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은 구약과 신약의 일치성을 논하면서 첫째로 ‘구약 백성도 신약 백성도 모두 영생을 소망하였다. 그 영생은 하나님의 자녀 됨에 있다. 이 자녀 됨이 구약 시대 때는 백성 됨으로, 예표적으로 나타난다,’ 이 부분을 강조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둘째, ‘구약과 신약의 일치성은 [신구약의 백성들이] 모두 지상의 것을 추구하고 산 것이 아니라 천상의 복을 바라보며 살았다. [그러나] 구약은 지상적이고 신약은 천상적이다,’ 이러한 세대주의적 이분법은 가당치 않다는 것입니다.
이제 셋째로 구약과 신약의 일치성을 논하면서 칼빈은 ‘[신구약의 백성들이] 모두 종말론적인 삶을 살았다,’ 그런 부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지상의 삶이 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지상의 삶을 넘어서 더 나은 삶, 우리가 바라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영화로운 삶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강요』. 2.10.10.]
하나님이 그들(믿음의 조상들)에게 부과하신 삶의 조건은 계속적인 훈련이었다(quae divinitus iniuncta illis fuit vivendi conditio, assiduum erat exercitium).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10.10.
그리하여 이 땅에 믿음의 조상들은 구약이건 신약이건 많은 고난을 겪었지만은 그 고난이 단지 비참함이 아니라 훈련이었다, 이것을 칼빈은 강조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더 귀한 것을 누리게 되는 그 훈련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구약 백성들에게 부과하신 삶의 조건도 신약 시대 백성과 다름없이 “계속적인 훈련”이었다는 것입니다. 구약의 징계는 저주이고 신약의 징계는 연단이다, 이런 이분법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신구약의 모든 족장들 그리고 사도들 그리고 신자들이 겪었던 그러한 지상의 삶의 역경들, 그 천상에 이르는 역정이 모두 하나님이 돌보시는 귀한 훈련의 과정이었다고 칼빈은 강조합니다.
칼빈은 이곳에서 구약의 여러 믿음의 조상들을 언급하면서 그들이 얼마나 어려운 삶을 살았느냐,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 자체로 좌절하지 아니하고 미래의 삶의 소망을 두고 나아갔느냐, 이 부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아담도 아주 어려운 삶 가운데 있었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그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는 자리에 선 것, 그 마귀 사탄의 궤계의 유혹에 넘어갔던 부분들뿐만 아니라 자기 아들이 서로 싸워서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이러한 것(창 4:8)을 아담이 겪었다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노아도 그 어려운 연단 가운데서 믿음으로 방주를 또 만들고(창 6:22) 그 홍수를 겪고 결국은 살아남았지만, 바로 자기의 자녀들이 겪는 여러 가지의 고난이 있었다는 것입니다(창 9:24-25).
[『기독교 강요』. 2.10.11.]
아브라함도 [하나님이] 그의 믿음을 바라보고, 그가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는 복을 누렸지만은. 칼빈은 아브라함이야말로 “십만에 버금가는 사람들의 존경을 받아야 한다,” 이렇게 말하면서 그의 삶이 “신앙의 최고 규범”(optima credendi regula)이다, 이렇게 말합니다. 아브라함의 삶이 어찌하여 이러한 평가를 받았을까요? 아브라함은 그저 이 땅에서 복된 삶만 살았을까요? 칼빈은 ‘아브라함이 얼마나 많은 고생을 해야 됐는가?’ 이런 것을 아주 간절하게, 절실하게 『기독교 강요』에서 전개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고, 그리고 부모와 친구도 떠나고, 또 그들과 서로 격리되고 빼앗기는 그런 삶을 살았다[고 합니다]. 또 [하나님이] 지시하는 가나안에 갔을 때 그곳이 부요하지 않고 가뭄이 들어서 또 그곳에서 다시 옮겨가게 되고(창 12:10), 또 옮겨간 곳에서 아내가 몸을 팔아야 할 만큼 그 지경에 이르는 그러한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고 합니다](창 12:11-20; 20:1-18). 이런 가운데서 그나마 혈육붙이로 남아 있었던 롯과도 또 서로 결별하고 만다[고 합니다](창 13:5-9). 이 가운데 노년에 태가 끊긴 듯했지만(창 15:2) 이삭이 태어났는데(창 21:2), 그 이삭도 또 제물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그 아들을 단에 눕히고 칼을 내리쳐야 하는 슬픔을 겪게 되었다[고 합니다](창 22:1-2).
