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강 [2.8.6-12] 율법의 세 가지 해석 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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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 | 2.8.6-12 (2권 237-248페이지)



율법의 세 가지 해석 원리


     이제 칼빈은 율법의 해석 원리 세 가지에 대해서 논의하고 있습니다. 그 첫 번째는 율법을 부여하신 율법 수여자 곧 입법자[이신]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게 율법을 해석하라는 것입니다. 율법은 우리의 삶의 외형만이 아니라 내면도 규율합니다. 율법이 우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인격적인 순종입니다. 우리의 내적인 의로움, 그리고 선, 그리고 거룩함을 요구합니다. 외적인 정직함과 내적인, 영적인 그러한 의가 모두 율법에 의해서 규율된다는 것입니다. 단지 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법이기 때문에 이 율법은 영적인 법이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 주시는 언약 백성의 언약의 법입니다. 

[『기독교 강요』. 2.8.6.]

     그러므로 율법을 지킴에 있어서 우리는 단지 자구적으로 또 외형적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율법을 바라봐야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율법의 의미, 그 뜻을 영적으로 바라볼 수 있을까요? 

그(입법자[하나님])의 고유한 성품에 의해 율법의 본성 또한 측량되어야 한다(a cuius[legislatoris] ingenio natura quoque Legis aestimanda est).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8.6.

     무엇보다도 우리는 하나님 자신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누구신가? 그의 성품, 그의 속성에 부합하는 것을 하나님은 명령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므로 사랑을 명령하십니다. 하나님은 선하시므로 선함을 명령하십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시므로 의로움을 명령하십니다. 이렇듯이 하나님의 고유한 성품 그것을 통하여서 율법의 본성 또한 측량되어야 됩니다. 
     입법자가 누구이냐. 세상의 법은 주권이 백성에게 있고 국민에게 있기 때문에, 모든 법은 국민의 뜻을 헤아려서 해석해야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법은 그 절대주권, 대권이 하나님에게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는 해석을 해야 됩니다. 하나님은 영적인 입법자(legislator spiritualis)입니다. 영생의 언약의 주시기 때문에, 언약의 법으로 율법을 주실 때 영생의 주로[서], 영적인 입법자로[서] 우리에게 율법을 부여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을 단지 육체를 규율하고 제어하는 법으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살인하지 말라’라고 하면 단지 외형적인 생명을 해하지 말라는 데 그쳐서는 안 되고, 우리 안에 있는 분노하는 마음, 또 남을 업신여기는 마음, 이런 마음을 우리가 헤아려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는 해석, 그것은 하나님의 어떠하심에 부합하는 해석, 하나님의 성품에 걸맞은 해석, 그리고 하나님이 자기 자녀 삼으신 우리의 신분에 마땅한 해석, 그것을 행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천상의 율법은 우리의 영혼에 부여된 것이므로 영혼의 의로운 준수를 우선적으로 요구한다(quia animis nostris lata est lex coelestis, eorum coercitio ad iustam eius observationem in primis necessaria est).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8.6.

     천상의 율법은 우리의 영혼에 부여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법은 단지 세상의 관할하에 놓여 있지 않습니다. 세상은 외부적인 것만 규율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법은 우리의 영혼을 규율합니다, 우리의 내적인 정서를 규율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뜻조차 헤아리십니다, 중심조차 헤아리십니다. 그래서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인격적인 순종을 할 때 그 순종을 하나님이 받으시는 것입니다. 영혼의 의로운 순종이, 그 준법이 율법에 대한 온전한 순종이라는 것이죠. 

