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강 [2.8.56-59] 스콜라주의자들의 ‘권고’와 ‘소죄’ 개념의 오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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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 | 2.8.56-59 (2권 309-315페이지)



스콜라주의자들의 ‘권고’와 ‘소죄’ 개념의 오류



     아우구스티누스가 이야기했듯이, 하나님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명령하는 것이 아니라 할 수 없는 것이라도 명령하셔서 친히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헤아릴 것은 나의 능력이 아니라, 그리고 율법의 경중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무엇은 행할 수 있고 무엇은 행할 수 없어서, 행할 수 있는 것은 내가 하고, 행할 수 없는 것은 하나님께 맡긴다, 이렇게 본다면 우리는 우리 자질을 헤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고 마음과 뜻과 정성과 목숨과 힘을 다한 순종을 우리에게 요구하시기 때문에 타락한 인류는 하나님의 그 어떤 계명조차도 순종할 수 없는 자리에 서게 되었습니다. 전적으로 무능하고 전적으로 부패해서, 그 비참한 오염 상태에서 아무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그 일을 뜻하지도 않고 행할 능력조차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율법을 통하여서 율법의 경중보다 하나님의 은혜를 헤아려야 되는바, 어떤 율법은 너무 어렵기 때문에 그저 이 정도만 지키면 되고, 아니면 하나님이 어떤 것은 너무 어려운 것은 그렇게 우리에게 요구하신 것이 아니라 그저 충고한 것이다, 이렇게 보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하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더 엄하게 명령하시는 것 같다면, 그 더 엄한 명령에는 더 큰 은혜가 있다는 것이죠. 이렇게 접근해야 됩니다. 

[『기독교 강요』. 2.8.56.] 

     근데 로마 가톨릭은 펠라기우스의 영향을 받아서 ‘하나님의 명령은 우리 자질의 척도다,’ 그런 개념을 아직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하여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명령하셨을 때 우리가 감당하지 못할 것 정도의 명령은 명령(praeceptio)이 아니라, 그것을 어겼다고 사망에 이르는 율법이 아니라, 단순한 충고에 불과하다, 그것을 그들은 ‘권고’(consilia)라고 불렀습니다. 그래서 특별히 ‘원수를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 ‘내 원수에게 보복하지 말고 그를 사랑하라,’ 이러한 하나님의 명령은 율법이 아니라 그저 복종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권고 정도라고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정도를 어겨서는 사망의 형벌은 없고 지옥[에] 가지도 않고, 이렇게 전개합니다. 

[『기독교 강요』. 2.8.57.] 

