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강요』 2권 7장과 8장에서 율법을 다루고 9장에서 복음을 다룬 후 이제 10장과 11장에서는 구약과 신약의 관계에 대한 논의를 전개합니다. 10장에서는 구약과 신약의 일치성을 논하고, 11장에서는 구약과 신약의 차이성을 논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미 보았듯이 복음은 율법을 폐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약속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복음과 율법이 이원론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율법의 실체도 그리스도시요, 복음의 실체도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에 그러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구약 시대 때 믿음의 조상들과 맺은 언약(foedus)은 그 실체가 그리스도십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그리스도의 때 볼 것을 보고 즐거워하였다’(요 8:56)라고 성경은 전하고 ‘모세가 그리스도에 대하여 증언하였다’(요 5:46)라고 또한 성경은 전합니다. 이 두 말씀은 모두 예수님께서 친히 하신 말씀입니다. 구약 시대 때도 교회가 있습니다. 그 교회 역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연합체입니다. 다만 그들은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믿었습니다.
[『기독교 강요』. 2.10.1.]
구약 시대 백성들에게 있어서의 구원의 중보자와 신약 시대 백성에 있어서의 구원의 중보자가 서로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구약 시대 백성은 아브라함을 믿고 이삭을 믿고 야곱을 믿고 모세를 믿어서 구원에 이른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모세, 다윗, 구약의 믿음의 조상들도 모두 그리스도를 믿었습니다.
다만 새 언약의 구속사적 경륜에 있어서의 차이는 있지만 구약과 신약은 실체에 있어서 서로 차이가 없습니다. 또한 율법과 복음 역시 실체에 있어서 차이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대주의적 관점에 빠져서 칼빈 시대에 세르베투스나 재세례파들은 율법 폐지를 주장하였는데, 칼빈은 단호하게 이를 거부합니다.
[『기독교 강요』. 2.10.2.]
그리고 [칼빈은] 다음과 같은 분명한 언급을 합니다.
모든 족장과 맺은 언약은 실체 그리고 그 자체에 있어서 우리와 맺은 언약과 아무것도 다르지 않고 전적으로 하나이며 동일하다. 그렇지만 경륜에 있어서는 다르다(Patrum omnium foedus adeo substantia et re ipsa nihil a nostro differt, ut unum prorsus atque idem sit. Administratio tamen variat).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10.2.
“모든 족장과 맺은 언약은 실체 그리고 그 자체에 있어서 우리와 맺은 언약과 아무것도 다르지 않고 전적으로 하나이며 동일하다. 그렇지만 경륜에 있어서는 다르다”라고 칼빈은 말합니다. 요약하자면 신구약은 실체에 있어서는 하나이고 동일하나, 경륜에 있어서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 동일함에 대하여 칼빈은 특별히 세 가지에 주목합니다. 첫 번째, 구약 백성이나 신약 백성 할 것 없이 모두 그들의 소망은 단지 지상의 것에 있지 아니하고 불멸하는 것에 대한, 영생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영생이 뭡니까? 곧 하나님의 자녀 됨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구약 시대 때는 지상적이고 신약 시대 때는 천상적이라거나, 구약 시대 때는 육체적이고 신약 시대 때는 영적이라거나, 이러한 이분법적 사고는 다 세대주의의 산물인 것입니다. 칼빈은 이를 단호하게 거부합니다. 구약이든 신약이든 “불멸에 대한 소망”(spes immortalitatis), 영생에 대한 소망 곧 하나님의 자녀 삼으심(adoptio)의 은혜를 믿음으로 얻고자 하는 그 점에서 동일했다는 것입니다.
둘째, 구약 백성이나 신약 백성이나 할 것 없이 모두 하나님의 자비(misericordia Dei)에 의해서 구원을 받는 그 은혜 언약에 놓여 있었다는 것입니다. 구약 시대 때는 공로주의고 신약 시대 때는 오직 믿음으로 우리가 구원을 얻는 은혜, 복음의 시대다, 이렇게 이분법적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믿으니 의로 여기시고, 아브라함이 믿으니 살리시고, 구약의 모든 조상들도 믿어서 구원에 이른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 믿어 구원에 이르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자비에 따른 것이지 사람의 공로에 따른 것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 구약과 신약의 일치점을 이야기하면서 칼빈은 그때나 이제나 언제나 유일하신 중보자(mediator)는 그리스도셨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오직 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제2위 하나님, 그 중보를 통하여서 구약 백성도 신약 백성도 하나님께 나아가고 하나님의 약속에 동참하는 자들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세 가지를 크게 살펴본 후, 칼빈은 이제 구체적으로 세목, 세목, 이 부분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기독교 강요』. 2.10.3.]
