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은 『기독교 강요』 2권 11장에서 구약과 신약의 차이성을 논하면서 다섯 가지 점에 주목합니다. ‘첫 번째, 구약은 좀 더 지상적이고 열등한 훈련 방식을 취하였다. 신약 시대는 천상적인 것의 자체를 좀 더 드러낸다.’ ‘두 번째, 구약 시대 때는 아직 모형에 속한 것이라면, 신약 시대는 그 실체, 몸을 드러낸다.’ 우리가 이 두 가지의 차이점에 대해서는 지난 강의 때 보았습니다.
[『기독교 강요』. 2.11.7.]
이제 세 번째 차이점으로 칼빈은 구약 시대 때는 좀 더 문자적(litera)이고, 신약 시대 때는 영적(spiritualis)이라는 사실에 주목합니다.
예레미야 31장에서 하나님은 선지자에게 이제 새 언약을 주실 터인데 그때에는 율법이 우리 속에 마음에 새겨질 것이라고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율법과 복음은 실체에서 동일합니다. 그러나 율법은 그 자체로는 문자적이고, 복음에 역사가 있어야 영적인 의미를 갖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복음은 영적인 교리라고 볼 수 있습니다. 율법은 그 자체로 돌판들 위에 새겨진 자구이며 또한 그것이 명령에 좀 더 치중해 있다면, 복음은 사람들의 마음에 기록된, 심중에 말씀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명령보다 약속의 성취에 더 방점이 찍혀 있는 것입니다. 율법이 죽음의 선포라면 복음은 생명의 선포고, 율법이 저주라면 복음은 의의 선포입니다. 율법은 복음이 없이는 그 자체로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율법의 성취로서 영속합니다(고후 3:6-11). 물론 이러한 차이가 복음과 율법의 실체에 있어서의 차이가 아니라는 점을 우리는 다시금 상기해야 됩니다.
사도 바울은 선지자보다 율법에 대해서 많은 반감 어린 말을 합니다. ‘율법 아래 있는 것은 저주 아래 있는 것이다’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이 역시 우리가 기억할 것은 율법을 문자적으로만 파악했을 때 그러한 것입니다. 진정한 율법의 성취이신 그리스도를 바라본다면, 복음의 명료함 가운데 율법의 예표와 그 희미함을 밝힌다면, 율법은 은혜의 법으로서 우리에게 다가올 것입니다.
[『기독교 강요』. 2.11.8.]
구약은 문자적이라 하는데, 성령의 작용이 없이 공표되었기 때문이다. 신약은 영적이라고 하는데, 여호와가 사람들의 마음에 영적으로 새겨 기록하셨기 때문이다(Vetus testamentum literale est, quia sine spiritus efficacia promulgatum; novum spirituale, quod Dominus hominum cordibus spiritualiter insculpsit).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11.8.
구약은 좀 더 문자적입니다. 성령의 역사, 보혜사 성령의, 그리스도의 영의 임재가 없다면 구약은 결코 살리는 은혜의 법에 대하여 우리에게 말하지 않습니다. 신약은 영적입니다. 신약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 이루신 복음을 우리의 마음에 새겨 주시고(고후 3:6) 진리의 영의 감화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에 이르는 그 길로 나아가게 하기 때문입니다. 구약은 그 자체로는 죽음을 낳습니다. 신약은 구약의 성취요, 또 구약에 계시된 율법의 약속의 성취이기 때문에, 신약은 생명의 도구가 되고 “생명의 기관”(organumvitae)이 됩니다. 그러므로 구약은 그 자체로는 아직 의문의, 문자 그 자체의 율법에 머물러 있다면, 그것은 결코 생명에 이르는 길이 될 수 없습니다. 구약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할 때 그때에만 의를 비추게 되고, 신약의 복음은 의의 성취의 복음이므로 구약이 복음을 바라볼 때에만 예수 그리스도의 성취를 바라볼 때에만 구약의 율법도 신령한 도구로 사용된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의식법에 있어서 이 점은 더욱 분명해집니다. 구약과 신약 시대에 성자 예수 그리스도는 언제나 제2위 하나님으로 계십니다. 그러나 구약은 아직 그가 드러나 계심, 곧 현재(顯在)하심을 형상으로만 표현합니다. 그러나 신약 시대 때는 몸 자체로 그것을 표현하기 때문에, 신령하게 표현하기 때문에 문자 자체에 머물지 않고 우리의 심령에 그것을 새겨 주는, 그래서 새 언약의 은혜가 이제 신약 시대의 율법을 통하여서 더욱 우리에게 분명히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율법의 성취가 그리스도요, 그리스도가 복음의 실체이시기 때문에 그러한 것입니다.