아브라함은 전 생애의 역정에 있어서(toto vitae curriculo) 내침을 당하고 고통을 겪었으니, 만약 누군가 삶의 참상의 본을(exemplar calamitosae vitae) 화판에 그리려고 한다면 아브라함보다 더 적합한 경우를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10.11.
이러한 것을 이야기하면서 ‘아브라함은 전 생애의 역정에 있어서 내침을 당하고 고통을 겪었으니, 그 누구의 삶보다 참상을 잘 표현하려면, 인생의 비참함을 잘 표현하려면, 고통을 잘 표현하려면, 아브라함이 최고의 본이 된다’라고 칼빈은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기독교 강요』. 2.10.12.]
이삭에 대해서는 “최소한의 인생의 달콤함(suavitatis)조차 거의 맛보지 못”한 것이 그의 삶이었다고 또한 칼빈은 이야기합니다. 기근이 찾아왔고(창 26:1) 그 역시 또한 여러 가정의 문제로, 또 며느리들의 문제로(창 26:34-35), 아들 간의 분쟁으로, 야곱과 에서의 끝없는 분쟁(창 27:41-45; 창 28:1, 5), 이런 것으로 큰 어려움을 겪었다[고 합니다].
야곱은 극단적인 불행을 보여 주는 가장 두드러진 본이 된다(vero Iacob nihil quam extremae infelicitatis insigne est exemplar).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10.12.
야곱은 어떤가, 칼빈은 “극단적인 불행을 보여 주는 [가장] 두드러진 본”이 또한 야곱이다라고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형의 위협이 계속되었고, 태어난 곳에서 도망치듯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갔는데(창 27:41-45), 그곳에서 끊임없는 수고와 염려와, 또한 그곳에서 아주 애매한 지경에 처하게 되었고(창 29:15-20), 아내를 얻는 것도 여러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는 것입니다(창 29:23-27). 그래서 급기야 얍복강을 건너고 그곳에서 기도하며 몸이 위골이 될 정도로 하나님께 매여서 기도했지만, 또 그를 기다리는 에서를 두려워할 수밖에 없게 되었고(창 32:7, 11; 33:1-4),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과정에서 또한 라헬을 잃어버리게 됩니다(창 35:16-20). 그리고 라헬을 잃을 뿐만 아니라 요셉이 짐승에 물려 몸이 찢겨 죽었다는 소식(창 37:31-32), 물론 이것은 잘못된 소식이지만, 그 소식을 야곱은 오랫동안 듣고 살게 됩니다. 그리고 그 딸이 강간당하고(창 34:2, 5), 그리고 그 아들들이 그 종족을 무자비하게 살육하고 또 하나님의 할례를, 거룩한 할례를 이용하고(창 34:25), 이러한 것을 야곱이 다 겪었다는 것입니다. 그의 장자인 르우벤의 극악한 범죄가 있었고 아내가 더럽혀지고(창 35:22) 근친상간이 일어나고(창 38:18), 그리하여 바로 앞에 선 야곱은 자신의 지상의 생이 짧았지만 험악했다(breves ac malos)고 증언하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지 않습니까?(창 47:9)
이들을 통하여 우리는 무엇을 알게 됩니까? 그들이 좌절했음을 칼빈이 말하려고 이렇게 그들의 생을 조명했겠습니까? 그들은 지상의 삶에 안주하지 않고, 지상의 고통과 어려움과 말할 수 없는 막막함과 욱여쌈이 있지만, 그 땅의 것들(res terrenae)에 소망을 두지 않고 하늘의 것들, 영원한 것에 소망을 두고 살았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강요』. 2.10.13.]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이방에 있으나, 이방의 장막에 거하였으나,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 이 땅은 “외국인과 나그네”(hospites et inquilini)의 삶이지만 ‘본향’(patria)이 있다는 것을 바라보고 살았다(히 11:8-10, 13-16), 이것을 칼빈은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땅의 삶은 “나그네의 삶”(peregrinatio)인데 이 땅의 삶의 복락을 마치 마지막의 것인 양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이 땅의 삶 너머에는 본향의 삶이 있다는 것을 바라보는 그러한 종말론적인 삶을 구약 백성이든 신약 백성이든 믿음의 조상들이 살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지시하는 땅으로 가라[고] 했지만(창 12:1) 아브라함의 지상의 생은 어떠했습니까? 가나안 땅의 무덤 외에는 “발붙일 만한 땅”(행 7:5)도 얻지 못했다고 스데반은 설교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지상의 삶은 어떻게 보면 비참한 삶이었습니다. 그가 미래의 복을 바라보지 않았다면, 오직 믿어서 하나님께[서] 의로 여기는 그 은혜로 자녀 됨을 바라보지 않았다면, 어찌 아브라함의 생을 우리가 흠모할 수 있겠습니까.