첫째로 칼빈이 말한 바와 같이, 구약 백성도 신약 백성과 다름없이 영생을 소망하였다는 점을 칼빈은 길게 논하고 있습니다. 구약 시대 때 선지자들이 이미 복음에 대하여 말하였는데, 그 복음에 대하여 말한 것이, 이제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셔서 사람의 아들이 되셔서 성취하신 그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므로, 로마서에서는 구약 시대의 선지자들도 하나님의 아들,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전하였다(롬 1:2-3)고 그렇게 칼빈은 이야기합니다. 율법과 선지자들은 복음 자체를 통하여 가르쳐지는 믿음에 대한 증인들이 되는 것이지(롬 3:21), 율법과 선지자들이 다른 것을 전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구약 시대 믿음의 조상들도 선지자들을 통하여서 또 경서(經書)의 율법을 통하여서 ‘불멸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들도 복음을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침을 받는 그 하나님의 은혜(엡 1:13)를 소망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들도 믿어서 하나님을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그 소망을 하늘에 쌓고, 그리고 그 복음 진리를 들었다는 것입니다(골 1:4-5). 그리고 복음으로 구원에 이르고, 복음으로 약속에 참여하는 자가 되는 그 은혜, 영적인 하나님의 신령한 은혜를 구약 백성들도 바라보았다는 것입니다. 구약 백성은 단지 육체적 돌봄을 추구한 것이 아니라 “영혼의 돌봄”(curaanimae)을 본질적인 복으로 누리기를 원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에 대한 약속이 율법에 이미 계시되어 있고, 다만 그 성취가 신약 시대 때 있었지만, 구약 시대 백성들도 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지는 영생의 복, 천상의 복, 그 미래를 소망하며 살아갔다고 칼빈은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기독교 강요』. 2.10.4.]
구약은 하나님의 값없는 자비를 근거로 세워졌으며 그리스도의 중재에 의해 확정되었다([testamentumvetus] et gratuita Dei misericordia constitisse, et Christi intercessione fuisse confirmatum).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10.4.
구약 역시 하나님의 값없는 자비를 근거로 하여 세워졌습니다. 구약 역시 그리스도의 중재에 의해서 은혜가 확정되었다는 것입니다. 신약 시대에 복음적 설교가 있다면, 구약 시대 때도 오직 믿어서 구원에 이르는 그 복음적 설교가 있었다는 것이죠. 하나님의 부성적 관대함(paterna Dei indulgentia)에 의지해서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와 인애로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그 복, 그 복이 그리스도 안에서 요약되고, 그리스도 안에서 그 실체가 드러나고, 그리스도가 그 모든 의를 이루실 텐데, 그것을 구약 백성들은 믿음으로 바라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경륜에 있어서 아직 희미하지만 실체에 있어서는 구약 백성들도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는 그러한 복된 소식을 누리고 있었다고 칼빈은 말하는 것입니다.
구약 백성들도 믿음을 선물로 받았다는 것이죠. ‘신약 시대만 그런 것이 아니라 신구약 모두 믿음은 선물로 주어진 것이다. 그리하여 아브라함이 예수님의 때를 바라보고 즐거워하였다.’ 그렇게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이고(요 8:56), 히브리서 13장 8절에서는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동일하시”다[라고 말씀합니다]. 이 동일하심은 단지 예수 그리스도의 어떠하심과 존재에만 관계되는 것이 아니라 ‘그가 하시는 능력(virtus)이 항구적이다. 예수님은 언제나 유일하신 구원주시다 구약이나 신약이나 그러하다’는 것을 드러낸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구원이 옛날에는 아브라함과 족장들에게 약속으로 나타났고 이 구약의 믿음의 조상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영생(vita aeterna)을 바라보고 그것을 소망하며 살았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강요』. 2.10.5.]
