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강 [3.3.21-25] 회개의 은혜와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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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 | 3.3.21-25. (3권 158-167쪽)



회개의 은혜와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회개


     칼빈이 회개와 중생을 역동적으로 파악하고 있음을 우리는 이미 살펴보았습니다. 회개와 중생을 연결하는 그 지점에 회심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회심은 ‘마음을 돌이킨다’[라고] 우리가 한자는 그렇게 번역하지만, 사실은 ‘conversio,’ 그냥 돌이킨다는 뜻입니다. 회개도 돌이키는 것이고 중생도 돌이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칼빈은 회개를 전적인 돌이킴이라고 생각합니다. 단지 죄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죄를 버리고 새 것이 되는 것이죠. ‘mortificatio’, ‘vivificatio,’ [곧] 이전 것이 지나가고 새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봤을 때는 중생과 본질적으로 연결되는 것입니다. 중생이 거듭남이잖아요. 이런 측면에서 회심이라는 개념, ‘conversio’라는 개념에서 칼빈은 회개와 중생의 연결 고리[를 접근하고], 그래서 심지어 회개와 중생은 다르지 않다, 이렇게까지 표현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회개와 중생을 돌이킴이라고 봤을 때 무엇보다 이 회개와 중생에는 처음부터 이전의 것으로부터 멀어지려고 하는 우리의 마음의 변화가 있어야 됩니다. 그것을 칼빈은 죄에 대한 증오라[고 합니다]. 회개의 기원은 죄에 대한 증오다. 이것이 일부의 이야기는 아닙니다. 이전에 좋던 것이 이제는 우리에게 값없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분토같이 여겨집니다, 아니 못한 것으로, 불법의 것으로, 불의의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래서 이전의 것을 증오하게 됩니다. 
     그 가운데서 우리는 죄 사함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죄 사함이라는 것은 죄에 대한 배척, 그래서 죄에 대한 증오와 함께 우리에게 죄를 멀리하게 하는, 그 가운데서 이전의 죄 값을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써, 그의 대속으로써, 우리가 치르지 않지만, 이전의 죄 값이 우리에게 지불된 것처럼 우리가 의롭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 사함에 상응한 회개가 우리에게 요구된다고 봤을 때, 죄를 사하는 그 회개 가운데서 우리는 죄를 미워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난번에 보았죠, 회개의 일곱 가지 요소. 그중에는 뭐예요? 변증도 있었고 분함도 있었잖아요. 그래서 죄가 잘못됐다, 잘못됐으니까 이것이 옳다는 변증과 함께 내가 이전에 잘못된 것에 속해 있었다는 분함, 이런 것들이 함께 회개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회개는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닌 무능한 죄에 속박된, 노예된 우리가 죄로부터 벗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죄에서] 스스로 벗어날 수 없죠. 마치 낭떠러지에 떨어지는 수레와 같이 우리가 몸부림칠수록 더 나락으로 떨어지는데, 회개는 우리에게 은총으로 주어지죠. 그러니까 죄를 증오하는 것도 은총으로 주어지고, 절대적인 긍휼 가운데 은혜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회개에는 절대[로] 공로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공로만이 있죠. 성령의 역사로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작용하는 것이죠. 그 가운데서 ‘날마다 죽노라’[라는] 항구적인 회개 가운데 우리가 열심을 다하고 훈련을 받는 것이죠. 
     그래서 전체적으로 ‘여호와께 돌아오라.’ 이 ‘돌아오라’고 우리를 부르시고, 그리고 ‘떠나라’고 부르시고, 그리고 ‘새로운 것을 취하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시는 이 모든 것이 회개의 요소로[서] ‘mortificatio’, ‘vivificatio’가 함께 있다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이 생명 얻는 회개, 생명을 얻는, 내 것으로 생명을 누리는 그 회개가 선물로 주어진다는 것이죠. 

[『기독교 강요』, 3.3.21.]

회개는 하나님의 특별한 선물이[다](singulare esse Dei donum poenitentiam).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3.3.21.