[『기독교 강요』. 2.10.14.]
야곱이 “장자의 권리”(primogenitum)를 얻었습니다. 그러나 지상의 삶만 본다면, 아비 이삭의 축복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오히려 이삭의 축복이 없이 차자로 살았다면 에서를 두려워할 것도 없고, 도망칠 일도 없고, 야곱의 삶이 더 수월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야곱은 벧엘에서 여호와를 다시 만나고 그리고 다시 그가 돌아왔을 때, 숙곳에 그러한 어려움이 있었지만 ‘벧엘로 올라가자!’ 다시 벧엘로 올라가서 하나님을 바라보는 삶을 살지 않았습니까?
또한 다윗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지상의 삶의 역경에 있어서 다윗의 삶은 또 얼마나 우리에게 큰 모범이 되는 것입니까? 그는 끝없이 쫓김을 당했습니다. 칼과 창이 항상 그의 가까이에 있었습니다. 시편 116편 15절에 다윗은 “[여호와의] 경건한 자들의 죽음은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귀중한 것”이다[라고 했는데], 죽음이 “최후 경계와 목표”(ultima linea et meta)라면 이렇게 노래했겠습니까? 죽음이 단지 끝이라면 결코 다윗은 이렇게 노래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죽음이 여호와 보시기에 귀중한 것임은 죽음 이후에 영생의 복락이 있다는 것이죠.
[『기독교 강요』. 2.10.15.]
영원한 언약의 복, 그 신령한 복이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지는 자녀 됨의 영광과 그 빛난 광채가 있기 때문에, 다윗이 그 비밀들을 바라보고 노래하였다는 것입니다. 시편에 보면 다윗은 “나는 주와 함께 있는 나그네”(시 39:12)라고 노래했고 ‘각 사람의 삶은 그림자 같다’(시 39:6)라고도 노래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그치지 않고 다윗은 ‘나의 소망은 주께 있습니다. 내가 무엇을 더 바라리요’(시 39:7)라고 또한 노래하는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여호와의 인자하심은 자기를 경외하는 자에게 영혼부터 영원까지” 이른다고 했으며(시 103:17) “주는 한결같으시고 주의 연대는 무궁하”다고 또한 노래했습니다(시 102:27).
‘여호와가 주시는 나의 구원은 영원히 있고, 여호와가 베푸시는 나의 공의는 영원히 폐하여지지 아니한다’고 이사야 선지자가 이 말씀을 전했는데(사 51:6), 이 이사야 선지자의 이러한 증언도 다윗의 시편과 동일한 궤에 있습니다. 이 지상의 삶이 영원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시는 의와 구원이 영원하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강요』. 2.10.16.]
의인들은 하나님이 형통하게 할 것이요, 그의 영혼을 보존할 것이요(시 97:10), 정직한 자들은 기쁨을 누릴 것이요(시 97:11), 그의 뿔이 영광 중에 들릴 것이요(시 112:9), 정직한 자들은 주 앞에서 살 것이고(시 140:13), 의인은 영원히 기억될 것이고(시 112:6), 하나님이 그 영혼을 속량할 것일 것이다(시 34:22), 이러한 다윗의 시편들이 선지자들의 예언과 맞닿아 있다는 것입니다. 이 지상의 삶은 끝이 아닙니다. 선지자들은 멸망을 선포합니다. 지상의 국가에, 지상의 민족에 그 어려움을 선포합니다.
[『기독교 강요』. 2.10.17.]
그러나 선지자들은 그것에 머물지 아니하고, 영생의 복, 시온의 백성에게 이를 신령한 복을 또한 예언하지 않습니까?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보고 주의 형상에 만족하고(시 17:15), 하나님의 집에 푸른 감람나무와 같고(시 52:8), 종려나무와 같고 레바논의 백향목과 같은 그런 의인의 삶을 우리가 살게 되는 건데(시 92:12), 그것은 우리가 의로워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혜가 우리를 의롭다 삼아서 “주께서 의인의 죽는 것을 영원히 허락하지 아니하시리로다”(적용. 시 55:22), 이렇게 또한 노래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빛이 일기 시작하면 그 빛으로 이제 그의 백성이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그 부활의 비밀이 이미 시편에서 노래되고 있는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시 49:14). 현세의 삶이 끝이라면 어찌 이러한 다윗의 노래가 있겠습니까?
[『기독교 강요』. 2.10.18.]