그러므로 구약의 모든 언약의 은혜와 구약의 여러 의식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것입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믿음의 표징들로서 구약의 반석에[서] 물이 솟고 그리고 만나[와] 메추라기가 주어지고, 또 여러 일들이, 기적들이 더욱 많이 지상의 것들로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구약 시대는 지상의 것들이 실체이고 신약 시대 때는 천상의 것들이 실체여서 그런 것이 아니라, 실체는 예수 그리스도로서 동일하나 다만 그것을 드러내시는 경륜, 또 그들에게 베푸시는 은혜의 경륜, (경륜은 하나님의 지배질서를 뜻합니다.) 실체는 같으나 그때그때 하나님께서 맞추어서 베푸시는 그 질서가 다를 뿐이라고 칼빈은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구약 시대 백성이 홍해를 건널 때에 그 물과, 또 광야를 이스라엘 백성이 40년 지나갈 때 그때 내리던 만나와 메추라기, 이런 것은 신약 시대로 말하면 세례의 물과 성찬에 있어서의 떡과 잔, 이런 것을 실체적으로 예표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 실체가 바로 그리스도가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고린도전서 10장 3절과 4절, “다 같은 신령한 음식을 먹”고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다[라고 말씀합니다]. 신령한 음식과 신령한 음료가 누구겠습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아닙니까? 그래서 다 같은 그 양식과 음료로 우리가 구원을 얻었다라고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기독교 강요』. 2.10.6.]
구약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요 6:49) “내 살을 먹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적용. 요 6:54)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는데 이것은 만나가 그릇된 것이 아니라 만나는 예표이고 그 만나를 통한 실체가 그리스도이심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내시는 것입니다. “영혼의 참된 양식”(verus animae cibus)이 예수 그리스도시라는 것입니다. 육체를 배 불리는 만나와 메추라기, 육체의 갈함을 채우는 그 물로는 실체의 영생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이죠. 구약 백성들은 그저 먹고 마시는 만나, 메추라기, 또 지상에 물로만 소망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더 한층 깊은 비밀’(mysterium sublimius) 속에 하늘 양식을 바라보고, 하늘 음료를 바라보고, 신령한 양식과 신령한 음료, 불멸의 양식, 예수 그리스도의 영생을 바라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영적인 불멸성 그리고 영적인 거듭남, 그 소생은 구약과 신약이 다를 바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다만 구약 시대 때는 경륜에 있어서의 차이가 있을 뿐 실체에 있어서는 동일한 비밀, 동일한 영생, 동일한 은혜를 간구하고 바라보았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강요』. 2.10.7.]
영원한 하늘 생명에 대한 약속을 신약과 구약 백성들이 함께 공유하였다(commune)는 것입니다. 율법과 선지자들로부터 증언을 받은 것이 복음입니다. 구약의 모든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예수 그리스도는 “항상 있는” “썩지 아니할 씨”(벧전 1:23)이십니다. 그 생명, 그 말씀, 그 빛, 이 빛을 구약 백성들도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그들도 하나님과 하나되어 하나님의 자녀로 사는 은혜를 누리고자 했습니다. 아담이나 아벨이나 노아나 아브라함, 다른 족장들도 말씀의 조명 가운데 붙들려 있었다고 칼빈은 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영원한 복락을, “영생의 복”(bonum vitae aeternae)을 그리고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견실한, 하나님과의 동참(solida Dei participatio)을 그들은 소망하였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강요』. 2.10.8.]
하나님은 언약을 맺을 때 “나는…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될” 거라고 말씀했습니다(레 26:12). 이 백성 됨이 영생입니다. 구약의 백성 됨은 신약의 자녀 됨이요, 이 자녀 됨이 영생의 실체라면, 구약의 백성 됨은 그 영생을 예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시므로 생명이신 하나님을 믿는 자마다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고, 이제 영원한 자녀로서의 삶을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구원은 여호와께로부터 나오고 그 생명의 실체, 구원의 실체는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구약 시대 백성은 아직까지 몸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영접하고, 보고, 자세히 보고, 만지고, 듣고 신앙생활을 하지 못했지만, 그러나 그의 오심을 바라보는, 그 동일한 메시아의 실체를 소망하는 영생의 신학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강요』. 2.10.9.]
