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강 [2.11.1-6] 구약은 초등 학문 아래 머물고 신약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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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 | 2.11.1-6 (2권 361-371페이지)



구약은 초등 학문 아래 머물고
신약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이름


[『기독교 강요』. 2.11.1.] 


     칼빈은 『기독교 강요』 2권 10장에서 구약과 신약의 일치성(similitudo)을 다룬 후 이곳 11장에서 구약과 신약의 차이성(differentia)에 대해서 논의를 계속합니다.  신구약은 실체 그 자체에 있어서는 동일하나 경륜에 있어서 다르다’(『기독교 강요』, 2.10.2.). 이것은 칼빈이 주장한 대원칙입니다. 우리가 이곳에서 구약과 신약의 차이성을 말할 때 꼭 명심해야 할 것은 구약과 신약의 일치성에 기초한 차이성을 칼빈이 주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혹자는 너무 이 부분만을 강조해서 칼빈에게도 세대주의적인 그런 경향이 있지 않냐 하는 그러한 주장을 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결코 올바른 생각이 아닙니다. 칼빈은 일치 가운데 차이성, ‘실체에 있어서 일치하나 경륜에 있어서 다르다,’ 이렇게 말하고 있고, 그 경륜(administratio)의 다양성은 하나님의 섭리에 있어서 구약은 구약의 섭리, 신약은 신약의 섭리, 하나님이 일하시는 질서의 차이지, 실체의 차이가 아니라는 것, 이 점을 칼빈은 강조하고 있음을 우리가 기억해야 됩니다. 여기서 칼빈은 다섯 가지의 구약과 신약의 차이성을 이야기하는데, 그것을 우리가 순서대로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첫 번째는 구약 시대 때는 땅의 소유를 통하여서 하늘의 기업을 바라보게 했다는 것입니다. 구약이든 신약이든 궁극적인 소망은 영생에 있고 불멸에 있고 신령한 것에 있습니다. 그러나 구약은 좀 더 땅의 것을 많이 보여 주고, 많이 들려주고, 땅의 것의 혜택을 많이 있게 하고, 구름 기둥, 불 기둥, 만나와 메추라기, 홍해를 가르고 반석에서 물이 나오고, 또 쓴물이 단물로 바뀌고, 여러 대적들을 그들의 목전에서 물리쳐 주시고, 여리고 성, 아이 성 이기게 하시고, 이런 많은 것들, 이런 구약의 경륜은 좀 더 지상의 것을 많이 보여 주시고, 들려주시고, 이루어 주심으로 하나님이 하나님의 뜻을 알려 주셨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통하여서 하나님의 인애와 긍휼을, 자비를 또 궁극적으로 이후 실체가 오실, 그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했다는 것, 이 점에서 구약과 신약의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칼빈은 다시금 이 부분을 다루면서 신구약의 차이는 실체가 아니라 “경륜의 방식”(modus administrationis)에 관계된다는 점을 부각시킵니다. 구약 백성들은 땅에 있는 혜택들을 더 많이 가시적으로 누렸습니다. 이제 복음을 통하여서 미래의 삶의 은혜가 더욱 명백하고 분명하게 제시되었으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시행하셨던 “열등한 훈련방식”(inferiori modus exercitationis)을 하나님이 이제는 제하여 버리시고, 새로운 시대, 신약 시대에 더욱 영적이고 신령하고 본질적이고 실체적이고 마음에 새겨진 그러한 율법, 또 그것을 누리는 은혜, 이것을 좀 더 이 시대에는 직접적으로 바라보고 묵상하게 하셨다, 그래서 구약의 것은 좀 더 열등한 그러한 수준의 훈련 방식이었다라고 이렇게 차이점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땅에 속한 모든 혜택을 유대인들에게 베푸시면서 그들을 자기 자신의 손으로 이끄심으로 하늘에 속한 것들에 대한 소망에 이르게 하신다(huc terrena quibus eos prosequebatur beneficia Deum ipsum destinasse, ut ad spem caelestium ita ipsos manu duceret).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11.1.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에게 베풀어 주신 그 많은 은혜들이 단지 지상의 것을 보고 안주하라고 주신 것은 아니라는 것이죠. 궁극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도 많은 고난을 겪었습니다. 그들이 들어가야 될 가나안 땅, 그곳에서의 삶은 완전한 지상의 복락의 삶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궁극적인 복, 최고의 복이자 하나님이 주시는 신령한 복은 가나안 땅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가나안 땅에 의해서 표상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하늘의 유업을, 하나님이 주시는 영생의 기업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신약 시대 백성에 비해서 좀 더 지상의 것을 많이 베푸시고, 많이 지각하게 하시고, 누리게 하셨다는 것을 우리가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 강요』. 2.11.2.] 