“[그의] 노염은 잠깐이요 [그의] 은총은 평생”이라 했습니다(시 30:5).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시는 자비가 영원하다는 것입니다(사 54:7-8). 그래서 [그의] 경건하던 자들의 죽음이 하나님 보시기에 귀한 것이고(시 116:15), 죄인들의 죽음은 악한 것이라고 하는 것(시 34:21)은 바로 하나님이 그 의인들의 죽음조차 그 죽음이 끝으로, 멸망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영생의 과정에서의 죽음이므로, 그 죽음을 귀하게 보신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강요』. 2.10.19-20.]
이런 부분에 대해서 욥도 또한 노래한 것입니다. ‘내가 대속자가 살아 계심을 보리니 이제 내 육체 가운데 구세주 하나님을 보리라. 이 소망이 내 가슴에 남으리라’(적용. 욥 19:25-27) 하고 고난 중에 욥은 또한 노래했습니다. 미래의 불멸(immortalitas futura)을 바라본 것입니다. 이 지상의 삶이 마지막에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호와가 우리에게 베푸시는 구원의 “자비의 언약”(foedus misericordiae)이 점점 점점 밝아져서, 끝내는 “의의 태양”(sol iustitiae)이신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충만해지는 것(말 4:2)을 욥 또한 바라본 것입니다.
[『기독교 강요』. 2.10.21-22.]
선지자 에스겔은 마른 뼈에 생기가 돌고, 그리고 가죽과 근육과 힘줄과 그리고 여호와의 군대를 이루는 그 환상 가운데서 궁극적인 하나님의 생명의 복, 생기를 또한 바라본 것입니다(겔 37:1-14).
이사야 선지자는 “새 하늘과 새 땅이 내(여호와) 앞에 항상” 있다고 이사야 마지막 장 66장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다니엘 선지자는 “네 백성 중 책에 기록된 모든 자가 구원을 받을 것”이요, “많은 사람이 깨어나 영생을” 얻을 것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단 12:1-2).
[『기독교 강요』. 2.10.23.]
구약의 조상들이 그리스도를 그들 언약의 보증으로 여겼다…그들이 그 자신에게 미래의 모든 복에 대한 확신을 두었다(patres scilicet Christum in foederis sui pignus habuisse, atque in ipso omnem benedictionis fiduciam reposuisse).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10.23.
구약의 조상들도 그리스도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리스도의 미래의 복에 대한 확신을 두었습니다. 구약의 백성도 그리스도를 실체로 [둔] 언약에 작정된 약속을 소망하였습니다. 신구약은 [우리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함께 앉고, 그리스도의 것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서 예수 그리스도와 은혜를 누리는 자가 구약의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후손이라는 것입니다. 곧 은혜의 상속자들(heres)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기업을 얻는 것은 자질을 얻는 것이 아니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다 이루신 의를 우리 것 삼게 된다는 것입니다.
[결론]
이제 이 부분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첫째,] 하나님이 구약의 조상들에게 부과하신 삶의 조건은 계속적인 훈련이었습니다.
두 번째,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 등 구약의 조상들은 이 땅의 나그네의 삶에[서] 극심한 고난을 겪는 가운데서도 미래의 삶을 바라보고 죽음을 최후의 경계와 목표로 생각하지 않고, 한결같이 영원한 하나님의 자비를 간구하였다는 것입니다.
셋째로 구약의 조상들도 대속자 그리스도를 부활과 영생의 불멸에 이르는 언약의 보증으로 여겼고,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나라에서 영원히 누리게 될 복을 확신했다는 것입니다.
넷째, 하나님의 자비의 언약은 그 실체가 그리스도이심에 있어서 신구약이 다름이 없으나, 점차 그 의의 태양이신 그리스도가 점차 점차 밝히 드러나서, 신약 시대 때는 온전히 충만하게 비추게 된다는, 실체는 같으나 경륜이 다양하다는 이것을 칼빈은 굳게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76강 결론
하나님이 구약의 조상들에게 부과하신 삶의 조건은 계속적인 훈련이었습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등 구약의 조상들은 이 땅의 나그네 삶의 극심한 고난을 겪는 가운데서도 미래의 삶의 복을 바라보았고 죽음을 최후의 경계와 목표로 여기지 않고 영원히 한결같은 하나님의 자비를 간구하였습니다.
구약의 조상들도 대속자 그리스도를 부활과 영생의 불멸에 이르는 언약의 보증으로 여겼고 그리스도 안에서와 그의 나라에서 영원히 누리게 될 모든 복을 확신했습니다.
하나님의 자비의 언약은 타락 이후 구원의 첫 약속을 아담에게 주신 후(창 3:15) 그 빛이 점차 밝아져 의의 태양이신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온 땅에 충만히 비춥니다.