그러므로 구약 시대 백성들도 지상의 복에 안주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신과 후손의 아버지가 되신다는 하나님의 인자, 영생의 복을 추구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선하심의 위대하심과 부요하심을 바라보고,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출 3:6)인 것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생을 주시는 긍휼과 자비와 인애의 하나님이심을 그들은 믿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성도가 여호와의 수중에 있고, 그리고 여호와가 그 손으로 이끄시는 구원의 은총으로 영생을 누리게 되는 그 천상의 복, 신령한 복을 구약 시대 백성 역시 소망하였다고 칼빈은 강조하고 있습니다.
[결론]
이 부분을 정리합니다.
첫째, 신구약 백성은 동일한 중보자의 은혜로 동일한 연합체를 이루고 동일한 율법과 동일한 교리의 고리로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다는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신구약 백성과 맺은 언약은 실체 그리고 그 자체에 있어서는 동일합니다. 다만 경륜에 있어서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셋째, 구약 백성도 하나님의 자녀 삼으심에 대한 영생의 불멸을 소망하며 그리스도의 중재로 값없이 베풀어지는 하나님의 자비를 구원의 요체이자 비밀로 삼았습니다.
넷째, 구약 백성도 하나님의 선하심에 위대함과 부요함이 단지 현세의 복, 현재의 복에 그치지 않고 당대와 후손들에게 대대에 미치고, 사후에 영원토록 이어짐을 소망하며 살았다는 것입니다.
75강 결론
신구약 백성은 동일한 중보자의 은혜로 동일한 연합체를 이루며 동일한 율법과 동일한 교리의 고리로 하나님과 언약을 맺습니다.
하나님이 신구약 백성과 맺은 언약은 실체 그리고 그 자체에 있어서는 하나이며 동일하나 경륜에 있어서는 다릅니다.
구약 백성도 하나님의 자녀 삼으심에 대한 영생의 불멸을 소망하며 그리스도의 중재로 값없이 베풀어지는 하나님의 자비를 구원의 요체이자 비밀로 삼습니다.
구약 백성도 하나님의 선하심의 위대함과 부요함이 현재의 복에 그치지 않고 당대와 후손들에게 대대로 미치며 사후에 이어짐을 소망하였습니다.
75강 | 2.10.1-9 (2권 327-340페이지)
신구약의 실체는 그리스도를 믿어
영생을 얻음에 있어 동일
『기독교 강요』 2권 7장과 8장에서 율법을 다루고 9장에서 복음을 다룬 후 이제 10장과 11장에서는 구약과 신약의 관계에 대한 논의를 전개합니다. 10장에서는 구약과 신약의 일치성을 논하고, 11장에서는 구약과 신약의 차이성을 논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미 보았듯이 복음은 율법을 폐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약속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복음과 율법이 이원론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율법의 실체도 그리스도시요, 복음의 실체도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에 그러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구약 시대 때 믿음의 조상들과 맺은 언약(foedus)은 그 실체가 그리스도십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그리스도의 때 볼 것을 보고 즐거워하였다’(요 8:56)라고 성경은 전하고 ‘모세가 그리스도에 대하여 증언하였다’(요 5:46)라고 또한 성경은 전합니다. 이 두 말씀은 모두 예수님께서 친히 하신 말씀입니다. 구약 시대 때도 교회가 있습니다. 그 교회 역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연합체입니다. 다만 그들은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믿었습니다.
[『기독교 강요』. 2.10.1.]
구약 시대 백성들에게 있어서의 구원의 중보자와 신약 시대 백성에 있어서의 구원의 중보자가 서로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구약 시대 백성은 아브라함을 믿고 이삭을 믿고 야곱을 믿고 모세를 믿어서 구원에 이른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모세, 다윗, 구약의 믿음의 조상들도 모두 그리스도를 믿었습니다.
다만 새 언약의 구속사적 경륜에 있어서의 차이는 있지만 구약과 신약은 실체에 있어서 서로 차이가 없습니다. 또한 율법과 복음 역시 실체에 있어서 차이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대주의적 관점에 빠져서 칼빈 시대에 세르베투스나 재세례파들은 율법 폐지를 주장하였는데, 칼빈은 단호하게 이를 거부합니다.
[『기독교 강요』. 2.10.2.]
그리고 [칼빈은] 다음과 같은 분명한 언급을 합니다.