바울은 “율법은 신령한”(롬 7:14) 것으로서 영혼과 마음과 뜻을 다한 복종을 명령할 뿐만 아니라 육체의 모든 더러운 것이 씻겨 오직 영의 향기만이 나는 천사와 같은 순수함을 요구한다(Paulus (Rom. 7, 14), affirmans legem esse spiritualem; quo significat, non modo animae, mentis, voluntatis obsequium exigere, sed requirere angelicam puritatem, quae omnibus carnis sordibus abstersa nihil quam spiritum sapiat).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8.6.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이런 것은 세상의 법에도 나옵니다. 그러나 우리가 율법에서 이 계명들을 만나게 될 때, 우리는 이 계명들을 통한 하나님의 뜻을 헤아려야 됩니다. “율법은 신령한” 것입니다, 로마서 7장 14절. 그러므로 [율법은] 영혼과 마음과 뜻을 다한 복종을 명령하고 육체의 더러운 것이 씻겨져서 영의 향기가 나는 그러한 순종을 요구한다는 것입니다. 간혹은 이를 “천사와 같은 순종을 요구한다”라고 표현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 강요』. 2.8.7.]

     율법을 하나님의 뜻에 맞게 해석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무엇보다도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해석하신 그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가 “최고의 율법 해석자”(optimum legis interpres)이십니다. 그는 이 땅에 오셔서 율법을 이루셨을 뿐만 아니라 율법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특별히 산상복음에서 무리들에게 잘 알려 주셨습니다. 여자에게 음란한 눈길을 주는 것도, 마음을 음란하게 가지는 것도 간음이라고 했습니다.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다라고 요한일서에[서] 전하고 있는데(요일 3:15), 우리 주님께서도 동일하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남을 업신여기거나, 남을 헐뜯거나, 남을 시기하거나, 남을 지옥 불에 들어가라고 저주하거나, 이런 것들이 다 살인을 범하는 죄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말씀은 곧 율법 해석의 정점에 있는 것입니다. 율법이 불완전해서 율법을 완전하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는 율법의 본래적 의미를 우리에게 알게 하시고 이제 예수를 믿는 자가 그 본래적 의미를 순종할 수 있는 자리로 나아갈 수 있게끔 예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는 것입니다. 
     구약 때는 아직까지 그 율법의 본래적 뜻대로, 취지대로, 목적대로 순종할 수 있는 백성이 조성되지 않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 의식적이고, 더 세상의 어떤 배상이나 보상이나 이러한 재판법이 더 많았습니다마는, 이제 신약시대 때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이런 것을 모두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게, 입법자의 뜻,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게 [해석해야 합니다.] 그래서 원수를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이 크게 보면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과 함께 있는 것이고, 또 두 벌 옷이 있으면 서로 나눠 입고, 서로 먹을 것 있으면 나눠 주고, 5리 가자면 10리 가고, 이런 것들이 궁극적으로 살인하지 말라는 그 법과 통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입법자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간음하지 말라는 것은 그저 간음을 금하는 정도가 아니라 이웃의 가정을 돌보아 주라는 그러한 적극적인 의미가 있다는 것이죠.
     그래서 첫 번째 율법 해석의 원리는 하나님의 뜻을 헤아려라, [즉] 하나님이 우리에게 할 수 없는 것이라도 명령하시는데, 우리의 판단으로, 인간의 판단으로 하나님의 뜻을 축소시키거나 왜곡시키지 말고, [우리가] 할 수 없더라도 하나님이 뜻하시는 것을 먼저 받아들이고, 그러면 우리가 무능함을 알게 되므로 은혜를 구하게 되는 그 자리로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뜻대로 받지 아니하고, 우리 인간이 지킬 만한 것은 더 만들어서 인간의 공로를 자랑하려고 들고, 지키기 싫거나 지키기 어려운 것은 피해 다니려고 하고, 이러한 모습들을 보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입법자의 뜻에 충실하게 해석해야 됩니다. 

[『기독교 강요』. 2.8.8.]

계명들과 금지들은 항상 용어들로 표현되는 것 이상을 내포한다(plus inesse semper in praeceptis ac interdictis quam verbis exprimatur).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8.8.