76강 | 2.10.10-23 (2권 340-359페이지)
구약 백성도 영원한 복을 바라며
지상의 계속적 훈련을 받음
칼빈은 구약과 신약의 일치성을 논하면서 첫째로 ‘구약 백성도 신약 백성도 모두 영생을 소망하였다. 그 영생은 하나님의 자녀 됨에 있다. 이 자녀 됨이 구약 시대 때는 백성 됨으로, 예표적으로 나타난다,’ 이 부분을 강조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둘째, ‘구약과 신약의 일치성은 [신구약의 백성들이] 모두 지상의 것을 추구하고 산 것이 아니라 천상의 복을 바라보며 살았다. [그러나] 구약은 지상적이고 신약은 천상적이다,’ 이러한 세대주의적 이분법은 가당치 않다는 것입니다.
이제 셋째로 구약과 신약의 일치성을 논하면서 칼빈은 ‘[신구약의 백성들이] 모두 종말론적인 삶을 살았다,’ 그런 부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지상의 삶이 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지상의 삶을 넘어서 더 나은 삶, 우리가 바라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영화로운 삶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강요』. 2.10.10.]
하나님이 그들(믿음의 조상들)에게 부과하신 삶의 조건은 계속적인 훈련이었다(quae divinitus iniuncta illis fuit vivendi conditio, assiduum erat exercitium).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10.10.
그리하여 이 땅에 믿음의 조상들은 구약이건 신약이건 많은 고난을 겪었지만은 그 고난이 단지 비참함이 아니라 훈련이었다, 이것을 칼빈은 강조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더 귀한 것을 누리게 되는 그 훈련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구약 백성들에게 부과하신 삶의 조건도 신약 시대 백성과 다름없이 “계속적인 훈련”이었다는 것입니다. 구약의 징계는 저주이고 신약의 징계는 연단이다, 이런 이분법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신구약의 모든 족장들 그리고 사도들 그리고 신자들이 겪었던 그러한 지상의 삶의 역경들, 그 천상에 이르는 역정이 모두 하나님이 돌보시는 귀한 훈련의 과정이었다고 칼빈은 강조합니다.
칼빈은 이곳에서 구약의 여러 믿음의 조상들을 언급하면서 그들이 얼마나 어려운 삶을 살았느냐,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 자체로 좌절하지 아니하고 미래의 삶의 소망을 두고 나아갔느냐, 이 부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아담도 아주 어려운 삶 가운데 있었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그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는 자리에 선 것, 그 마귀 사탄의 궤계의 유혹에 넘어갔던 부분들뿐만 아니라 자기 아들이 서로 싸워서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이러한 것(창 4:8)을 아담이 겪었다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노아도 그 어려운 연단 가운데서 믿음으로 방주를 또 만들고(창 6:22) 그 홍수를 겪고 결국은 살아남았지만, 바로 자기의 자녀들이 겪는 여러 가지의 고난이 있었다는 것입니다(창 9:24-25).
[『기독교 강요』. 2.10.11.]
아브라함도 [하나님이] 그의 믿음을 바라보고, 그가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는 복을 누렸지만은. 칼빈은 아브라함이야말로 “십만에 버금가는 사람들의 존경을 받아야 한다,” 이렇게 말하면서 그의 삶이 “신앙의 최고 규범”(optima credendi regula)이다, 이렇게 말합니다. 아브라함의 삶이 어찌하여 이러한 평가를 받았을까요? 아브라함은 그저 이 땅에서 복된 삶만 살았을까요? 칼빈은 ‘아브라함이 얼마나 많은 고생을 해야 됐는가?’ 이런 것을 아주 간절하게, 절실하게 『기독교 강요』에서 전개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고, 그리고 부모와 친구도 떠나고, 또 그들과 서로 격리되고 빼앗기는 그런 삶을 살았다[고 합니다]. 또 [하나님이] 지시하는 가나안에 갔을 때 그곳이 부요하지 않고 가뭄이 들어서 또 그곳에서 다시 옮겨가게 되고(창 12:10), 또 옮겨간 곳에서 아내가 몸을 팔아야 할 만큼 그 지경에 이르는 그러한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고 합니다](창 12:11-20; 20:1-18). 이런 가운데서 그나마 혈육붙이로 남아 있었던 롯과도 또 서로 결별하고 만다[고 합니다](창 13:5-9). 이 가운데 노년에 태가 끊긴 듯했지만(창 15:2) 이삭이 태어났는데(창 21:2), 그 이삭도 또 제물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그 아들을 단에 눕히고 칼을 내리쳐야 하는 슬픔을 겪게 되었다[고 합니다](창 22:1-2).