모든 족장과 맺은 언약은 실체 그리고 그 자체에 있어서 우리와 맺은 언약과 아무것도 다르지 않고 전적으로 하나이며 동일하다. 그렇지만 경륜에 있어서는 다르다(Patrum omnium foedus adeo substantia et re ipsa nihil a nostro differt, ut unum prorsus atque idem sit. Administratio tamen variat).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10.2.
“모든 족장과 맺은 언약은 실체 그리고 그 자체에 있어서 우리와 맺은 언약과 아무것도 다르지 않고 전적으로 하나이며 동일하다. 그렇지만 경륜에 있어서는 다르다”라고 칼빈은 말합니다. 요약하자면 신구약은 실체에 있어서는 하나이고 동일하나, 경륜에 있어서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 동일함에 대하여 칼빈은 특별히 세 가지에 주목합니다. 첫 번째, 구약 백성이나 신약 백성 할 것 없이 모두 그들의 소망은 단지 지상의 것에 있지 아니하고 불멸하는 것에 대한, 영생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영생이 뭡니까? 곧 하나님의 자녀 됨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구약 시대 때는 지상적이고 신약 시대 때는 천상적이라거나, 구약 시대 때는 육체적이고 신약 시대 때는 영적이라거나, 이러한 이분법적 사고는 다 세대주의의 산물인 것입니다. 칼빈은 이를 단호하게 거부합니다. 구약이든 신약이든 “불멸에 대한 소망”(spes immortalitatis), 영생에 대한 소망 곧 하나님의 자녀 삼으심(adoptio)의 은혜를 믿음으로 얻고자 하는 그 점에서 동일했다는 것입니다.
둘째, 구약 백성이나 신약 백성이나 할 것 없이 모두 하나님의 자비(misericordia Dei)에 의해서 구원을 받는 그 은혜 언약에 놓여 있었다는 것입니다. 구약 시대 때는 공로주의고 신약 시대 때는 오직 믿음으로 우리가 구원을 얻는 은혜, 복음의 시대다, 이렇게 이분법적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믿으니 의로 여기시고, 아브라함이 믿으니 살리시고, 구약의 모든 조상들도 믿어서 구원에 이른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 믿어 구원에 이르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자비에 따른 것이지 사람의 공로에 따른 것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 구약과 신약의 일치점을 이야기하면서 칼빈은 그때나 이제나 언제나 유일하신 중보자(mediator)는 그리스도셨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오직 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제2위 하나님, 그 중보를 통하여서 구약 백성도 신약 백성도 하나님께 나아가고 하나님의 약속에 동참하는 자들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세 가지를 크게 살펴본 후, 칼빈은 이제 구체적으로 세목, 세목, 이 부분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기독교 강요』. 2.10.3.]
첫째로 칼빈이 말한 바와 같이, 구약 백성도 신약 백성과 다름없이 영생을 소망하였다는 점을 칼빈은 길게 논하고 있습니다. 구약 시대 때 선지자들이 이미 복음에 대하여 말하였는데, 그 복음에 대하여 말한 것이, 이제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셔서 사람의 아들이 되셔서 성취하신 그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므로, 로마서에서는 구약 시대의 선지자들도 하나님의 아들,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전하였다(롬 1:2-3)고 그렇게 칼빈은 이야기합니다. 율법과 선지자들은 복음 자체를 통하여 가르쳐지는 믿음에 대한 증인들이 되는 것이지(롬 3:21), 율법과 선지자들이 다른 것을 전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구약 시대 믿음의 조상들도 선지자들을 통하여서 또 경서(經書)의 율법을 통하여서 ‘불멸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들도 복음을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침을 받는 그 하나님의 은혜(엡 1:13)를 소망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들도 믿어서 하나님을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그 소망을 하늘에 쌓고, 그리고 그 복음 진리를 들었다는 것입니다(골 1:4-5). 그리고 복음으로 구원에 이르고, 복음으로 약속에 참여하는 자가 되는 그 은혜, 영적인 하나님의 신령한 은혜를 구약 백성들도 바라보았다는 것입니다. 구약 백성은 단지 육체적 돌봄을 추구한 것이 아니라 “영혼의 돌봄”(cura animae)을 본질적인 복으로 누리기를 원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에 대한 약속이 율법에 이미 계시되어 있고, 다만 그 성취가 신약 시대 때 있었지만, 구약 시대 백성들도 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지는 영생의 복, 천상의 복, 그 미래를 소망하며 살아갔다고 칼빈은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기독교 강요』. 2.10.4.]
