 바대로 우리 구원의 근본 요체가 축을 삼고 돌게 되는 저 머리를 제정하기를 원하셨다(Sancire enim haud dubie voluit caput illud, in quo praecipuum salutis nostrae cardinem verti sciebat).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15.6.
예수 그리스도는 왕이자 제사장, 제사장-왕,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분이십니다(시 110:4; 히 5:6; 7:15). 왕-제사장, 제사장-왕이시면서 그는 또한 제물이신 제사장이십니다. 친히 자기 자신을 양으로 들이신 목자십니다. 우리 구원의 근본 요체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의 머리이신 그리스도, 그가 우리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제물로 드리셨고, 그리고 제사장직의 두 번째[는]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신다는 것입니다.
제사장직의 첫 번째는 제사를 드림이요, 두 번째는 기도(prex)를 드림인데,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신다는 것입니다. 영원한 우리의 중보자시고, 우리를 중재하시고, 우리를 위하시고, 비호하시고, 돌보시고, 또 우리의 연약함은 채우시는 기도를 드리시고, 우리의 죄와 허물은 사함을 받는, 그러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시는 중보의 기도의 주님이시라는 것입니다.
동일한 분이 제사장으로서 제물이시라는 것이다(idem esset hostia qui sacerdos).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15.6.
그래서 이전과는 전혀 다른 전무후무한 일이 일어났으니 그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자기 자신을 제물로 드리신 제사장이시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 값을 무르시기 위하여, 보아스가 룻을 샀듯이, 우리를 무름(satisfactio)의 값을 치르고 사시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고 모든 의를 다 이루셨습니다. “영원한 화목의 법”(aeterna reconciliationis lex)은 그가 값을 치러야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영예의 연합체”(societas honoris)가 되는 그 영광스러운 자리로 우리를 이끄십니다(계 1:6).
우리가 우리 안에서는 오염되었으나 그리스도 자신 안에서는 제사장들이 되어 우리 자신과 우리에게 속한 모든 것을 하나님께 바치게끔 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바치는 기도와 찬미의 희생제물들이 하나님께 가닿아 그의 눈앞에서 받을 만하고 향기로운 것들이 되도록 우리가 하늘 성소로 자유롭게 들어가게 하신다(qui in nobis polluti sumus, in ipso tamen sacerdotes, offerimus nos et nostra omnia Deo, coelesteque sanctuarium libere ingredimur, ut grata sint ac boni odoris in conspectu Dei quae a nobis proveniunt sacrificia precum et laudis). 이것이 곧 그리스도가 “그들을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요 17:19)라고 말씀하신 의미이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15.6.
그가 제사장으로 모든 의를 다 이루시고 친히 하늘 성소에 들어가셔서 그가 거룩하신 자기의 몸을 순종하심으로 드리시므로 우리가 그 의로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자녀요, 왕 같은 제사장으로 그렇게 서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제사장 직분은 완전한 제사를 드리신 바로 그분이시므로 다시 새로운 제사가 없습니다. 이제는 그 무엇의 제사를 가지고도 하나님 앞에 공로를 말할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 제사, 그가 자기 자신을 십자가의 저주의 제물로 드리신, 그리하여 우리의 속건제물, 화목제물이 되신 그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가 아니라면, 그 어떤 것도 하나님 앞에 의가 될 수 없습니다.
[결론]
이제 이 부분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첫째, 중보자 그리스도는 선지자, 왕, 제사장의 직분을 맡으신 기름부음 받은 메시야로서 택한 받은 자들과 교회의 머리가 되십니다.
두 번째, 주님의 선지자 직분은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는 그가 은혜의 해를 선포하시고, 자신의 인격과 사역을 계시하셔서 복음을 알게 하시며, 그에게서 듣고 완전한 가르침을 얻게 하심에 있습니다.
세 번째, 주님의 제사장 직분은 그가 자신을 희생제물로 들여 죄 값을 치르심으로써 그 피로 말미암아 택함 받은 자들의 죄가 속함을 받고,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며, 하나님께 기도하는 자리로 나아가게 함에 있습니다.
넷째로 그리스도는 멜기세덱의 서열, 곧 반차에 따른 왕으로서, 제사장이시며 자기 몸을 제물로 드리신 제사장이십니다. 이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멜기세덱의 반차이시며, 또한 이삭으로 예표되는 제사장-제물, 곧 양으로서 목자가 되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85강 결론
중보자 그리스도는 선지자, 왕, 제사장의 직분을 맡으신 기름부음 받은 메시아로서 택함 받은 자들과 교회의 머리이십니다.