신구약 시대에 모든 백성은 연약함 가운데 있습니다. 그러나 구약의 시대는 연약함 자체를 드러내는 것이 좀 더 직접적이었다면 신약 시대 때는 그 연약함에 자비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좀 더 실제적이고 직접적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동일하신 입법자이지만 구약 시대에 하나님은 그들을 깨닫게 하신다면, 신약 시대 하나님은 그 깨달음을 이루어 주시고 은혜로 율법의 명령과 규범을 이루어 가시는 그 점이 바로 구약과 신약의 차이라는 것입니다.
[『기독교 강요』. 2.11.9.]
성경은 구약을 사람들의 영혼에 두려움을 낳는 “예속 언약”이라고, 신약을 그들을 들어 올려 확신과 평정에 이르게 하는 “자유 언약”이라고 부른다(Vetus enim testamentum scriptura vocat servitutis, quod timorem in animis generet; novum autem libertatis, quod in fiduciam ac securitatem eosdem erigat).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11.9.
이제 네 번째 차이는 구약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명령하고 그들을 아직 묶어 놓고 있는 ‘예속적’(servitutis) 측면이 강하다면, 신약 시대 때는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자유함을 누리는 그러한 “자유 언약”([testamentum] libertatis)으로서의 측면이 강하다는 것입니다. 여기서도 역시 우리가 기억해야 될 것은 구약이나 신약이나 믿어서 구원에 이르는 도는 동일합니다. 구약이나 신약이나 하갈의 후손이 아니라 사라의 후손이 구원받는 것입니다. 이스마엘의 씨가 아니라 이삭의 씨가 아브라함의 언약의 후손이요 그가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칼빈이 말하는 구약과 신약의 차이로서 구약은 예속 언약이고 신약은 자유 언약이라고 함은, 구약이 구약 그 자체로 실체를 바라보지 않고 완성이 전제되지 않는 그러한 구약 자체에 머물고 있다면, 그것은 예속이라는 것입니다. 이 점을 우리가 잘 새겨야 됩니다. 구약의 교훈이 예속적이라는 말이 결코 아닙니다. 구약의 교훈이 신약을 바라보고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한, 그 구약의 교훈 역시 자유의 교훈입니다. 여기서 칼빈이 구약과 신약의 차이를 이야기하는 것은 구약이 그 자체로 머물러 있을 때 그것은 예속적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5절과 갈라디아서 4장 6절에서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는 양자의 영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이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면 더 이상 옛것에 속하여 있지 않습니다. 더 이상 모형과 예표의 형식에 놓여 있지 않습니다. 이제는 실체이신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시온의 대로가 열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도성의 실체가 우리 안에 임하는 것입니다(히 12:22). 그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갈라져서, 이제는 여종 하갈에 속한 것이 아니라 사라의 후손으로서 진정한 예루살렘, 진정한 성전,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가운데 그와 하나가 되는 복음의 삶을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구약은 아직 문자 그 자체에 머물러 있어 “공포와 전율”(pavor ac trepidatio)이 또한 징계와, 우리를 채찍질로 다스리는 그러한 엄격함이 강조된다면, 신약 시대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그것으로부터 도피하는,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품에 거하는 복음의 역사가 있다는 것입니다. 구약의 초등 학문은 예속적입니다마는(갈 4:2-3) 신약의, 이제 하나님이 우리를 자라게 하시고 성취된 경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자녀의 도는 자유의 도라는 것입니다. 구약이 법조문에 쓴 증서(골 2:14)에 강조점을 둔다면, 신약은 이제 그 증서를 폐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구약이 휘장으로 가로막힌 지성소를 보인다면 신약은 그 휘장이 예수 그리스도의 찢긴 몸으로 갈라지는 그 은혜를 우리에게 보인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강요』. 2.11.10.]