     갈라디아서에서 보면, 율법하에서 구약 시대 때는 후견인(tutor) 역할을 하고 초등 교사(paedagogus)의 역할을 하는 그 율법하에서 이제 좀 더 어린이 같은 그러한 훈련을 받았다면, 신약 시대 때는 그 율법의 초등 교사를 벗어나서 복음의 성숙한 교육을 받게 된다, 이러한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실체는 다르지 않으나 교회도 하나이나 구약 시대의 교회, 구약 시대 때 믿음의 조상들은 좀 더 “어린이 세대”(aetas puerilis)의 초등 학문(paedagogia)과 같은 것에 머물러 있었다, 이렇게 차이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땅의 것을 통하여서 천상의 것을, 또 지상의 것을 통하여서 영원한 것을 하나님이 표상하십니다. 아브라함이 땅의 약속을 받을 때 하나님은 자기가 아브라함의 보호자이심을 드러내시고 궁극적인 기업이 그 하나님의 자녀 됨에 있음을 말씀해 주십니다. 이 땅의 유업이 궁극적인 유업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애, 그것의 징표(symbolum)와 하늘 기업의 모형(typus)으로 이 땅을 주신 것이지, 땅이 그 자체로 궁극적인 목적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영원한 분깃이시요(시 73:26; 참조. 시 84:2), 여호와가 산업이시요, 여호와가 잔의 소득이시고, 또 여호와가 분깃을 주시고 분깃을 지키시는 분이시다(시 16:5), 그래서 여호와가 유일한 소망이시고 이 땅에서의 분깃이시다(시 142:5), 이러한 시편의 노래가 구약 시대 백성의 노래였다면, 그것은 그들에게 좀 더 땅의 복을 더 가시적으로 보여 주시고, 실제로 그들이 가나안 땅을 복지로 그렇게 여기고 살았듯이 그렇게 지상의 삶을 허락하셨지만, 역시 여호와의 복은 영생에 있고, 하나님의 자녀 됨에 있고 여호와를 아버지로 모시는 그 삶의 신령한 복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강요』. 2.11.3.] 


     구약 백성의 훈련 방식이 왜 이렇게 신약 시대 백성에 비해서 초보적이었을까요? 이것은 그들이 좀 더 연약했다라고 칼빈은 생각합니다. 그래서 구약 백성들의 그 “연약함의 척도”(modulus teneritudinis)에 맞추어서 그들에[게] 걸맞은 훈련을 시킨 것이 구약 시대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경륜이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 강요』. 2.11.4.] 