구약은 하나님의 값없는 자비를 근거로 세워졌으며 그리스도의 중재에 의해 확정되었다([testamentum vetus] et gratuita Dei misericordia constitisse, et Christi intercessione fuisse confirmatum).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10.4.
구약 역시 하나님의 값없는 자비를 근거로 하여 세워졌습니다. 구약 역시 그리스도의 중재에 의해서 은혜가 확정되었다는 것입니다. 신약 시대에 복음적 설교가 있다면, 구약 시대 때도 오직 믿어서 구원에 이르는 그 복음적 설교가 있었다는 것이죠. 하나님의 부성적 관대함(paterna Dei indulgentia)에 의지해서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와 인애로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그 복, 그 복이 그리스도 안에서 요약되고, 그리스도 안에서 그 실체가 드러나고, 그리스도가 그 모든 의를 이루실 텐데, 그것을 구약 백성들은 믿음으로 바라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경륜에 있어서 아직 희미하지만 실체에 있어서는 구약 백성들도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는 그러한 복된 소식을 누리고 있었다고 칼빈은 말하는 것입니다.
구약 백성들도 믿음을 선물로 받았다는 것이죠. ‘신약 시대만 그런 것이 아니라 신구약 모두 믿음은 선물로 주어진 것이다. 그리하여 아브라함이 예수님의 때를 바라보고 즐거워하였다.’ 그렇게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이고(요 8:56), 히브리서 13장 8절에서는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동일하시”다[라고 말씀합니다]. 이 동일하심은 단지 예수 그리스도의 어떠하심과 존재에만 관계되는 것이 아니라 ‘그가 하시는 능력(virtus)이 항구적이다. 예수님은 언제나 유일하신 구원주시다 구약이나 신약이나 그러하다’는 것을 드러낸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구원이 옛날에는 아브라함과 족장들에게 약속으로 나타났고 이 구약의 믿음의 조상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영생(vita aeterna)을 바라보고 그것을 소망하며 살았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강요』. 2.10.5.]
그러므로 구약의 모든 언약의 은혜와 구약의 여러 의식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것입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믿음의 표징들로서 구약의 반석에[서] 물이 솟고 그리고 만나[와] 메추라기가 주어지고, 또 여러 일들이, 기적들이 더욱 많이 지상의 것들로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구약 시대는 지상의 것들이 실체이고 신약 시대 때는 천상의 것들이 실체여서 그런 것이 아니라, 실체는 예수 그리스도로서 동일하나 다만 그것을 드러내시는 경륜, 또 그들에게 베푸시는 은혜의 경륜, (경륜은 하나님의 지배질서를 뜻합니다.) 실체는 같으나 그때그때 하나님께서 맞추어서 베푸시는 그 질서가 다를 뿐이라고 칼빈은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구약 시대 백성이 홍해를 건널 때에 그 물과, 또 광야를 이스라엘 백성이 40년 지나갈 때 그때 내리던 만나와 메추라기, 이런 것은 신약 시대로 말하면 세례의 물과 성찬에 있어서의 떡과 잔, 이런 것을 실체적으로 예표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 실체가 바로 그리스도가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고린도전서 10장 3절과 4절, “다 같은 신령한 음식을 먹”고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다[라고 말씀합니다]. 신령한 음식과 신령한 음료가 누구겠습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아닙니까? 그래서 다 같은 그 양식과 음료로 우리가 구원을 얻었다라고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기독교 강요』. 2.10.6.]
구약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요 6:49) “내 살을 먹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적용. 요 6:54)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는데 이것은 만나가 그릇된 것이 아니라 만나는 예표이고 그 만나를 통한 실체가 그리스도이심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내시는 것입니다. “영혼의 참된 양식”(verus animae cibus)이 예수 그리스도시라는 것입니다. 육체를 배 불리는 만나와 메추라기, 육체의 갈함을 채우는 그 물로는 실체의 영생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이죠. 구약 백성들은 그저 먹고 마시는 만나, 메추라기, 또 지상에 물로만 소망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더 한층 깊은 비밀’(mysterium sublimius) 속에 하늘 양식을 바라보고, 하늘 음료를 바라보고, 신령한 양식과 신령한 음료, 불멸의 양식, 예수 그리스도의 영생을 바라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영적인 불멸성 그리고 영적인 거듭남, 그 소생은 구약과 신약이 다를 바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다만 구약 시대 때는 경륜에 있어서의 차이가 있을 뿐 실체에 있어서는 동일한 비밀, 동일한 영생, 동일한 은혜를 간구하고 바라보았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강요』. 2.10.7.]