아우구스티누스가 이야기하듯이, 구약과 신약은 실체에 있어서는 다름이 없습니다. 다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다 이루신 것을 구약 시대 백성은 아직 눈으로 보듯이, 손으로 만지듯이 한 것은 아니라는 측면에서 구약 백성은 여전히 열등한 수준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거듭난 백성에게 주시는 믿음은 사랑의 열매를 맺는 믿음입니다(갈 5:6). 하나님의 “약속의 자녀”(롬 9:8)는 자유함 가운데서 율법을 즐거워합니다. 이것이 신약 시대 백성의 고상함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 이루셨기 때문에 단지 문자에 속한 것, 증서에 속한 것에 예속되어 살지 않습니다. 그것을 다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선한 것과 의로운 것과 거룩한 것과 신령한 것을 율법을 통하여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복음에 명료성(claritas)이 있고 확실성이 있고 복음에 완전함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부족하나 복음은 완전하므로, 그 복음의 계시는 더 한층 분명하므로, 우리가 새 시대에는 그 경륜 가운데 사는 것입니다. 무엇이 분명한 것입니까?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에 새겨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새 언약입니다. ‘내 법을 네 안에 두고 네 마음에 둔다’라고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렘 31:33). 현재의 그림자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 주시는 것은 현재의 것을 통하여 영원한 것을 드러내십니다. 오히려 현재의 것에 눈멀지 않고 영원한 것에 눈을 떠서 하나님이 보여 주시는 내적인 것, 은밀한 것, 신령한 것을 우리가 누리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강요』. 2.11.11.]
다섯 번째 차이는 이제 구약에 하나님의 경륜은 하나님이 정하신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한 민족”(gens una)에 제한되어 있었다면, 이제 신약 시대 때 하나님의 경륜은 전 세계로 인종과 민족과 세계와 나라를 다 포괄하는, 하나님의 새로운 시대의 질서를 보여 준다는 것입니다. 구약 시대에 여호와의 분깃은 그 백성인 야곱의 후손, 또 모세의 법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한정되었다면(신 32:8-9), 이제 신약 시대에 하나님의 경륜은 모든 만민을 포괄하는 것입니다. 물론 구약이나 신약이나 하나님의 선택의 작정은 다름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선택은 하나입니다. 그의 택함 받은 백성은 구원을 얻습니다. 단 구약 시대 때 그 선택이 이스라엘 백성에 한정되었다면, 이제 신약 시대 때는 그 선택이 모든 나라와 열방을 향하여 뻗어 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때가 차매”(갈 4:4)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화목자가 아니라 모든 사람들과 하나님의 화목자로 세워지셔서, 그동안 막혀 있던 담을 허시고(엡 2:14), 외인이요 나그네라고 여겨졌던 이방인들을 다 안으시는, 그래서 먼 데까지 평안의 복음이 전하여지고(엡 2:17) 헬라와 유대인과 할례와 무할례가 다 폐하여지는(갈 6:15), 그리하여 오직 예수 그리스도가 만유의 만유가 되시고(골 3:11), 예수 그리스도의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고(시 2:8), 바다에서 바다, 강에서 땅 끝까지 이르는(시 72:8; 참조. 슥 9:10) 그러한 은혜의 역사가 신약 시대, 새 시대에는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강요』. 2.11.12.]
이방인들을 부르셔서 하나님이 새로운 백성을 조성할 때, 이 이방인을 부르심(vocatio gentium)은 단지 인종과 민족과 어떤 나라의 지경의 확장이 아니라 새로운 시대의 성숙한 성취, 더 나은 성취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 이스라엘 백성은 구약 시대에 머물러 구약 시대의 은혜를 누리는 것이 아니라 그들도 새로운 시대의 한 민족으로서 더 고상한 은혜를 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가지고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마 10:5-6; 15:24)뿐만 아니라 모든 열방의 땅 끝까지 잃어버린 양들을 위하여 나아가야 되는 것은, 새 시대의 경륜은 이제 세상 끝날까지, 땅 끝까지 모든 인종, 민족을 포괄하고, 그리고 새 시대의 경륜은 이전의 은혜보다 훨씬 더 큰 은혜, 더 실체적인 은혜 그것이 부여된다는 것입니다.
이제 이방인들은 자기들에 대한 이러한 공적인 부르심으로 인해 유대인들과 동등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말하자면 죽은 유대인들의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음이 분명해졌다(ista vero publica vocatione non modo Iudaeis aequabantur gentes, sed velut in demortuorum locum subire eas apparebat).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11.12.
그러므로 칼빈은 ‘이방인들을 공적으로 부르심은 유대인과 동등하게 할 뿐만 아니라 유대인의 자리를 대신하고 이전의 은혜보다 더 큰 은혜를 누리게 하신다,’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이제는 유대인조차 새로운 시대의 은혜에 동참하는 그러한 새 시대의 복음에 당위성이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 강요』. 2.11.13.]
하나님이 구약과 신약의 경륜을 다양하게 하신 것은 다양한 세대에 다양한 양상으로 맞추어 주기 위하심입니다. 농부(hyems)가 시절에 따라 새로운 일을 하듯이, 집안의 가장(paterfamilias)이 자녀가 성장함에 따라 그 자녀를 기르고 양육하는 방식이 달라지듯이 우리 하나님께서도 각각 구약 시대와 신약 시대의 경륜을 다르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구약에는 좀 더 초등교육, 신약에는 좀 더 어른스러운 훈육을 하나님이 베푸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불변하십니다.