     그런데 사제들이나 수도원의 수사들은 또 이러한 권고를 지켜야 천국 간다는 겁니다. 이게 바로 자질주의가 아니겠습니까? 자질을 나누어서 사제들과 수도사들, 그런 성직자들은 충분히 자질이 있어서 지킬 만하니까, 그들에게는 이 계명도 율법이고, 일반 평신도들은 이 명령, [즉] ‘원수를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마 5:44; 눅 6:27, 35), 또 제10계명의 ‘탐심 갖지 말라,’ 이런 것은 그대로 지킬 수 없기 때문에, 이 정도 것은 계명이라기보다, 율법이라기보다 그저 권고에 불과하다, 이것은 그저 충고하는 정도다, 이렇게 지키는 자의 자질을 계급화 시키고, 그리고 또 율법의 명령을 경중을 나누어서 자기들 자의대로 해석하는 그 자질주의, 그 공로주의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율법은 언약의 법이요, 은혜의 법(lex gratiae)입니다. 율법을 통하여서 우리는 은혜로 도망칩니다, 그리스도께로 도망칩니다, 하나님의 자비 쪽으로 도망칩니다. 율법을 통하여 내 공로를 헤아리면 즉시 우리는 절망하고 좌절합니다. (칼빈이 앞에서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까?) ‘율법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의를 깨닫는 동시에 우리의 무능을 깨닫는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와 은혜로 도망친다. 곧 그리스도께 도망친다’(참조. 『기독교 강요』, 2.7.8-9.). 이렇게 말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므로 율법의 경중을 논하여서 자의대로 어떤 것은 지키고 어떤 것은 지키지 않고, 이것은 하나님의 뜻에 전면 배치되는 것이고 오히려 은혜의 기회를 차 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더 명령하셨다면 더 은혜를 주시고자 하심이거든요. 그것을 로마 가톨릭은 왜곡시키고 철저히 거꾸로 뒤집어 놓은 것입니다. 
     배고파하는 원수를 먹이고 또 짐진 자들의 짐을 가볍게 도와주라 하는 것, [그리고] 원수 갚는 것은 내게 있다 하면서 원수라도 먹여 주라고 하신 것(롬 12:19-20), 원수를 갚지 말고 동포를 원망하지 말라고 하신 것(레 19:18; 롬 12:19), 이러한 하나님의 계명이 그저 권고에 불과하다고 로마 카톨릭은 이야기하는데, 그것은 은혜의 창을 닫아 버리는, 은혜의 길을 막아 버리는 일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원수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마 5:44). 저주하는 자에게 축복하라고 하십니다(눅 6:28; 롬 12:14). 그리하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5:45; 눅 6:35).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명령하시는 것을 지켜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은혜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그 말씀을 순종하는 자리에 서면, 그 은혜의 자녀, 그 은총의 자녀가 바로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입니다. 지켜 행하여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너희도 남과 같이 사랑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과 세리도 이와 같이 사랑한다’(눅 6:32-34). 따져서 사랑하는 것은 이방인과 세리라는 것입니다. 무조건 이웃을 사랑하고, 은혜를 구하면서 원수를 친구같이 사랑하고, 친구를 사랑하듯이 원수도 사랑하고,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은혜의 자녀로 삼으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의 자녀에게 주어진 짐은 은혜의 짐입니다. 하나님은 이 짐을 가지고 우리에게 무게를 더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십자가를 지라고 명령하시는 것은, 주님의 멍에를 메라고 하는 것은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우니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가 힘을 얻으리라’(마 11:29-30), [즉] 십자가를 지어야 힘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때, 그때 우리에게 힘이 있습니다. 모든 율법을 우리는 다 지켜 행할 수 없습니다. 하나도 제대로 지켜 행할 수 없습니다. 중심이 하나님께 합해야 되고, 마음과 뜻을 다해야 됩니다. 생명조차 다해야 됩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십계명을 보았습니다. 적극적으로 넓게 십계명을 해석합니다. 더 많이 하나님의 계명을 넓게 [해석해야 합니다.] 살인하지 말라고 그러면 이웃을 먹여 주라[는 것이고], 간음하지 말라고 그러면 이웃 가정을 보살펴 주라[는 것이며], 도둑질하지 말라고 그러면 각자 각자의 일에 충실하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넓게 계명을 해석했습니다. ‘왜 넓게 계명을 해석합니까? 조금이라도 계명을 줄여야 은혜가 되는 것 아닙니까?’ 이렇게 오해합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더 크게 말씀으로 명령하시는 것은 더 큰 은혜를 베푸시기 위한 것입니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합니다. 율법을 그래서 칼빈은 넓게 해석하라, 영적으로 해석하라, 입법자의 뜻에 따라 해석하라[고 합니다].

확실히 모든 율법은 우리의 연약함에 비추어 너무나 벅차고 어려워서 우리는 그것의 가장 작은 한 획에도 이를 수 없다(참조. 마 5:18; 눅 16:17). 주님이 계셔서, 우리는 그 안에서 능력을 가지고 행한다. 그가 명령하시는 것을 주시게끔 하자. 그리고 그가 원하시는 것을 명령하시게끔 하자(Dominus est in quo virtutem facimus: det ille quod, iubet, et iubeat quod velit).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8.57.

     우리의 연약함을 분명히 하나님 앞에 비추어 [볼 때, 우리는] 낙담되고 좌절됩니다. 그러나 즉시 하나님은 우리의 무능을 깨닫게 하는 동시에 하나님의 은혜로 피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명령하시는 것을 주시게끔 하라. 그리고 그가 원하시는 것을 명령하게끔 하라.’ ‘Da quod iubes et iube qoud vis’(아우구스티누스). ‘하나님이 명령하시는 것을 주시게 하라 그리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마음껏 명령하게 하라.’ 이것은 안 하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을 안 받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껏 하나님이 우리에게 명령하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셔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 짧은 기도문이 우리 교회 역사상 가장 유명한 기도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어거스틴(아우구스티누스)의 기도문입니다. 전적 은혜, 오직 은혜를 구하는 [것입니다.] 내가 안 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하겠다는 것입니다, 지키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로서는 할 수 없으니 은혜로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명령하시는 것을 주시옵소서. 그리고 원하시는 대로 명령하시옵소서’라고 이렇게 기도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은혜의 법 아래에 있다는 것은 법 없이 고삐가 풀린 채 방황하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서 접붙임 되어서 그의 은혜에 의해서 율법의 저주로부터 자유롭게 되며 그의 영에 의해서 율법을 마음속에 새기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렘 31:33)(Sub lege gratiae esse Christianos, non est effraenate sine lege vagari, sed Christo insitos esse, cuius gratia a legis maledictione liberi sint, et cuius spiritu legem habeant in cordibus inscriptam).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8.57.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누리는 복 그것은 언약의 복입니다. 말씀의 복입니다. 그리스도의 접붙임을 받았을 때 그저 생명이 살아났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생명이 살아남과 함께 생활이 거룩해지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날마다의 삶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가 마음에 새기고, 그 말씀을 순종하는 자리로 나아가면서 은혜를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상한 심령을 받습니다. ‘내가 할 수 있다’라는 심령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하겠습니다. 그러나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은혜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하나님은 상한 심령을 하나님은 받으십니다. ‘우리의 말이 힘이 세다 기뻐하지 아니하고 우리의 발이 억세다고 기뻐하지 아니하고 여호와는 그를 경애하는 자와 그의 인자를 구하는 자, 자비를 구하는 자를 기뻐한다’고 시편 147편에서는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기독교 강요』. 2.8.58.] 