     그래서 칼빈은 ‘회개는 하나님의 특별한 선물이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특별한 선물이라는 게 뭘까요? 생명의 선물이고. 특별한 선물이라는 게 뭘까요? 택한 받은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어느 순간 회개하는 마음을 주시는 것이고, 그러므로 회개는 거듭나는 것이다, 중생의 영이라[는 것입니다. 즉,] 회개의 영과 중생의 영이 함께 작용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거듭나는 것이 뭐냐? 이제 단지 소극적이지 않고 열심히, 사모[함으]로 거듭나는 것이기 때문에, 그래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다(엡 2:10). 그러니까 회개, 회심, 중생은 이전 것이 지나가고 새 것이 되어서 새 것에 걸맞은 삶을 사는 것, 이렇게 나아가는 것이죠. 
     그러므로 회개가 구원의 원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회개를 자랑하지 말라는 것이에요. ‘내가 이렇게 회개했다, 내가 얼마나 철저하게 회개했는 줄 아냐, 내가 얼마나 뉘우쳤는 줄 아느냐.’ 무슨 세상 법정에서 정상 참작하듯이 [말입니다.] 아닙니다. 회개는 아무 공로가 없습니다. 회개는 구원의 원인이 아닙니다. 회개는 우리가 누리는 것입니다. 믿음과 함께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특별한 선물이 회개입니다. 
     “구속자가 시온에 임하여 야곱의 자손 가운데서 죄과를 떠나는 자에게 임하리라”[라고] 이사야 59장 20절에 이야기합니다. ‘구속자가 시온에 임하여서 죄과를 떠나는 자에게 임하리라.’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로 회개의 은혜가 우리에게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나아갈 때 두 가지로 [나타납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자리에 서느냐, 이것은 돌이키는 자리입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 편으로 나아가는 경외의 자리입니다. 그러나 이 부분에 있어서 끝까지 이것을 부인하고, 끝내는 자기 자신의 의로 다시금 돌이키는 이런 것이 성경에서는 배교자라고 이야기합니다. 특별히 칼빈은 이러한 자들을 은혜를 경멸하는 자, 그리스도의 피를 더럽히고 짓밟는 자, 이렇게 표현하고, 다시금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는 자, 이렇게 표현합니다. 성경에는 ‘한 번 은혜의 빛을 맛보고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자가 타락하게 되면 다시금 회개할 수 없다’(히 6:4, 6), 이렇게 히브리서에서 말씀하고 있고,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에 짐짓 죄를 범하”면, (‘짐짓’이란 말은 ‘고의’라는 뜻입니다.)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사람이 짐짓 죄를 범하면 그 사람도 다시금 속죄하는 제사에 참여할 수 없고’(히 10:26),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령을 거역하면 사함을 받지 못하리라’(마 12:31; 막 3:29; 눅 12:10)[라고 합니다]. 
     왜 이 단계에서 칼빈이 성령을 거역하는 것, 진리를 거역하는 것,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거역하는 것, 은혜를 거역하는 것은 사함을 받지 못한다는 이 부분을 이야기할까요? 이것은 우리가 역으로 바라봐야 된단 말이에요. 회심한 사람, 거듭난 사람은 십자가를 나의 은혜로, 그리고 진리를 하나님의 올바른 도로, 생명의 도, 우리 거룩한 생활의 도로 받아들이고 성령의 역사에 아멘 한다는 것이죠. 그래서 용서받을 수 없는 성령을 모독하는 죄, 이거는 회개로도, 회심으로도 돌이킬 수 없는 죄라는 뜻입니다. 결코 사함이 주어지지 않는 무서운 범죄[입니다]. 

[『기독교 강요』, 3.3.22.]

아우구스티누스는 어딘가에서 이러한 범죄를 은총에 대한 회의(懷疑)가 수반된, 죽음에 이르기까지 꺾이지 않는 완고함이라고 정의한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3.3.22.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성령을 거역하는 죄를] “은총에 대한 회의가 수반된, 죽음에 이르기까지 꺾이지 않는 완고함,”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은총을 믿지 않는, 죽을 때까지, 내가 죽으면서도 은총에 아멘 하지 않는 그것이 사함 받을 수 없는 죄다, 회개에 이룰 수 없는 죄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진리의 빛이 눈부셔 무지를 핑계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결의에 찬 악의를 품고 그 진리를 거역하는 것은 성령을 거슬러 죄를 짓는 것이라고 나는 말한다(Dico igitur, in spiritum sanctum peccare, qui divinae veritati, cuius fulgore sic perstringuntur ut ignorantiam causari nequeant, tamen destinata malitia resistunt, in hoc tantum ut resistant).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3.3.22.

     칼빈은 이 부분을 좀 더 진리의 측면에서 접근합니다. “하나님의 진리의 빛이 눈부셔 무지를 핑계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결의에 찬 악의를 품고 [그] 진리를 거역하[는 것은] 성령을 거슬러 죄를 짓는 것.” 이렇게 성령 훼방 죄를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사하심을 얻지 못”한다(마 12:32)[고 합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영을 거스르는 모독이다, 이러한 말씀들이 복음서에 함께 나오죠. 인자를 거스른다는 것은 뭐예요? 그를 메시야로 영접하지 않는 것, 그런 것은 그들의 우매함 가운데서, 패역함 가운데서 있을지라도, 성령이 그들에게 역사하는데도, 진리의 영의 역사가 있는데도 그것을 거부하는 것은 도무지 돌이킬 여지가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지식이 불신과 한편이 되는 경우에는 은총의 여지는 어디에도 없다(non esse veniae locum ubi scientia ad incredulitatem accessit).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3.3.22.

     그래서 아주 중요한, 우리가 새길 만한 말을 칼빈이 합니다. “지식이 불신과 한편이 되는 경우에는 은총의 여지는 어디에도 없다.” 이렇게 칼빈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지식이 불신과 한편이 되는.’ 진리가 있는데 믿지 않으면 어디에도 은총의 여지는 없다[는 것입니다]. 이 부분을 칼빈은 특별히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보았듯이 믿음의 제1 요소는 지식이잖아요. 우리가 그 지식이, 그 지식이 바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 그리스도의 말씀의 진리, 지식에 대한, 그 지식이 있는데도 불신한다면, 그곳에는 은총의 여지가 없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이죠. 전체적으로 칼빈은 이 맥락이 유지되어 오는 것이죠. 