[『기독교 강요』. 2.11.14.]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이루는 구원은 결코 변함이 없습니다.
앞의 제13절과 여기에서 칼빈은 구약과 신약의 경륜의 다양함을 하나님의 맞추어 주심(accommodatio divina)에 비추어 설명합니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11.14, 각주 681.
다만 사람들의 다양하고 가변적인 수준에 맞추어서 하나님이 자기의 구원 경륜을 이루어 가신다는 것입니다. 의사가 젊은이에게는 젊은이답게 병을 치료하고, 또 나이 든 사람은 나이 든 사람답게 병을 치료하듯이, 우리 하나님도 의사로서 각 세대에 맞는 치료법을 구약과 신약에, 비록 상이하지만 실체는 같은 그 치료법을 베푸셨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옛날에는 현재(顯在)하지 않으시는 그리스도를 표상하고 그가 오실 것을 선포하기 위하여 어떤 표징들이 필요했다. 그러나 지금은 제시되신 그를 표상하기 위하여 다른 표징들을 사용하는 것이 마땅하다(Sic Christum aliis signis et absentem figurari, et venturum praenuntiari oportuit: aliis nunc exhibitum repraesentari decet). 그리스도의 강림 이후 하나님의 부르심은 모든 백성을 통하여 이전보다 더욱 넓은 곳까지 이르렀고 성령의 은혜는 더욱 풍성하게 퍼져 갔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11.14.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가 주시는 은혜를 누리되, 실체인 신약 시대에서 모형이고 표상인 구약 시대를 거꾸로 바라다보는 그 은혜를 이 시대에, 신약 시대에 누려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의 손과 자기의 의지로, 자기의 은혜로 베푸시는 이러한 자유로운 경륜(dispensatio libera)에 대해서 그 누구도 화날 수 없을 것입니다.
[결론]
이제 이 부분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첫째, 율법은 단지 문자적으로 보면 돌판에 새겨진 것으로 죽음을 낳고 저주의 사역을 감당하며, 의식이 그러하듯이 형상을 담고 있어 몸이 나타나면 폐지되어 무화되지만, 없어지지만, 복음은 마음에 새겨진 영적인 교리로서 생명을 낳고 의의 사역을 감당하며 영구적입니다.
둘째, 구약의 율법은 그 자체로는 초등 학문에 속한 것으로 예속하는 증서에 불과하나, 신약의 복음은 자유롭게 하는 새 언약으로서 중보자 그리스도를 믿는 약속의 자녀가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을 지니게 합니다.
세 번째, 구약 시대 때는 하나님의 은혜가 한 민족에 국한되었으나, 신약 시대 때는 그리스도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화목자로서 택한 받은 자의 수가 차기까지 이방인을 부르십니다.
넷째, 하나님은 구약과 신약의 경륜에 있어서 자기의 불변하신 뜻을 가지고 계시지만, 농부와 집안의 가장과 의사가 각각의 세대에, 각각의 사람에 맞추어서 다양하게 베풀고 치료하고 양육하듯이 하나님도 다양한 경륜을 베푸셨다는 것입니다.
78강 결론
율법은 단지 문자적으로만 보면, 돌판에 새겨진 것으로서 죽음을 낳고 저주의 사역을 감당하며, 의식이 그러하듯이, 형상을 담고 있어 몸(실체)이 나타나면 폐지되어 무화(無化)되지만, 복음은 마음에 새겨진 영적인 교리로서 생명을 낳고 의의 사역을 감당하며 영구적입니다.
구약의 율법은 그 자체로는 초등 학문에 속한 것으로서 예속하는 증서에 불과하나, 신약의 복음은 자유롭게 하는 새 언약인바, 중보자 그리스도를 믿는 약속의 자녀가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을 지니게 됩니다.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한 민족에게 국한되었으나 신약 시대에는 그리스도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화목자로서 택함 받은 자의 수가 차기까지 이방인을 부르십니다.
하나님은 구약과 신약의 경륜에 있어서 자기의 불변하는 뜻을 가지고 계시지만, 마치 농부가 때에 맞는 일을 하고, 집안의 가장이 자녀들이 성장함에 따라 가르침을 달리 하며, 의사가 각 세대에 맞는 치료법을 적용하듯이, 자기 백성에게 다양한 양상으로 맞추어 주십니다.