     그러므로 모든 죄는, 작은 하나님의 율법 하나도 어긴 죄는 다 사망에 이르는 죄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망에서 벗어나 은혜를 누리는 백성이기 때문에, 그러한 사망의 그늘에 놓여 있지 않고 은혜의 그늘 아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칼빈이 율법의 제3용법에서 이야기했듯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명령하실 때 약속하시고, 그리하여 이제 거듭난 자에게는 (시편 19편에 또한 말씀하듯이) 율법이 우리의 영혼을 소생케 하고, 눈을 밝게 하고, 마음을 즐겁게 하고, 정금같이 나오고 꿀송이같이 나오는 그러한 자리로 우리를 이끌어가는, 꿀송이보다 단, 그 율법의 본질적인 목적을 우리 가운데 이루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계명도 어기면 하나님 앞에 용서받지 못하는 사망에 속합니다. 근데 로마 가톨릭은 또 여기서 두 가지를 나누어서 ‘아주 중한 계명을 어겼을 때는 사망에는 이르지 않는다. 그래서 소죄(小罪)다, 경죄(輕罪)다. 그것은 용서받을 수 있는 죄(peccatum veniale)다,’ 그렇게 이야기하고, 아주 쉬운 것을 어겼을 때는 ‘중한 죄다. 그것은 죽음에 이르는 죄(peccatum mortale)다. 그것은 대죄(大罪)다’라고 해서 소죄, 대죄를 또 나눕니다. ‘내 원수를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 또 ‘탐심을 갖지 말라,’ 그리고 십계명의 제1-4계명, 경건의 계명을 마음으로 어기는 정도는 용서받을 수 있는 죄라는 것입니다. 예배를 잘 드리면 되는데, 속으로 하나님을 좀 업신여겼다고 해서 그 정도는 하나님이 용서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마음껏 자의적으로 만들어냅니다. 

어떤 욕망이 우리의 마음을 자극했다면 우리는 이미 탐심이라는 죄를 지은 자들이 되며 동시에 율법의 위반자들로 확정된다(Pupugit nos animi aliquod desiderium? iam concupiscentiae rei tenemur, ac simul constituimur legis transgressores).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8.58.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을 보십니다. 마음으로 간음하는 것도 간음죄입니다. 7계명을 어기는 것입니다. 마음으로 사람을 업신여기는 것도, ‘라가’라고 부르는 것도 살인하는 죄입니다. 왜 이 계명을 자꾸 축소시킵니까? 그건 내 자질을 바라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는 은혜를 바라보기 때문에, 하나님의 계명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모든 계명이 다 사망에 이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로 모든 계명을 우리가 이제 즐거워하는 자리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왜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계명을 다 이루셨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거짓 저울을 끄집어내서 우리가 좋은 대로 무게를 달지 말도록 하자. 우리가 좋은 대로, 우리 자신의 의견을 좇아, 이것이 무겁다, 이것이 가볍다 하지 말도록 하자. 다만 성경이라는 하나님의 저울을 주님의 보고에서 끄집어내서 무엇이 더 무거운지 달아보도록 하자. 아니 달지 말고, 주님이 이미 다신 것을 인정하도록 하자(sed afferamus stateram divinam de scripturis sanctis, tanquam de thesauris dominicis, et in illa quid sit gravius appendamus; imo non appendamus, sed a Domino appensa recognoscamus).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8.58.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성경이라는 하나님의 저울을 주님의 보고에서 끄집어내서 무엇이 더 무거운지 달아보도록 하라. 아니 달지 말고 주님이 다신 것을 인정하도록 하라.’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성경의 저울에 달아 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공로에 달아 보지 말고, 자질에 달라 보지 말고. 그리고 성경의 저울에 달아보지도 말라고 또 이야기합니다. 왜요 주님께서 이미 다 달아보시고 이루셨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아멘. 주님께서 다 달아 보시고 이루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 은혜를 구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저울에 달아 볼 필요도 없다는 것입니다. 성경의 저울조차도 달아볼 필요가 없다는 거예요. 모든 계명은 다 순종해야 됩니다. ‘우상 섬긴 것만 후대에 그렇게 영원한 저주가 있다,’ 그거는 우상 섬기는 것을 강하게 하나님이 싫어하심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죄를 다 싫어하십니다. 모든 죄는 다 사망에 속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모든 순종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 의의를 우리 것 삼아 주셔서 이제 우리가 율법을 즐거워하게 하신 것입니다. 