주님의 선지자 직분은,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는 그가 은혜의 해를 선포하시고, 자신의 인격과 사역을 계시하셔서 복음을 알게 하시며, 그에게서 듣고 완전한 가르침을 얻게 하심에 있습니다.
주님의 제사장 직분은, 그가 자신을 희생제물로 드려 죗값을 치르심으로써 그 피로 말미암아 택함 받은 자들의 죄가 속함을 받고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며 하나님께 기도하는 자리로 나아가게 함에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멜기세덱의 서열에 따른 왕으로서 제사장이시며, 자기 몸을 드리신 제물로서 제사장이십니다.
85강 | 2.15.1-2, 6 (2권 439-444, 452-454페이지)
중보자 그리스도의 선지자직, 제사장직
이제 이곳 15장에서 칼빈은 중보자 그리스도의 ‘삼중직’(munus triplex)에 대한 논의를 진행합니다. 삼중직은 ‘선지자직’(munus propheticum), ‘제사장직’(sacerdotium), ‘왕직’(regnum)으로 우리가 익히 알고 있습니다. 선지자직은 하나님 편에서 대리[입니다]. 하나님이 그의 백성에게 하나님의 지식과 그리고 그 지식대로 이루어지는 성취, 이러한 역사를 이룰 때 중보자 그리스도가 그 직을 감당한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제사장직은 사람 편에서 하나님께로 올라가는 그 대리[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들을 위하여 제사를 드리시고, 그리고 기도를 드리시는, 신약으로 말하면 예배와 기도를 드리시는 이러한 영역이 제사장직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왕직은 여러 가지로 정의할 수 있겠으나, 보좌 우편에서 보혜사 성령을 부어 주시므로 자신의 의를 그의 백성의 것으로[서] 삼아 주심으로[써] 다스리시는 [것입니다.] 베푸심이 다스리심이거든요. 그래서 칼빈은 이곳에서 먼저 선지자직을 1절과 2절에서 다루고 3절에서 5절까지는 왕직을 다룬 후 6절에서 제사장직을 다룹니다. 그래서 순서로나 또 분량으로 봤을 때 우리는 먼저 1절과 2절, 6절에 걸쳐 있는 선지자직과 제사장직을 먼저 살펴보고 다음 강좌에서 3절에서 5절까지 전개되는 왕직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기독교 강요』, 2.15.1.]
아우구스티누스는 비록 이단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을 선포하기는 하지만 그들과 경건한 사람들 사이에는 공통된 기반이 없으며 그 이름은 오직 교회의 고유한 소유로만 남아 있다고 합당한 주장을 한다. 만약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것들이 무엇인지를 부지런히 살펴본다면 우리는 이단들 가운데는 실체 자체가 아니라 단지 이름으로만 그리스도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Recte Augustinus, quamvis haeretici Christi nomen praedicent, commune tamen illis cum piis fundamentum esse negat, sed manere ecclesiae proprium; quia si diligenter considerentur quae ad Christum pertinent, nomine tenus invenitur Christus apud eos, re ipsa non est).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15.1.
아우구스티누스는 ‘그리스도의 이름을 선포하기는 하지만 경건한 사람들과 오직 교회에 속한, 교회의 고유한 소유에 속한 사람들에게만 이 삼중직의 교리가 남아 있다’라고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이름으로는 부르지만은 그가 살아 계셔서 역사하시는, 또 다 이루신 그것을 지금 우리 것 삼아 주시는 그런 ‘구속사적 성취’와 ‘구원론적 적용’의 은혜를 진정 경건한 사람들과 교회에 속한 사람들 외에는 믿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붙들고 살아가는 그의 지체된 자들입니다. 예수님은 언약의 머리십니다(골 2:19). 그가 다 이루신 것을 우리 것 삼아 주시기 때문에 우리가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원 자체시고 우리는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의 은혜를 누립니다. 이런 부분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구원의 질료’(materia salutis)가 되신다라고 이렇게도 표현합니다. 바로 구원 자체, 구원의 공로, 값, 의,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 이런 것들이 다 우리의 은혜가 된다는 것이죠.
이러한 것이 어떻게 이루어졌고 어떻게 우리에게 작용하냐? 예수 그리스도는 단번에 영원한, 온전한 제사를 드림으로 자기 자신이 제물로서 드려지는 구원의 모든 의를 이루셨습니다. 이러한 ‘구속사적 성취’가 있고, 이제 그런 측면에서 모든 중보자직을 완성하셨습니다. 이제 완성하셨기 때문에 그 다 이루신 것을 우리 것 삼아 주시는 또 중보를 계속하십니다. 이것은 ‘구원론적 적용’의 중보라고도 볼 수 있겠습니다.