78강 | 2.11.7-14 (2권 371-383페이지)
새 언약은 옛 언약보다
은혜가 더 크고 모든 민족에게 미침
칼빈은 『기독교 강요』 2권 11장에서 구약과 신약의 차이성을 논하면서 다섯 가지 점에 주목합니다. ‘첫 번째, 구약은 좀 더 지상적이고 열등한 훈련 방식을 취하였다. 신약 시대는 천상적인 것의 자체를 좀 더 드러낸다.’ ‘두 번째, 구약 시대 때는 아직 모형에 속한 것이라면, 신약 시대는 그 실체, 몸을 드러낸다.’ 우리가 이 두 가지의 차이점에 대해서는 지난 강의 때 보았습니다.
[『기독교 강요』. 2.11.7.]
이제 세 번째 차이점으로 칼빈은 구약 시대 때는 좀 더 문자적(litera)이고, 신약 시대 때는 영적(spiritualis)이라는 사실에 주목합니다.
예레미야 31장에서 하나님은 선지자에게 이제 새 언약을 주실 터인데 그때에는 율법이 우리 속에 마음에 새겨질 것이라고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율법과 복음은 실체에서 동일합니다. 그러나 율법은 그 자체로는 문자적이고, 복음에 역사가 있어야 영적인 의미를 갖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복음은 영적인 교리라고 볼 수 있습니다. 율법은 그 자체로 돌판들 위에 새겨진 자구이며 또한 그것이 명령에 좀 더 치중해 있다면, 복음은 사람들의 마음에 기록된, 심중에 말씀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명령보다 약속의 성취에 더 방점이 찍혀 있는 것입니다. 율법이 죽음의 선포라면 복음은 생명의 선포고, 율법이 저주라면 복음은 의의 선포입니다. 율법은 복음이 없이는 그 자체로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율법의 성취로서 영속합니다(고후 3:6-11). 물론 이러한 차이가 복음과 율법의 실체에 있어서의 차이가 아니라는 점을 우리는 다시금 상기해야 됩니다.
사도 바울은 선지자보다 율법에 대해서 많은 반감 어린 말을 합니다. ‘율법 아래 있는 것은 저주 아래 있는 것이다’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이 역시 우리가 기억할 것은 율법을 문자적으로만 파악했을 때 그러한 것입니다. 진정한 율법의 성취이신 그리스도를 바라본다면, 복음의 명료함 가운데 율법의 예표와 그 희미함을 밝힌다면, 율법은 은혜의 법으로서 우리에게 다가올 것입니다.
[『기독교 강요』. 2.11.8.]
구약은 문자적이라 하는데, 성령의 작용이 없이 공표되었기 때문이다. 신약은 영적이라고 하는데, 여호와가 사람들의 마음에 영적으로 새겨 기록하셨기 때문이다(Vetus testamentum literale est, quia sine spiritus efficacia promulgatum; novum spirituale, quod Dominus hominum cordibus spiritualiter insculpsit).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11.8.
구약은 좀 더 문자적입니다. 성령의 역사, 보혜사 성령의, 그리스도의 영의 임재가 없다면 구약은 결코 살리는 은혜의 법에 대하여 우리에게 말하지 않습니다. 신약은 영적입니다. 신약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 이루신 복음을 우리의 마음에 새겨 주시고(고후 3:6) 진리의 영의 감화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에 이르는 그 길로 나아가게 하기 때문입니다. 구약은 그 자체로는 죽음을 낳습니다. 신약은 구약의 성취요, 또 구약에 계시된 율법의 약속의 성취이기 때문에, 신약은 생명의 도구가 되고 “생명의 기관”(organum vitae)이 됩니다. 그러므로 구약은 그 자체로는 아직 의문의, 문자 그 자체의 율법에 머물러 있다면, 그것은 결코 생명에 이르는 길이 될 수 없습니다. 구약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할 때 그때에만 의를 비추게 되고, 신약의 복음은 의의 성취의 복음이므로 구약이 복음을 바라볼 때에만 예수 그리스도의 성취를 바라볼 때에만 구약의 율법도 신령한 도구로 사용된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의식법에 있어서 이 점은 더욱 분명해집니다. 구약과 신약 시대에 성자 예수 그리스도는 언제나 제2위 하나님으로 계십니다. 그러나 구약은 아직 그가 드러나 계심, 곧 현재(顯在)하심을 형상으로만 표현합니다. 그러나 신약 시대 때는 몸 자체로 그것을 표현하기 때문에, 신령하게 표현하기 때문에 문자 자체에 머물지 않고 우리의 심령에 그것을 새겨 주는, 그래서 새 언약의 은혜가 이제 신약 시대의 율법을 통하여서 더욱 우리에게 분명히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율법의 성취가 그리스도요, 그리스도가 복음의 실체이시기 때문에 그러한 것입니다.