     이제 율법의 두 번째 해석법은 하나님의 말씀을 용어 그 자체로만 해석하지 말고 그 너머로 해석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첫 번째 해석 방법과 사실 서로 의미가 상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맞게 해석한다는 것은 곧 문자에 머물지 않고 그 너머로 해석한다는 것이죠. 단지 금했다고 금한 것만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하라는 쪽으로 해석하는 것을 포함한다는 것이죠. 그리고 부모에게 공경하라 하면 이웃, 연장자, 또 사회의 질서, 그래서 내 위에 있는 사람, 상전에게 공경하라, 이렇게 넓게 해석한다는 것이죠.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명령한 것을 바라볼 때, 올바르고 충실하게, 견고하게 하나님께 나아가는 계단과 같은 그러한 방법을 강구해야 됩니다. 하나님의 법에 사람들의 용어를 덧붙여서 단지 부록과 같이 만들 것이 아니라 충실하게 복원된 “입법자의 순수하고 본래적인 의미”(purus germanusque legislatoris sensus)를 추구해야 합니다. 

과연 거의 모든 계명 가운데 제유법이 뚜렷이 드러나므로…율법에 대한 온당한 해석은 용어들을 넘어 나아가야 한다(Sane adeo in omnibus fere praeceptis manifestatae sunt synecdochae,…Ultra verba itaque progredi sobriam legis interpretationem palam est).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8.8.

     작은 것 하나로 많은 것을 설명하는, 하나로 전체를 설명하는 제유법(提喩法, synecdoche)이 있지 않습니까? 바로 칼빈은 여기에서 ‘율법도 이러한 제유법적 해석을 하라’[고 합니다]. 율법의 의미를 협착하고 좁은 공간에, 그러한 뜻에 한정시키지 말고, 율법의 해석에 있어서 용어를 넘어서는 그러한 해석[을 하고], 무엇보다도 계명을 주신 이유(ratio)가 무엇인가, 계명의 취지와 목적(finis), 이런 것을 헤아려서 넓게 적극적으로 해석하라는 것입니다. 왜 율법의 교훈이 우리에게 주어졌는지, 단지 살인하지 말라 그러면 살인하지 말게 하려고, 칼을 들어서 남을 찌르지 말라고 그 계명을 주셨는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 계명을 주신 목적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백성이 그저 남을 죽이지 않고, 그저 부녀를 겁탈하지 않고, 그런 계명을 소극적으로, 하지 않는 계명을 지키는 선에 머물도록 하는 것이 목적이겠습니까? 하나님은 계명의 목적과 이유[을 헤아려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이유와 함께 목적이 있지 않습니까? 왜 그 계명을 주느냐[를 생각해야 합니다]. 단지 소극적으로 하지 말라는 게 어떤 계기는 될 것입니다, 이유는 될 것입니다. 서로 많이 죽이고, 서로 많이 싸우고, 서로 많이 빼앗고, 서로 많이 간통하고 간음하고 그렇게 하니까, 그 이유로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을 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목적은 이 이유를 넘어서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이유가 있지만 목적은 그 너머입니다. 단지 죽이지 말라고, 단지 부녀자를 겁탈하지 말라고 6계명과 7계명을 주시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 목적은 그 너머로 있다는 것입니다.
     율법을 주신 하나님, 입법자이신 하나님이 무엇을 좋아하시고(placere) 무엇을 싫어하시는지(displicere)[를 헤아려야 합니다]. 우리가 생명이라는 것을 주제로 삼아 봅시다. 생명이라는 것을 놓고 살인하지 말라고 그랬는데, 하나님은 생명을 놓고 어떤 것을 좋아하실까요? 그것은 서로 배고픈 사람을 먹여 주고, 또 겨울에 헐벗은 사람을 입혀 주고, 이러한 적극적인 측면이 있지 않겠습니까? 이러한 입법자의 뜻을 헤아리는 첫 번째 해석은 곧 제유법적으로 넓게 해석하고, 크게 해석하고, 단지 문자의 편협함에 사로잡히지 아니하고, 영적인 의미를 더 크게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첫 번째 해석 원리와 두 번째 해석 원리가 서로 상통하다라고 아까 말했던 것입니다. 