아브라함은 전 생애의 역정에 있어서(toto vitae curriculo) 내침을 당하고 고통을 겪었으니, 만약 누군가 삶의 참상의 본을(exemplar calamitosae vitae) 화판에 그리려고 한다면 아브라함보다 더 적합한 경우를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10.11.
이러한 것을 이야기하면서 ‘아브라함은 전 생애의 역정에 있어서 내침을 당하고 고통을 겪었으니, 그 누구의 삶보다 참상을 잘 표현하려면, 인생의 비참함을 잘 표현하려면, 고통을 잘 표현하려면, 아브라함이 최고의 본이 된다’라고 칼빈은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기독교 강요』. 2.10.12.]
이삭에 대해서는 “최소한의 인생의 달콤함(suavitatis)조차 거의 맛보지 못”한 것이 그의 삶이었다고 또한 칼빈은 이야기합니다. 기근이 찾아왔고(창 26:1) 그 역시 또한 여러 가정의 문제로, 또 며느리들의 문제로(창 26:34-35), 아들 간의 분쟁으로, 야곱과 에서의 끝없는 분쟁(창 27:41-45; 창 28:1, 5), 이런 것으로 큰 어려움을 겪었다[고 합니다].
야곱은 극단적인 불행을 보여 주는 가장 두드러진 본이 된다(vero Iacob nihil quam extremae infelicitatis insigne est exemplar).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10.12.
야곱은 어떤가, 칼빈은 “극단적인 불행을 보여 주는 [가장] 두드러진 본”이 또한 야곱이다라고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형의 위협이 계속되었고, 태어난 곳에서 도망치듯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갔는데(창 27:41-45), 그곳에서 끊임없는 수고와 염려와, 또한 그곳에서 아주 애매한 지경에 처하게 되었고(창 29:15-20), 아내를 얻는 것도 여러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는 것입니다(창 29:23-27). 그래서 급기야 얍복강을 건너고 그곳에서 기도하며 몸이 위골이 될 정도로 하나님께 매여서 기도했지만, 또 그를 기다리는 에서를 두려워할 수밖에 없게 되었고(창 32:7, 11; 33:1-4),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과정에서 또한 라헬을 잃어버리게 됩니다(창 35:16-20). 그리고 라헬을 잃을 뿐만 아니라 요셉이 짐승에 물려 몸이 찢겨 죽었다는 소식(창 37:31-32), 물론 이것은 잘못된 소식이지만, 그 소식을 야곱은 오랫동안 듣고 살게 됩니다. 그리고 그 딸이 강간당하고(창 34:2, 5), 그리고 그 아들들이 그 종족을 무자비하게 살육하고 또 하나님의 할례를, 거룩한 할례를 이용하고(창 34:25), 이러한 것을 야곱이 다 겪었다는 것입니다. 그의 장자인 르우벤의 극악한 범죄가 있었고 아내가 더럽혀지고(창 35:22) 근친상간이 일어나고(창 38:18), 그리하여 바로 앞에 선 야곱은 자신의 지상의 생이 짧았지만 험악했다(breves ac malos)고 증언하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지 않습니까?(창 47:9)
이들을 통하여 우리는 무엇을 알게 됩니까? 그들이 좌절했음을 칼빈이 말하려고 이렇게 그들의 생을 조명했겠습니까? 그들은 지상의 삶에 안주하지 않고, 지상의 고통과 어려움과 말할 수 없는 막막함과 욱여쌈이 있지만, 그 땅의 것들(res terrenae)에 소망을 두지 않고 하늘의 것들, 영원한 것에 소망을 두고 살았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강요』. 2.10.13.]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이방에 있으나, 이방의 장막에 거하였으나,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 이 땅은 “외국인과 나그네”(hospites et inquilini)의 삶이지만 ‘본향’(patria)이 있다는 것을 바라보고 살았다(히 11:8-10, 13-16), 이것을 칼빈은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땅의 삶은 “나그네의 삶”(peregrinatio)인데 이 땅의 삶의 복락을 마치 마지막의 것인 양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이 땅의 삶 너머에는 본향의 삶이 있다는 것을 바라보는 그러한 종말론적인 삶을 구약 백성이든 신약 백성이든 믿음의 조상들이 살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지시하는 땅으로 가라[고] 했지만(창 12:1) 아브라함의 지상의 생은 어떠했습니까? 가나안 땅의 무덤 외에는 “발붙일 만한 땅”(행 7:5)도 얻지 못했다고 스데반은 설교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지상의 삶은 어떻게 보면 비참한 삶이었습니다. 그가 미래의 복을 바라보지 않았다면, 오직 믿어서 하나님께[서] 의로 여기는 그 은혜로 자녀 됨을 바라보지 않았다면, 어찌 아브라함의 생을 우리가 흠모할 수 있겠습니까.