신구약 시대에 모든 백성은 연약함 가운데 있습니다. 그러나 구약의 시대는 연약함 자체를 드러내는 것이 좀 더 직접적이었다면 신약 시대 때는 그 연약함에 자비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좀 더 실제적이고 직접적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동일하신 입법자이지만 구약 시대에 하나님은 그들을 깨닫게 하신다면, 신약 시대 하나님은 그 깨달음을 이루어 주시고 은혜로 율법의 명령과 규범을 이루어 가시는 그 점이 바로 구약과 신약의 차이라는 것입니다.
[『기독교 강요』. 2.11.9.]
성경은 구약을 사람들의 영혼에 두려움을 낳는 “예속 언약”이라고, 신약을 그들을 들어 올려 확신과 평정에 이르게 하는 “자유 언약”이라고 부른다(Vetus enim testamentum scriptura vocat servitutis, quod timorem in animis generet; novum autem libertatis, quod in fiduciam ac securitatem eosdem erigat).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11.9.
이제 네 번째 차이는 구약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명령하고 그들을 아직 묶어 놓고 있는 ‘예속적’(servitutis) 측면이 강하다면, 신약 시대 때는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자유함을 누리는 그러한 “자유 언약”([testamentum] libertatis)으로서의 측면이 강하다는 것입니다. 여기서도 역시 우리가 기억해야 될 것은 구약이나 신약이나 믿어서 구원에 이르는 도는 동일합니다. 구약이나 신약이나 하갈의 후손이 아니라 사라의 후손이 구원받는 것입니다. 이스마엘의 씨가 아니라 이삭의 씨가 아브라함의 언약의 후손이요 그가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칼빈이 말하는 구약과 신약의 차이로서 구약은 예속 언약이고 신약은 자유 언약이라고 함은, 구약이 구약 그 자체로 실체를 바라보지 않고 완성이 전제되지 않는 그러한 구약 자체에 머물고 있다면, 그것은 예속이라는 것입니다. 이 점을 우리가 잘 새겨야 됩니다. 구약의 교훈이 예속적이라는 말이 결코 아닙니다. 구약의 교훈이 신약을 바라보고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한, 그 구약의 교훈 역시 자유의 교훈입니다. 여기서 칼빈이 구약과 신약의 차이를 이야기하는 것은 구약이 그 자체로 머물러 있을 때 그것은 예속적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5절과 갈라디아서 4장 6절에서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는 양자의 영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이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면 더 이상 옛것에 속하여 있지 않습니다. 더 이상 모형과 예표의 형식에 놓여 있지 않습니다. 이제는 실체이신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시온의 대로가 열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도성의 실체가 우리 안에 임하는 것입니다(히 12:22). 그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갈라져서, 이제는 여종 하갈에 속한 것이 아니라 사라의 후손으로서 진정한 예루살렘, 진정한 성전,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가운데 그와 하나가 되는 복음의 삶을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구약은 아직 문자 그 자체에 머물러 있어 “공포와 전율”(pavor ac trepidatio)이 또한 징계와, 우리를 채찍질로 다스리는 그러한 엄격함이 강조된다면, 신약 시대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그것으로부터 도피하는,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품에 거하는 복음의 역사가 있다는 것입니다. 구약의 초등 학문은 예속적입니다마는(갈 4:2-3) 신약의, 이제 하나님이 우리를 자라게 하시고 성취된 경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자녀의 도는 자유의 도라는 것입니다. 구약이 법조문에 쓴 증서(골 2:14)에 강조점을 둔다면, 신약은 이제 그 증서를 폐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구약이 휘장으로 가로막힌 지성소를 보인다면 신약은 그 휘장이 예수 그리스도의 찢긴 몸으로 갈라지는 그 은혜를 우리에게 보인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강요』. 2.11.10.]