[『기독교 강요』. 2.8.9-10.]

선한 것이 명령될 때에 그것과 배치되는 악한 것이 금지된다…악한 것들이 금지될 때에 그 반대의 의무가 명령된다…덕성은…악행에 상반되는 의무와 행위에까지 미친다(dum bonum iubetur, vetari quod cum eo pugnat malum;…Imperari quoque contraria officia, dum mala vetantur,…nos eam(virtutem) ultra procedere dicimus, ad officia scilicet factaque contraria).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8.9.

     선한 것이 명령될 때 그것과 배치되는 악도 당연히 금지될 것입니다. 무엇을 하라라고 할 때는 해서는 안 되는 것은 금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반대로 하지 말라고 했을 때, 그것은 해야 할 것을 하라는 것도 포함하지 않겠습니까? 이웃에 대하여 살인하지 말라 그랬으면 생명을 보호하라[는 것이고], 간음하지 말라 그랬으면 바로 부녀자의 삶을 보호하라, 또 이웃 가정을 살펴 주라[는] 이러한 적극적인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강요』. 2.8.11.]

우리는 두 판으로 하나님의 법이 구분된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심사숙고해야 한다.…첫 번째 부분은 특별히 그의 신성에 대한 예배에 관계되는 종교적인 의무에 돌려진다. 두 번째 부분은 사람들과 관계되는 사랑의 의무에 돌려진다(considerandum quid sibi velit divinae legis in duas tabulas partitio,…priorem religionis officiis, quae peculiariter ad numinis sui cultum pertinent, alteram officiis caritatis quae in homines respiciunt, assignaverit).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8.11.

칼빈은 십계명 중에 제1-4의 하나님 사랑에 대한 계명들과 제5-10의 이웃 사랑에 대한 계명들을 하나님이 친히 율법을 기록하여 모세에게 주신 두 ‘돌판’과(출 24:12; 고후 3:3 등) 동일시하는 전통적인 입장을 따릅니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8.11, 각주 468.

     이제 세 번째 율법 해석 원리로 칼빈은 제1-4계명의 하나님 사랑의 계명과 제5-10계명의 이웃 사랑의 계명을 조화롭게 해석하라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 사랑의 계명이 더 본질적이고, 더 앞자리에 서야 되겠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하나님 사랑의 계명을 앞세운다고 하면서 이웃 사랑의 계명이 무시되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시고 하나님은 항상 우리가 율법에 [대한] 그 순종의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기 때문에, 내가 무엇을 한다고 하면, 간혹은 우리가 첫째 돌판의 계명과 둘째 돌판의 계명이 부딪힌다고도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그런 자리에 우리를 두지 아니하십니다. 먼저 하나님과 그의 나라의 의를 구하면 이 모든 것을 더하시리라고 주님이 약속하지 않았습니까? 먼저 하나님을 경배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면, 이웃 사랑의 길을 열어 주시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경배하는데, 어찌 부모 공경의 기회를 하나님이 박탈하시겠습니까? 이러한 부분들은 먼저 우리가 율법의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계명을 조화롭게 해석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살아 계심과 은혜와,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가 율법을 지킬 수 있음에 대한 인식을 해야 됩니다. 종교적인 의무 이것은 첫째 돌판이요, 이웃을 향한 의무는 둘째 돌판입니다. 

분명 의의 첫 번째 근본은 하나님에 대한 예배이다. 이것이 전복되면 그 나머지 모든 부분은 마치 무너진 건물의 파편들과 같이 산산조각이 나서 분쇄되고 만다(Primum sane iustitiae fundamentum est Dei cultus, quo everso reliqua omnia iustitiae membra, velut divulsi collapsique aedificii partes, lacera et dissipata sunt).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8.11.