영원한 하늘 생명에 대한 약속을 신약과 구약 백성들이 함께 공유하였다(commune)는 것입니다. 율법과 선지자들로부터 증언을 받은 것이 복음입니다. 구약의 모든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예수 그리스도는 “항상 있는” “썩지 아니할 씨”(벧전 1:23)이십니다. 그 생명, 그 말씀, 그 빛, 이 빛을 구약 백성들도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그들도 하나님과 하나되어 하나님의 자녀로 사는 은혜를 누리고자 했습니다. 아담이나 아벨이나 노아나 아브라함, 다른 족장들도 말씀의 조명 가운데 붙들려 있었다고 칼빈은 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영원한 복락을, “영생의 복”(bonum vitae aeternae)을 그리고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견실한, 하나님과의 동참(solida Dei participatio)을 그들은 소망하였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강요』. 2.10.8.]
하나님은 언약을 맺을 때 “나는…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될” 거라고 말씀했습니다(레 26:12). 이 백성 됨이 영생입니다. 구약의 백성 됨은 신약의 자녀 됨이요, 이 자녀 됨이 영생의 실체라면, 구약의 백성 됨은 그 영생을 예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시므로 생명이신 하나님을 믿는 자마다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고, 이제 영원한 자녀로서의 삶을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구원은 여호와께로부터 나오고 그 생명의 실체, 구원의 실체는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구약 시대 백성은 아직까지 몸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영접하고, 보고, 자세히 보고, 만지고, 듣고 신앙생활을 하지 못했지만, 그러나 그의 오심을 바라보는, 그 동일한 메시아의 실체를 소망하는 영생의 신학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강요』. 2.10.9.]
그러므로 구약 시대 백성들도 지상의 복에 안주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신과 후손의 아버지가 되신다는 하나님의 인자, 영생의 복을 추구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선하심의 위대하심과 부요하심을 바라보고,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출 3:6)인 것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생을 주시는 긍휼과 자비와 인애의 하나님이심을 그들은 믿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성도가 여호와의 수중에 있고, 그리고 여호와가 그 손으로 이끄시는 구원의 은총으로 영생을 누리게 되는 그 천상의 복, 신령한 복을 구약 시대 백성 역시 소망하였다고 칼빈은 강조하고 있습니다.
[결론]
이 부분을 정리합니다.
첫째, 신구약 백성은 동일한 중보자의 은혜로 동일한 연합체를 이루고 동일한 율법과 동일한 교리의 고리로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다는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신구약 백성과 맺은 언약은 실체 그리고 그 자체에 있어서는 동일합니다. 다만 경륜에 있어서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셋째, 구약 백성도 하나님의 자녀 삼으심에 대한 영생의 불멸을 소망하며 그리스도의 중재로 값없이 베풀어지는 하나님의 자비를 구원의 요체이자 비밀로 삼았습니다.
넷째, 구약 백성도 하나님의 선하심에 위대함과 부요함이 단지 현세의 복, 현재의 복에 그치지 않고 당대와 후손들에게 대대에 미치고, 사후에 영원토록 이어짐을 소망하며 살았다는 것입니다.
75강 결론
신구약 백성은 동일한 중보자의 은혜로 동일한 연합체를 이루며 동일한 율법과 동일한 교리의 고리로 하나님과 언약을 맺습니다.
하나님이 신구약 백성과 맺은 언약은 실체 그리고 그 자체에 있어서는 하나이며 동일하나 경륜에 있어서는 다릅니다.
구약 백성도 하나님의 자녀 삼으심에 대한 영생의 불멸을 소망하며 그리스도의 중재로 값없이 베풀어지는 하나님의 자비를 구원의 요체이자 비밀로 삼습니다.
구약 백성도 하나님의 선하심의 위대함과 부요함이 현재의 복에 그치지 않고 당대와 후손들에게 대대로 미치며 사후에 이어짐을 소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