아우구스티누스가 이야기하듯이, 구약과 신약은 실체에 있어서는 다름이 없습니다. 다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다 이루신 것을 구약 시대 백성은 아직 눈으로 보듯이, 손으로 만지듯이 한 것은 아니라는 측면에서 구약 백성은 여전히 열등한 수준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거듭난 백성에게 주시는 믿음은 사랑의 열매를 맺는 믿음입니다(갈 5:6). 하나님의 “약속의 자녀”(롬 9:8)는 자유함 가운데서 율법을 즐거워합니다. 이것이 신약 시대 백성의 고상함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 이루셨기 때문에 단지 문자에 속한 것, 증서에 속한 것에 예속되어 살지 않습니다. 그것을 다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선한 것과 의로운 것과 거룩한 것과 신령한 것을 율법을 통하여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복음에 명료성(claritas)이 있고 확실성이 있고 복음에 완전함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부족하나 복음은 완전하므로, 그 복음의 계시는 더 한층 분명하므로, 우리가 새 시대에는 그 경륜 가운데 사는 것입니다. 무엇이 분명한 것입니까?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에 새겨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새 언약입니다. ‘내 법을 네 안에 두고 네 마음에 둔다’라고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렘 31:33). 현재의 그림자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 주시는 것은 현재의 것을 통하여 영원한 것을 드러내십니다. 오히려 현재의 것에 눈멀지 않고 영원한 것에 눈을 떠서 하나님이 보여 주시는 내적인 것, 은밀한 것, 신령한 것을 우리가 누리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강요』. 2.11.11.]
다섯 번째 차이는 이제 구약에 하나님의 경륜은 하나님이 정하신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한 민족”(gens una)에 제한되어 있었다면, 이제 신약 시대 때 하나님의 경륜은 전 세계로 인종과 민족과 세계와 나라를 다 포괄하는, 하나님의 새로운 시대의 질서를 보여 준다는 것입니다. 구약 시대에 여호와의 분깃은 그 백성인 야곱의 후손, 또 모세의 법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한정되었다면(신 32:8-9), 이제 신약 시대에 하나님의 경륜은 모든 만민을 포괄하는 것입니다. 물론 구약이나 신약이나 하나님의 선택의 작정은 다름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선택은 하나입니다. 그의 택함 받은 백성은 구원을 얻습니다. 단 구약 시대 때 그 선택이 이스라엘 백성에 한정되었다면, 이제 신약 시대 때는 그 선택이 모든 나라와 열방을 향하여 뻗어 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때가 차매”(갈 4:4)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화목자가 아니라 모든 사람들과 하나님의 화목자로 세워지셔서, 그동안 막혀 있던 담을 허시고(엡 2:14), 외인이요 나그네라고 여겨졌던 이방인들을 다 안으시는, 그래서 먼 데까지 평안의 복음이 전하여지고(엡 2:17) 헬라와 유대인과 할례와 무할례가 다 폐하여지는(갈 6:15), 그리하여 오직 예수 그리스도가 만유의 만유가 되시고(골 3:11), 예수 그리스도의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고(시 2:8), 바다에서 바다, 강에서 땅 끝까지 이르는(시 72:8; 참조. 슥 9:10) 그러한 은혜의 역사가 신약 시대, 새 시대에는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강요』. 2.11.12.]
이방인들을 부르셔서 하나님이 새로운 백성을 조성할 때, 이 이방인을 부르심(vocatio gentium)은 단지 인종과 민족과 어떤 나라의 지경의 확장이 아니라 새로운 시대의 성숙한 성취, 더 나은 성취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 이스라엘 백성은 구약 시대에 머물러 구약 시대의 은혜를 누리는 것이 아니라 그들도 새로운 시대의 한 민족으로서 더 고상한 은혜를 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가지고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마 10:5-6; 15:24)뿐만 아니라 모든 열방의 땅 끝까지 잃어버린 양들을 위하여 나아가야 되는 것은, 새 시대의 경륜은 이제 세상 끝날까지, 땅 끝까지 모든 인종, 민족을 포괄하고, 그리고 새 시대의 경륜은 이전의 은혜보다 훨씬 더 큰 은혜, 더 실체적인 은혜 그것이 부여된다는 것입니다.
이제 이방인들은 자기들에 대한 이러한 공적인 부르심으로 인해 유대인들과 동등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말하자면 죽은 유대인들의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음이 분명해졌다(ista vero publica vocatione non modo Iudaeis aequabantur gentes, sed velut in demortuorum locum subire eas apparebat).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11.12.
그러므로 칼빈은 ‘이방인들을 공적으로 부르심은 유대인과 동등하게 할 뿐만 아니라 유대인의 자리를 대신하고 이전의 은혜보다 더 큰 은혜를 누리게 하신다,’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이제는 유대인조차 새로운 시대의 은혜에 동참하는 그러한 새 시대의 복음에 당위성이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 강요』. 2.11.13.]
하나님이 구약과 신약의 경륜을 다양하게 하신 것은 다양한 세대에 다양한 양상으로 맞추어 주기 위하심입니다. 농부(hyems)가 시절에 따라 새로운 일을 하듯이, 집안의 가장(paterfamilias)이 자녀가 성장함에 따라 그 자녀를 기르고 양육하는 방식이 달라지듯이 우리 하나님께서도 각각 구약 시대와 신약 시대의 경륜을 다르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구약에는 좀 더 초등교육, 신약에는 좀 더 어른스러운 훈육을 하나님이 베푸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불변하십니다.