     무엇보다 근본적인 것은 하나님에 대한 예배입니다. 우리가 영혼이 살아 있어야 육체가 움직이듯이, 예배가 온전해야 이웃 사랑이 온전할 것입니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림이 없이 어떻게 이웃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이 어떻게 이웃에게 공평을 이야기하겠습니까? 하나님에 대한 예배가 의의 시작이자 근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예배를 원천이자 영이라고 부릅니다. 이와 같이 첫째 판을 먼저 우선적으로 우리가 마음속에 새겨야 됩니다. 그렇지만 결코 둘째 판과 첫째 판이 배치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첫째 판을 순종하기 때문에 둘째 판이 도외시되거나 둘째 판이 무시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강요』. 2.8.12.]

     십계명은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크게는 서론이 있습니다. 서론이 있고, 그리고 첫째 판에 네 계명, [즉] 1-4계명이 있고, 둘째 판에 5-10계명이 있습니다. 이것의 분류를 각각 다르게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서론을 제1계명에 한정시키는 경우도 있고, 또 앞부분의 계명을 나누어서 세 계명으로 하고 뒤의 계명을 일곱 계명으로 분류하는 경우도 있고, 또 다섯 계명씩 나누어서 분류하는 경우도 있고, 여러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의 뜻대로, 성경의 기록대로 처음의 1-4계명과 뒷부분의 5-10계명, 이 두 판을 분류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할 것입니다. 이 두 돌판의 계명들은 조화롭게 해석이 돼야 됩니다. 

[결론]

     이제 이 부분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첫 번째, 율법의 제1 해석 원리는 율법의 입법자이시고 수여자이신 하나님의 성품과 뜻에 맞는 영적인 해석을 하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 율법의 둘째 해석 원리는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게 하되, 용어에 집착해서 편협되게 그곳에 머물지 말고, 그 제정 이유와 함께 목적을 헤아리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율법을 해석함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는 율법에 대한 최고의 해석가가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셔서 율법을 다 이루셨고 또 율법에 대한 해석도 온전하게 하셨습니다. 율법의 ‘하라’라는 적극적 규범과 ‘하지 말라’는 소극적 규범은 서로 함께 있습니다. ‘하라’는 규범도 ‘하지 말라’는 규범과 함께 봐야 되고, ‘하지 말라’는 규범도 ‘하라’는 규범과 함께 봐야 됩니다. 첫 번째 해석 원리와 두 번째 해석 원리는 함께 고찰되어야 함이 마땅합니다. 
     그리고 율법의 세 번째 해석 원리는 제1-4계명, 하나님 사랑의 계명, 경건의 계명과 제5-10계명, 이웃 사랑의 계명, 서로 이웃 간에 더불어 사는 그 계명이 조화롭게 해석돼야 된다는 것입니다. 다만 하나님에 대한 예배가 의의 시작이자 근본이라는 것을 우리는 항상 명심해야 합니다.




67강 결론


  1. 율법의 첫 번째 해석 원리: 율법의 입법자이시며 수여자이신 하나님의 성품과 뜻에 맞는 영적인 해석입니다.  
  2. 그리스도는 새로운 율법을 수여하신 분이 아니라 그의 복음 가운데 최고의 율법 해석자이십니다.
  3. 율법의 두 번째 해석 원리: 율법에 대한 온당한 해석은 용어들을 넘어서야 하며 그 제정 이유와 함께 목적을 헤아려야 합니다. 
  4. 율법의 ‘하라’는 적극적 규범과 ‘하지 말라’는 소극적 규범은 그 모두를 포괄해서 제유법적 해석을 해야 합니다. 
  5. 율법의 세 번째 해석 원리: 십계명을 이루는 하나님 사랑의 경건의 계명과 이웃 사랑의 삶의 계명을 서로 조화롭게 해석합니다. 다만 하나님에 대한 예배가 의의 시작이자 근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