[『기독교 강요』. 2.8.59.] 

     우리는 율법의 경중을 달아 보아서는 안 됩니다(마 5:19). 율법을 명령하시는 그분이 누구신지를 알아야 됩니다. 율법이 무엇을 명령하는지에 일차적인 관점을 갖지 말고. 율법의 명령은 다 지켜야 됩니다. 우리가 판단할 수 없습니다. 다 ‘아멘’ 하고 순종해야 됩니다. 율법을 우리에게 명령하시는 분이 누구신지, 그 하나님이 어떠하신 분인지 [알아야 합니다.] 그 하나님이 자기의 아들을 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시고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주시지 않겠느냐[라고] 로마서 8장 32절에 이야기했듯이, 그 하나님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그때 모든 것이, 하나님의 명령이 은혜 가운데 놓이게 된다는 것입니다. 

성도들의 죄가 용서받을 만한 것이 되는 것은 그들 자신의 본성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의 자비로 은총을 얻기 때문이다(sanctorum delicta venialia esse, nou ex suapte natura, sed quia ex Dei misericordia veniam consequuntur).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8.59.

     ‘성도들은 죄가 용서받을 만한 것이 되는 것은 성도들의 본성 때문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자비로 은총을 얻기 때문이다’라고 칼빈은 이 율법 부분을 이제 마치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속한 것을 헤아리지 말고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헤아리라는 것입니다, 은혜를 헤아리라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모든 것이 하나님 편에서 온전해지고, 하나님 편에서 완전해지고. 율법의 의를 알게 될 때 즉시 좌절하고 절망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하게 되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오히려 우리를 강하게 찌를수록 은혜가 더 큰 그 역사가 있다는 것입니다. 

[결론] 

     이제 이 부분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첫째, 그리스도에 접붙임 받은 자만이 율법의 저주로부터 자유롭게 되어서 그 모든 명령을 마음속에 새기고 하나님의 은혜로 순종하는,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순종을 하는 데 이르게 됩니다.
둘째, 하나님의 자녀는 은혜 아래에 있으나 율법에 순종해야 됩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 싱겁고 중하게 보이는 율법이라도 단지 권고로 여기지 마시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명령하실 때 그 모든 명령은 율법이고 그 율법은 순종해야 생명에 이르는데, 은혜로 우리가 그 자리에 선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게 하는 것입니다.
     셋째, 로마 가톨릭은 율법을 경중에 따라 대죄와 소죄로 나누고, 지키기 어려운 이웃 사랑의 계명이나, 탐심을 갖지 말라는 십계명이나, 그리고 제1-4계명을 마음속으로 어기는 정도, 그저 속으로 불경건한 정도 이 정도는 중한 죄가 아니라고 그렇게 치부하지만, 사람이 자기 자질을 헤아리고 그 자질에 기초해서 율법의 경중을 헤아리는 것은 결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율법을 부여하신 하나님이 누구신지, 그가 어떤 분인지, 그가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를 헤아려야 된다는 것입니다.




73강 결론


  1. 그리스도에 접붙임 받은 자만이 율법의 저주로부터 자유롭게 되어 그 모든 명령을 마음속에 새기고 하나님의 은혜로 순종하는 데 이릅니다.
  2. 하나님의 자녀는 은혜 아래에 있으나 모든 율법에 순종해야 하는바,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과 같이 힘겹고 중하게 보이는 율법은 단지 ‘권고’에 불과하다고 여기는 로마 가톨릭의 주장은 궤변에 불과합니다.
  3. 로마 가톨릭이 율법을 그 명령의 경중에 따라서 ‘죽을 죄(대죄)’와 ‘용서받을 죄(소죄)’로 나누고 제1-4계명에 대한 은밀한 불경건이나 제10계명에 대한 직접적 위반을 후자로 보는 것은 죄의 삯이 사망이라는 성경의 가르침에 정면 배치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