[『기독교 강요』. 2.11.14.]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이루는 구원은 결코 변함이 없습니다.
앞의 제13절과 여기에서 칼빈은 구약과 신약의 경륜의 다양함을 하나님의 맞추어 주심(accommodatio divina)에 비추어 설명합니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11.14, 각주 681.
다만 사람들의 다양하고 가변적인 수준에 맞추어서 하나님이 자기의 구원 경륜을 이루어 가신다는 것입니다. 의사가 젊은이에게는 젊은이답게 병을 치료하고, 또 나이 든 사람은 나이 든 사람답게 병을 치료하듯이, 우리 하나님도 의사로서 각 세대에 맞는 치료법을 구약과 신약에, 비록 상이하지만 실체는 같은 그 치료법을 베푸셨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옛날에는 현재(顯在)하지 않으시는 그리스도를 표상하고 그가 오실 것을 선포하기 위하여 어떤 표징들이 필요했다. 그러나 지금은 제시되신 그를 표상하기 위하여 다른 표징들을 사용하는 것이 마땅하다(Sic Christum aliis signis et absentem figurari, et venturum praenuntiari oportuit: aliis nunc exhibitum repraesentari decet). 그리스도의 강림 이후 하나님의 부르심은 모든 백성을 통하여 이전보다 더욱 넓은 곳까지 이르렀고 성령의 은혜는 더욱 풍성하게 퍼져 갔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11.14.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가 주시는 은혜를 누리되, 실체인 신약 시대에서 모형이고 표상인 구약 시대를 거꾸로 바라다보는 그 은혜를 이 시대에, 신약 시대에 누려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의 손과 자기의 의지로, 자기의 은혜로 베푸시는 이러한 자유로운 경륜(dispensatio libera)에 대해서 그 누구도 화날 수 없을 것입니다.
[결론]
이제 이 부분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첫째, 율법은 단지 문자적으로 보면 돌판에 새겨진 것으로 죽음을 낳고 저주의 사역을 감당하며, 의식이 그러하듯이 형상을 담고 있어 몸이 나타나면 폐지되어 무화되지만, 없어지지만, 복음은 마음에 새겨진 영적인 교리로서 생명을 낳고 의의 사역을 감당하며 영구적입니다.
둘째, 구약의 율법은 그 자체로는 초등 학문에 속한 것으로 예속하는 증서에 불과하나, 신약의 복음은 자유롭게 하는 새 언약으로서 중보자 그리스도를 믿는 약속의 자녀가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을 지니게 합니다.
세 번째, 구약 시대 때는 하나님의 은혜가 한 민족에 국한되었으나, 신약 시대 때는 그리스도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화목자로서 택한 받은 자의 수가 차기까지 이방인을 부르십니다.
넷째, 하나님은 구약과 신약의 경륜에 있어서 자기의 불변하신 뜻을 가지고 계시지만, 농부와 집안의 가장과 의사가 각각의 세대에, 각각의 사람에 맞추어서 다양하게 베풀고 치료하고 양육하듯이 하나님도 다양한 경륜을 베푸셨다는 것입니다.
78강 결론
율법은 단지 문자적으로만 보면, 돌판에 새겨진 것으로서 죽음을 낳고 저주의 사역을 감당하며, 의식이 그러하듯이, 형상을 담고 있어 몸(실체)이 나타나면 폐지되어 무화(無化)되지만, 복음은 마음에 새겨진 영적인 교리로서 생명을 낳고 의의 사역을 감당하며 영구적입니다.
구약의 율법은 그 자체로는 초등 학문에 속한 것으로서 예속하는 증서에 불과하나, 신약의 복음은 자유롭게 하는 새 언약인바, 중보자 그리스도를 믿는 약속의 자녀가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을 지니게 됩니다.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한 민족에게 국한되었으나 신약 시대에는 그리스도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화목자로서 택함 받은 자의 수가 차기까지 이방인을 부르십니다.
하나님은 구약과 신약의 경륜에 있어서 자기의 불변하는 뜻을 가지고 계시지만, 마치 농부가 때에 맞는 일을 하고, 집안의 가장이 자녀들이 성장함에 따라 가르침을 달리 하며, 의사가 각 세대에 맞는 치료법을 적용하듯이, 자기 백성에게 다양한 양상으로 맞추어 주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