먼저 선지자직에 대해서 살펴본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한 진리시고, 또 구원에 관한 모든 가르침, 그 ‘유용한 교리’(doctrina utilis)를 우리에게 알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택함 받은 경건한 사람들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시므로 그 빛을 영접하고, 그 말씀이시자 지혜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의 말씀을 듣고, 그리하여 참 가르침에 서게 됩니다. ‘메시야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리다’(요 4:25)라고 사마리아 여인이 이야기했을 때 예수님은 자신이 메시야이심을 드러내셨습니다. 이사야 55장 4절에서는 “보라 내가 그를 만민에게 증인으로 세웠고 만민의 인도자와 명령자로 삼았나니”[라고 말씀합니다]. 바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가 증인이시자 모든 지식의 인도자시고 또 그것을 지시하시고 알게 하시는 명령자라고 그렇게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위대한 지혜의 사자(使者, angelus)’시고 ‘해석자’(interpres)이시다(사 9:6; 28:29; 참조. 렘 32:19). ‘사자’라는 말이 바로 소식을 전하는 자[인데],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러한 소식을 전하시는 분이고 그 소식을 해석해 주시는 분이다라고 그렇게 선지자는 이야기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없이는 우리를 구원하시는 그 하나님의 사랑, 아들을 주시기까지 사랑하시는 복음 교리의 완전함이 찬미될 수 없습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소식, 이 복음은 이미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나타났던 것입니다. 그것이 마지막 날에 “아들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제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에게 친히 말씀되었다는 히브리서 1장 1-2절에서 이를 전하고 있습니다.
다니엘서에서도 보면 “환상과 예언”을 인치는 시간이 다니엘에게 알려졌는데(단 9:24)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시므로, 그가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신 그의 빛의 계시[입니다]. 그 빛을 영접하고 믿기만 하면 자녀가 되고 그 자녀들은 지식을 얻고 지혜를 얻고 생명의 말씀을 얻는 그것을 이미 예언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어떠한 유익한 지식이 있을 수 없습니다. 구원에 이르는 지식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지식이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지식입니다.
[『기독교 강요』, 2.15.2.]
구약하에서는 율법을 통하여서 제사장들과 왕들 그리고 선지자들, 그들[에게] 기름을 부어서 그들을 통하여서 하나님의 일이 이루어지고 또 대언되고 알려지고 그렇게 했습니다마는, 이제 메시야가 이 땅에 오시고, 약속된 중보자가 이 땅에 오셔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그분 한 분만이 우리의 진리시요, 은혜시요, 또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것을 우리가 그 안에서 누리게 되는 이러한 선지자와 제사장과 왕직의 은혜가 우리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는 먼저 선지자로서 우리에게 그것을 알려 주십니다. 이사야 61장 1-2절의 말씀, 이것은 또한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펼쳐서 읽으셨던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겸비한 자에게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자유를 선포하고 은혜의 해를 선포하고. 이렇게 선지자 직분을 전면에 내세워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원의 도를 가르치시고 선포하시고, 그 가르치시고 선포하신 것이 역사하는, 그래서 병자가 낳았고, 많은 사람이 돌이키는 이것이 바로 선지자 직분의 핵심이라는 것입니다.
기름부음을 받은 예수 그리스도, 그는 구약의 선지자들이 그러하였듯이 하나님의 소식을 전하였는데, 이제는 단지 미래에 오실 분에 관한 소식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그분 자신으로서 은혜의 실체이고 성취고 그분이 그 자체시고 그것을 전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선지자직은 단지 진리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그분이 그 진리의 성취이심이라는 것, 이 두 가지가 예수 그리스도의 선지자 직분에 포함된다는 것입니다. 그분이 당사자시요, 그분이 증인(testis)이시요, 그분이 지식이시요, 그분이 그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는 전령(傳令, praeco)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가르치는 역할을 감당하시려고 단지 그 자신이 기름부음을 받으셨을 뿐만 아니라 복음이 계속적으로 선포되는 일에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게 하시려고 자기의 몸 전체로 기름부음을 받으셨다(non sibi modo unctionem accepisse, ut fungeretur docendi partibus; sed toti suo corpori, ut in continua evangelii praedicatione virtus spiritus respondeat).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15.2.