[『기독교 강요』. 2.10.14.]
야곱이 “장자의 권리”(primogenitum)를 얻었습니다. 그러나 지상의 삶만 본다면, 아비 이삭의 축복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오히려 이삭의 축복이 없이 차자로 살았다면 에서를 두려워할 것도 없고, 도망칠 일도 없고, 야곱의 삶이 더 수월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야곱은 벧엘에서 여호와를 다시 만나고 그리고 다시 그가 돌아왔을 때, 숙곳에 그러한 어려움이 있었지만 ‘벧엘로 올라가자!’ 다시 벧엘로 올라가서 하나님을 바라보는 삶을 살지 않았습니까?
또한 다윗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지상의 삶의 역경에 있어서 다윗의 삶은 또 얼마나 우리에게 큰 모범이 되는 것입니까? 그는 끝없이 쫓김을 당했습니다. 칼과 창이 항상 그의 가까이에 있었습니다. 시편 116편 15절에 다윗은 “[여호와의] 경건한 자들의 죽음은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귀중한 것”이다[라고 했는데], 죽음이 “최후 경계와 목표”(ultima linea et meta)라면 이렇게 노래했겠습니까? 죽음이 단지 끝이라면 결코 다윗은 이렇게 노래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죽음이 여호와 보시기에 귀중한 것임은 죽음 이후에 영생의 복락이 있다는 것이죠.
[『기독교 강요』. 2.10.15.]
영원한 언약의 복, 그 신령한 복이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지는 자녀 됨의 영광과 그 빛난 광채가 있기 때문에, 다윗이 그 비밀들을 바라보고 노래하였다는 것입니다. 시편에 보면 다윗은 “나는 주와 함께 있는 나그네”(시 39:12)라고 노래했고 ‘각 사람의 삶은 그림자 같다’(시 39:6)라고도 노래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그치지 않고 다윗은 ‘나의 소망은 주께 있습니다. 내가 무엇을 더 바라리요’(시 39:7)라고 또한 노래하는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여호와의 인자하심은 자기를 경외하는 자에게 영혼부터 영원까지” 이른다고 했으며(시 103:17) “주는 한결같으시고 주의 연대는 무궁하”다고 또한 노래했습니다(시 102:27).
‘여호와가 주시는 나의 구원은 영원히 있고, 여호와가 베푸시는 나의 공의는 영원히 폐하여지지 아니한다’고 이사야 선지자가 이 말씀을 전했는데(사 51:6), 이 이사야 선지자의 이러한 증언도 다윗의 시편과 동일한 궤에 있습니다. 이 지상의 삶이 영원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시는 의와 구원이 영원하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강요』. 2.10.16.]
의인들은 하나님이 형통하게 할 것이요, 그의 영혼을 보존할 것이요(시 97:10), 정직한 자들은 기쁨을 누릴 것이요(시 97:11), 그의 뿔이 영광 중에 들릴 것이요(시 112:9), 정직한 자들은 주 앞에서 살 것이고(시 140:13), 의인은 영원히 기억될 것이고(시 112:6), 하나님이 그 영혼을 속량할 것일 것이다(시 34:22), 이러한 다윗의 시편들이 선지자들의 예언과 맞닿아 있다는 것입니다. 이 지상의 삶은 끝이 아닙니다. 선지자들은 멸망을 선포합니다. 지상의 국가에, 지상의 민족에 그 어려움을 선포합니다.
[『기독교 강요』. 2.10.17.]
그러나 선지자들은 그것에 머물지 아니하고, 영생의 복, 시온의 백성에게 이를 신령한 복을 또한 예언하지 않습니까?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보고 주의 형상에 만족하고(시 17:15), 하나님의 집에 푸른 감람나무와 같고(시 52:8), 종려나무와 같고 레바논의 백향목과 같은 그런 의인의 삶을 우리가 살게 되는 건데(시 92:12), 그것은 우리가 의로워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혜가 우리를 의롭다 삼아서 “주께서 의인의 죽는 것을 영원히 허락하지 아니하시리로다”(적용. 시 55:22), 이렇게 또한 노래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빛이 일기 시작하면 그 빛으로 이제 그의 백성이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그 부활의 비밀이 이미 시편에서 노래되고 있는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시 49:14). 현세의 삶이 끝이라면 어찌 이러한 다윗의 노래가 있겠습니까?
[『기독교 강요』. 2.10.18.]