     두 번째, 구약과 신약의 차이점은 신약은 실체를 드러내는 그러한 계시의 점진적 발전 가운데 있었다면, 구약 시대 때는 아직 실체가 드러나지 않고 모형으로 그 실체를 보여 주었다는 이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신약 시대 때는 현존하는 진리의 실체, 곧 몸 자체가 제시되었다면, 구약 시대 때는 아직까지 바라보는 표상에 머물고 있었다는 것에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영원한 제사장이고(시 110:4; 히 7:11) 유일하신 중보자로서 끝내 자기 몸을 드리셔서 단번에 영원한 온전한 제사로 모든 구원을 이루지 않으셨습니까?(히 10:14) 이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이 실체이고 몸이며 구약 시대 때의 레위 지파의 제사, 그것은 다 바라보는 제사, 예표적 제사였다는 것입니다. 신약 시대 때는 예수님께서 다 이루셔서 이제 연약한 가운데 있는 백성이 짐승으로 드리는 것이 아니라,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 단번에 영원히 온전하게 드리신 그 제사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드리는, 곧 예수 그리스도의 피 제사의 의가 믿는 자들의 의가 되는 그것이 바로 신약 시대 때의 제사로서 구약의 제사와 차별성을 갖는다는 것입니다. 
     율법은 육체적이고 외적인 의를 지녔지만, 이제 복음은 그 실체를 드러내고, 이제는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성취된 것을 믿고 그것으로 은혜를 누리게 되는 것, 이것이 구약과 신약의 차이라는 것입니다. 율법은 장차 올 좋은 일의 그림자일 뿐이요, 참 형상이 아니라고 히브리서 10장 1절에 말했는데, 율법은 복음에 제시된 더 좋은 소망에 이르는 ‘서론’(introductio)의 역할을 했다라고 칼빈은 이렇게 말합니다. 서론과 본론과 결론이 서로 배치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경륜에 있어서 서론은 전 단계요, 이제는 신약 시대 때는 더 좋은 소망에 이르는 그러한 실체의 시대가 되었다라고 하는 것이죠. 

언약이 최종적으로 확정되고 비준되는 율법의 완성은 그리스도이시다(Illius complementum, unde tandem habet ut statum ratumque sit, Christus est).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11.4.

     언약이 최종적으로 확정되고 비준되는 율법의 완성은 그리스도십니다. 구약의 모세의 그러한 의식들, 제사, 절기, 언약의 여러 법들은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그 시대 백성에게 맞추어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의식 자체는 폐지되었고, 이제 그 의식의 폐지는 그저 없어진 것이 아니라 완성된 것으로서의 폐지이기 때문에, 신약 시대 때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서 구약에 약속된 것의 실체를 바라보게 되고, 그 실체적인 은혜를 누리게 되고, 예수 그리스도가 언약의 보증이 되시며 친히 중보자가 되심으로(히 7:22),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에 의지하여서 신약 시대 때는 다 이루신 그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실체적인 의로 영생을 누리는 이 점에서, 바라보는 예식과 성취된 실체, 이 차이가 두 번째 구약과 신약의 차이다라고 칼빈은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성결하게 되고 견고하게 세워진 후에야 새롭고 영원한 언약, 그 새 언약이 성취되는 것이죠. 그래서 ‘그 언약은 내 피로 세워진 새 언약이다’(눅 22:20),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찬의 때에 또한 말씀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언약은 그리스도의 피로 인침을 받았을 때 그 자체의 진리 그것에 서서 새롭고 영원한 언약이 된 것입니다. 곧 실체가 있으므로 모형이 있고, 성취가 있으므로 약속이 있습니다. 구약도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에 이르는 그러한 은혜의 복음의 시대입니다. 그러나 신약은 성취된 은혜입니다. 구약은 바라보는 은혜입니다. 


[『기독교 강요』. 2.11.5-6.] 