여기에서 그리스도의 선지자직이 ‘가르침’(doctrina)과 ‘선포’(praedicatio)에 모두 미침이 천명됩니다. 가르치는 교회(ecclesia docens, teaching church)와 선포하는 교회(ecclesia praedicens, preaching church)로서의 교회의 당위가 이로부터 연원합니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15.2, 각주 803.
예수 그리스도의 그 선지자 직분은 보혜사 성령을 받은 우리 안에서 역사합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가르친 것을, 또한 그가 말씀하신 것을 생각나게 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예수님이 선포하셨던 완전한 가르침이 우리 안에 역사합니다. 그러므로 변화산에서 소리가 났을 때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마 17:5)라고 이야기했고 요엘 선지서에서는 “너희 아들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딸들이 환상을 볼 것이며”(욜 2:28)라고 했는데, 주의 구원과 함께 이 말씀이 선포되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에 이르는 자들에게 이제 예언의 영과 그리고 지식의 영이 충만할 것을, 곧 진리를 알게 됨에 이를 것을,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신 예수님을 통하여 은혜와 진리를 누리게 될 것을 선지자 요엘이 예언했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지혜의 말씀으로 주어지셨습니다(고전 1:30). 그분 안에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습니다(골 2:3).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내가 작정하였다(고전 2:2)라고 사도 바울은 이야기했는데, 이것은 중보자 그리스도의 대속의 공로와 의가, 그 은혜가 우리의 생명의 지식이요, 그리고 영구히 불변하는 하나님의 진리임을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점에서 복음은 단순한 것입니다. 믿기만 하면 역사하는 은혜의 말씀인 것입니다. 그 복음의 요체(summa)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시고, 그 안에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으며, “완전한 지혜의 모든 조목”(omnes perfectae sapientiae numeri)을 예수 그리스도 그분 안에서 그리고 그분이 행하신 그 사역 안에서 우리는 발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강요』, 2.15.6.]
그리스도가 자기의 거룩하심으로 하나님을 우리와 화해시키시는 순수하고 흠 없는 중보자가 되신다([Christus] sit mediator purus omni macula, qui sanctitate sua Deum nobis conciliet).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15.6.
이제 제사장직에서 살펴본다면, 칼빈이 6절에서 이야기하고 있듯이, 그리스도가 자기의 거룩하심으로 하나님을 우리와 화목하게 하시고 화해시키시는 순수하고 흠 없는 중보자가 되심을 칼빈은 이야기합니다. 제사장은 제사를 드리는 직분입니다. 구약의 속죄제사(piaculum), 희생제물(sacrificium), 속건제, 모든 제사가 제사장을 통하여 드려졌다면,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제사장 직분을 감당하심으로 우리를 위하여 제사를 드리십니다.
자기 자신의 몸을 드리셔서 그 그리스도의 피가 유일한 우리의 대속의 제물이 되어서 우리가 참 성소에 들어가는 담력을 얻고, 그의 몸의 휘장이 갈라져서 우리가 지성소로 들어가는 은혜를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제사장이 중간에 계시지 않으면 그 누구도 하나님께 나아갈 자 없습니다. 하나님의 노여움을 풀고(propitiare Deum)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는 가운데 우리의 하늘 길이 열리지 않겠습니까?
히브리스 7장에서 10장까지는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단번에 영원히 온전한 제사를 드렸다. 그 자신의 피로 참 성소에 들어가서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위하여 대언하신다. 그리하여 우리가 이제는 소와 양의 반복적인 제사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피 제사로 영원한 구원에 이르게 되었음’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자기의 죽음을 희생제물로 삼아서 단번에 영원히 드려지지 않았다면, 우리의 구원은 여전히 불완전하고 여전히 미완성인 상태로 남아 있게 될 것입니다.
의심할 여지없이 하나님은 자기가 아신 바대로 우리 구원의 근본 요체가 축을 삼고 돌게 되는 저 머리를 제정하기를 원하셨다(Sancire enim haud dubie voluit caput illud, in quo praecipuum salutis nostrae cardinem verti sciebat).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15.6.
예수 그리스도는 왕이자 제사장, 제사장-왕,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분이십니다(시 110:4; 히 5:6; 7:15). 왕-제사장, 제사장-왕이시면서 그는 또한 제물이신 제사장이십니다. 친히 자기 자신을 양으로 들이신 목자십니다. 우리 구원의 근본 요체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의 머리이신 그리스도, 그가 우리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제물로 드리셨고, 그리고 제사장직의 두 번째[는]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신다는 것입니다.