“[그의] 노염은 잠깐이요 [그의] 은총은 평생”이라 했습니다(시 30:5).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시는 자비가 영원하다는 것입니다(사 54:7-8). 그래서 [그의] 경건하던 자들의 죽음이 하나님 보시기에 귀한 것이고(시 116:15), 죄인들의 죽음은 악한 것이라고 하는 것(시 34:21)은 바로 하나님이 그 의인들의 죽음조차 그 죽음이 끝으로, 멸망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영생의 과정에서의 죽음이므로, 그 죽음을 귀하게 보신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강요』. 2.10.19-20.]
이런 부분에 대해서 욥도 또한 노래한 것입니다. ‘내가 대속자가 살아 계심을 보리니 이제 내 육체 가운데 구세주 하나님을 보리라. 이 소망이 내 가슴에 남으리라’(적용. 욥 19:25-27) 하고 고난 중에 욥은 또한 노래했습니다. 미래의 불멸(immortalitas futura)을 바라본 것입니다. 이 지상의 삶이 마지막에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호와가 우리에게 베푸시는 구원의 “자비의 언약”(foedus misericordiae)이 점점 점점 밝아져서, 끝내는 “의의 태양”(sol iustitiae)이신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충만해지는 것(말 4:2)을 욥 또한 바라본 것입니다.
[『기독교 강요』. 2.10.21-22.]
선지자 에스겔은 마른 뼈에 생기가 돌고, 그리고 가죽과 근육과 힘줄과 그리고 여호와의 군대를 이루는 그 환상 가운데서 궁극적인 하나님의 생명의 복, 생기를 또한 바라본 것입니다(겔 37:1-14).
이사야 선지자는 “새 하늘과 새 땅이 내(여호와) 앞에 항상” 있다고 이사야 마지막 장 66장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다니엘 선지자는 “네 백성 중 책에 기록된 모든 자가 구원을 받을 것”이요, “많은 사람이 깨어나 영생을” 얻을 것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단 12:1-2).
[『기독교 강요』. 2.10.23.]
구약의 조상들이 그리스도를 그들 언약의 보증으로 여겼다…그들이 그 자신에게 미래의 모든 복에 대한 확신을 두었다(patres scilicet Christum in foederis sui pignus habuisse, atque in ipso omnem benedictionis fiduciam reposuisse).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10.23.
구약의 조상들도 그리스도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리스도의 미래의 복에 대한 확신을 두었습니다. 구약의 백성도 그리스도를 실체로 [둔] 언약에 작정된 약속을 소망하였습니다. 신구약은 [우리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함께 앉고, 그리스도의 것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서 예수 그리스도와 은혜를 누리는 자가 구약의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후손이라는 것입니다. 곧 은혜의 상속자들(heres)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기업을 얻는 것은 자질을 얻는 것이 아니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다 이루신 의를 우리 것 삼게 된다는 것입니다.
[결론]
이제 이 부분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첫째,] 하나님이 구약의 조상들에게 부과하신 삶의 조건은 계속적인 훈련이었습니다.
두 번째,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 등 구약의 조상들은 이 땅의 나그네의 삶에[서] 극심한 고난을 겪는 가운데서도 미래의 삶을 바라보고 죽음을 최후의 경계와 목표로 생각하지 않고, 한결같이 영원한 하나님의 자비를 간구하였다는 것입니다.
셋째로 구약의 조상들도 대속자 그리스도를 부활과 영생의 불멸에 이르는 언약의 보증으로 여겼고,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나라에서 영원히 누리게 될 복을 확신했다는 것입니다.
넷째, 하나님의 자비의 언약은 그 실체가 그리스도이심에 있어서 신구약이 다름이 없으나, 점차 그 의의 태양이신 그리스도가 점차 점차 밝히 드러나서, 신약 시대 때는 온전히 충만하게 비추게 된다는, 실체는 같으나 경륜이 다양하다는 이것을 칼빈은 굳게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76강 결론
하나님이 구약의 조상들에게 부과하신 삶의 조건은 계속적인 훈련이었습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등 구약의 조상들은 이 땅의 나그네 삶의 극심한 고난을 겪는 가운데서도 미래의 삶의 복을 바라보았고 죽음을 최후의 경계와 목표로 여기지 않고 영원히 한결같은 하나님의 자비를 간구하였습니다.
구약의 조상들도 대속자 그리스도를 부활과 영생의 불멸에 이르는 언약의 보증으로 여겼고 그리스도 안에서와 그의 나라에서 영원히 누리게 될 모든 복을 확신했습니다.
하나님의 자비의 언약은 타락 이후 구원의 첫 약속을 아담에게 주신 후(창 3:15) 그 빛이 점차 밝아져 의의 태양이신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온 땅에 충만히 비춥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