     예수를 믿어 구원에 이르는, 아브라함이 믿으니 의로 여김을 받는, 믿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그 구원의 도는 구약과 신약이 다르지 않지만, 이제 구약 시대 때는 초등 교사의 후견하에 있었다면, 신약 시대 때는 의의 태양이신 그리스도의 빛의 광채가 명료하게 비추고, 확실하게 비추고, 친근하게 비추어서, 이제 그것을 온전히 누리는 그러한 삶을 신약 시대 백성이 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어렸을 동안”(갈 4:1)은 율법이 초등 교사, 몽학 선생의 역할을 하지만(갈 3:24) 이제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고, 참 빛이시고 생명이시고 몸이시고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서 모든 의를 다 이루셨기 때문에, 그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고 믿고 영접하면, 누구라도 하나님의 자녀로 영생을 얻는 그 자리에 서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리스도의 손가락으로 지시하여 드러낼 수 있게 되었을 때, 마침내 열리게 되었다, 칼빈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골 2:3) 예수 그리스도께 있으므로 이제 우리는 봄으로 복이 있고, 들음으로 복이 있습니다(마 13:16). 구약 시대 때는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였으나, 이제는 보고 들음으로 복이 있다고 한 것은 구약은 예표요, 신약은 실체의 계시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실체는 동일합니다. 예표와 몸은 실체가 다르다는 것이 아닙니다. 실체에 대한 예표고, 실체 자체의 계시입니다. 그러므로 실체는 동일합니다. 다만 예표로 드러나느냐, 그 자체로 드러나느냐, 여기에서 구약과 신약의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이 주어지고, 특별히 신약 시대 백성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현존을 더 확실하게, 더 친근하게 누리게 되는 그러한 새 시대의 언약의 경륜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약 시대 복음의 역사이고 이것이 구약 시대와 신약 시대를 구별지어 주는 그러한 경륜의 차이인 것입니다.


[결론] 


     이제 우리가 이 부분을 한번 정리해 본다면, 
     첫째, 하나님은 구약 이스라엘 백성에게 사용하신 열등한 훈련 방식을 제하시고 신약 시대 자녀들이 복음을 통하여 미래의 삶의 은혜를 더욱 명백하게 제시받고 그 은혜를 직접 묵상하게 하셨습니다.
     둘째, 구약의 조상들은 우리와 동일한 교회에 속하였으나 아직 어린이 세대에 머물러 초등 학문 아래에 있었으므로 그 연약함의 척도에 따라서 영적인 선물들을 땅에 속한 것들을 예표로 삼아서 누렸습니다.
     셋째, 구약에서 형상과 그림자를 통하여 예표된 것이 이제 그 실체이자 몸이신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시고 모든 의를 이루신 그 신약 말씀의 빛으로 더욱 명료하게 더욱 친근하게 제시되었다는 것입니다.
     넷째, 언약이 최종적으로 확정되고 비준되는 율법의 완성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는 능력이 되는 복음, 이 복음의 더 좋은 소망에 이르는 서론의 역할을 한 것이 율법이다, 그러므로 율법은 폐지된 것이 아니라 완성된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다섯째, 하나님의 언약은 그리스도 자신의 피로 인침을 받았을 때 비로소 그 자체로 진리에 서서 새롭고 영원한 언약이 되었다고 칼빈은 이야기합니다. 실체는 신약의 새 언약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 제사로 완성된 더 좋은 언약, 새 언약 그것이 실체입니다. 구약의 모든 언약은 이 실체를 바라보는 은혜의 언약 곧 예표적 언약입니다. 이 점에서 구약과 신약의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77강 결론


  1. 하나님은 구약 이스라엘 백성에게 사용하신 열등한 훈련방식을 제하시고 신약 시대 자녀들이 복음을 통하여 미래의 삶의 은혜를 더욱 명백하게 제시받고 그 은혜를 직접 묵상하게 하십니다.
  2. 구약의 조상들은 우리와 동일한 교회에 속하였으나 아직 어린이 세대에 머물러 초등학문 아래에 있었으므로 그 연약함의 척도에 따라 영적인 선물들을 땅에 속한 것들을 예표로 삼아 누렸습니다.
  3. 구약에서 형상과 그림자를 통하여 예표된 것의 실체이자 몸이신 그리스도가 신약의 말씀의 빛으로 명료하게 계시됩니다.
  4. 언약이 최종적으로 확정되고 비준되는 율법의 완성은 그리스도이신바, 율법은 복음에 제시된 더 좋은 소망에 이르는 서론의 역할을 합니다.
  5. 하나님의 언약은 그리스도 자신의 피로 인침을 받았을 때 비로소 그 자체로 진리에 서서 새롭고 영원한 언약이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