제사장직의 첫 번째는 제사를 드림이요, 두 번째는 기도(prex)를 드림인데,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신다는 것입니다. 영원한 우리의 중보자시고, 우리를 중재하시고, 우리를 위하시고, 비호하시고, 돌보시고, 또 우리의 연약함은 채우시는 기도를 드리시고, 우리의 죄와 허물은 사함을 받는, 그러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시는 중보의 기도의 주님이시라는 것입니다.
동일한 분이 제사장으로서 제물이시라는 것이다(idem esset hostia qui sacerdos).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15.6.
그래서 이전과는 전혀 다른 전무후무한 일이 일어났으니 그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자기 자신을 제물로 드리신 제사장이시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 값을 무르시기 위하여, 보아스가 룻을 샀듯이, 우리를 무름(satisfactio)의 값을 치르고 사시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고 모든 의를 다 이루셨습니다. “영원한 화목의 법”(aeterna reconciliationis lex)은 그가 값을 치러야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영예의 연합체”(societas honoris)가 되는 그 영광스러운 자리로 우리를 이끄십니다(계 1:6).
우리가 우리 안에서는 오염되었으나 그리스도 자신 안에서는 제사장들이 되어 우리 자신과 우리에게 속한 모든 것을 하나님께 바치게끔 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바치는 기도와 찬미의 희생제물들이 하나님께 가닿아 그의 눈앞에서 받을 만하고 향기로운 것들이 되도록 우리가 하늘 성소로 자유롭게 들어가게 하신다(qui in nobis polluti sumus, in ipso tamen sacerdotes, offerimus nos et nostra omnia Deo, coelesteque sanctuarium libere ingredimur, ut grata sint ac boni odoris in conspectu Dei quae a nobis proveniunt sacrificia precum et laudis). 이것이 곧 그리스도가 “그들을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요 17:19)라고 말씀하신 의미이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15.6.
그가 제사장으로 모든 의를 다 이루시고 친히 하늘 성소에 들어가셔서 그가 거룩하신 자기의 몸을 순종하심으로 드리시므로 우리가 그 의로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자녀요, 왕 같은 제사장으로 그렇게 서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제사장 직분은 완전한 제사를 드리신 바로 그분이시므로 다시 새로운 제사가 없습니다. 이제는 그 무엇의 제사를 가지고도 하나님 앞에 공로를 말할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 제사, 그가 자기 자신을 십자가의 저주의 제물로 드리신, 그리하여 우리의 속건제물, 화목제물이 되신 그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가 아니라면, 그 어떤 것도 하나님 앞에 의가 될 수 없습니다.
[결론]
이제 이 부분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첫째, 중보자 그리스도는 선지자, 왕, 제사장의 직분을 맡으신 기름부음 받은 메시야로서 택한 받은 자들과 교회의 머리가 되십니다.
두 번째, 주님의 선지자 직분은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는 그가 은혜의 해를 선포하시고, 자신의 인격과 사역을 계시하셔서 복음을 알게 하시며, 그에게서 듣고 완전한 가르침을 얻게 하심에 있습니다.
세 번째, 주님의 제사장 직분은 그가 자신을 희생제물로 들여 죄 값을 치르심으로써 그 피로 말미암아 택함 받은 자들의 죄가 속함을 받고,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며, 하나님께 기도하는 자리로 나아가게 함에 있습니다.
넷째로 그리스도는 멜기세덱의 서열, 곧 반차에 따른 왕으로서, 제사장이시며 자기 몸을 제물로 드리신 제사장이십니다. 이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멜기세덱의 반차이시며, 또한 이삭으로 예표되는 제사장-제물, 곧 양으로서 목자가 되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85강 결론
중보자 그리스도는 선지자, 왕, 제사장의 직분을 맡으신 기름부음 받은 메시아로서 택함 받은 자들과 교회의 머리이십니다.
주님의 선지자 직분은,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는 그가 은혜의 해를 선포하시고, 자신의 인격과 사역을 계시하셔서 복음을 알게 하시며, 그에게서 듣고 완전한 가르침을 얻게 하심에 있습니다.
주님의 제사장 직분은, 그가 자신을 희생제물로 드려 죗값을 치르심으로써 그 피로 말미암아 택함 받은 자들의 죄가 속함을 받고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며 하나님께 기도하는 자리로 나아가게 함에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멜기세덱의 서열에 따른 왕으로서 제사장이시며, 자기 몸을 드리신 제물로서 제사장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