[『기독교 강요』, 3.3.23-24.]

     그래서 성령 훼방 죄라는 개념에도 진리를 가지면서도 불신하는 자, 진리가 주어졌는데도 불신하는 자, 그 자들은 유기된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않는 자들이다.’ 그리고 택한 받은 자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시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올 수 없는 자들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부분은 사실상 인과적으로 보는 것은 가하지만, 그러나 새로운 말은 아닙니다. 왜요? 이미 진리에 대한 아멘이 없다면 당연히 돌이킬 수 없죠.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럼 왜 이렇게 이야기할까요? 이것은 드러남의 표가 그렇다 이 말입니다. 드러남의 표. 그래서 어떤 사람이 거부하고 핍박하고 하는데, 진리가 없이 저러는 사람은 하나님이 돌이키게 할 것이지만 진리가 있으면서 저렇게 하는 자는 이미 배역한 자다 이 말이에요. 배교자다 이 말이에요. 그래서 아까 배교자다, 진리의 배교자는 돌이킬 수 없다,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표현된 것은…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전체적인 돌이킴, 달리 말하면 전인(全人)의 배교이다(hic … universalis aversio a Deo, et totius, ut ita loquar, hominis apostasia exprimatur).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3.3.23.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전체적인 돌이킴, 달리 말하면 전인의 배교,”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전인의 배교. ‘한 번 빛을 받고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타락한 자들’(히 6:4, 6). 그리고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짐짓, 고의로 이런 가운데서도 죄를 짓는 자, 이런 경우에 복음의 진리가 고의로 거절되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제물”(hostia Christi)도 용인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상당히 칼빈은 이 부분을 강하게 이야기하고 있어요. 아까는 우리가 보았듯이, ‘지식이 불신과 한편이 될 때는 은총의 여지가 없다,’ 이렇게 이야기했고, 또다시 ‘복음의 진리가 고의로 거절될 때는 그리스도의 제물은 용납되지 않는다,’ 이 말은 강한 이야기죠. 그리스도의 대속의 의가 내 것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유기된 자들은 이 진리를 떠나는 자들입니다. 이 진리를 떠나서 회개한다 하지만은 진리 가운데 거하지 않고, 그 말씀을 아멘 하지 않고, 하나님의 구원의 도에 아멘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짓되게, 일순간 그들의 회개를 하나님이 받으시는 듯해도 이러한 진리를 떠났기 때문에 그런 회개를 받지 않는 [것입니다.] 아합의 경우라든지, 에서의 경우라든지 이러한 것들을 칼빈은 이야기하고 있어요. 

[『기독교 강요』, 3.3.25.]

위선자들은 때때로 이렇듯 얼마간 용서를 받지만 하나님의 진노는 여전히 그들 위에 머문다(sic interdum hypocritis parci ad tempus, ut tamen semper illis incumbat ira Dei).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3.3.25.

     ‘위선자들은 얼마간 용서를 받는 듯해도 하나님의 진노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들 위에 머물러 있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완고한 자가 누굴까요? 바로 성령을 거역하는 자가 누굴까요? 내 안에서 역사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 그 진리의 영, 그 진리를 거역하고 그 은혜의 비췸이 있음에도 그것을 거역하고 피해 다니고, 이것이 성령 훼방 죄라[고 합니다]. 이런 자들에게는 회개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 이 말은 사실상 우리가 판단을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판단을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아, 저 사람은 저러니까 저런 사람한테는 복음을 전하면 안 돼,’ 그건 결코 아닙니다. 바로 하나님의 도를 우리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교훈을 이야기하는 것이지, 복음의 능력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은 누구에게나 전해져야 됩니다. 누구에게나 죄 사함의 회개를 선포해야 됩니다. 그러나 그 회개의 역사가 어떻게 일어나냐? 아멘의 역사 가운데, 진리에 대한 아멘 가운데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이 복음을 이야기하는 것이지, 어떤 회개에 대한 판단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결론]

     그래서 이 부분은 정리하면, 첫째로 생명 얻는 회개가 하나님의 특별한 선물로서 주어지는데, 회개는 구원의 원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로서 믿음과 함께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두 번째, 은혜를 경멸하고 그리스도의 피 공로를 부인하는 자는 주님을 다시금 십자가에 못 박고, 성령의 역사로 한 번 은혜를 맛보고 진리를 아는 지식을 얻은 자가 성령을 거역하면 다시 사하심을 얻지 못합니다. 
     셋째로 진리의 빛이 눈부셔 핑계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진리를 거역하는 자는 성령을 거슬러 죄를 짓는 것인데, 지식이 불신과 함께하는 곳에는 은총의 여지가 없습니다. 이 부분을 칼빈이 특별히 강조하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네 번째, 그리스도와 사귐이 있다 하면서도 짐짓, 고의로 복음의 진리를 거역하고 하나님의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부인하는 자에게는 그리스도의 제물이 대속의 은혜로서 작용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아멘 하지 않는데 예수님의 피 제사가 어찌 우리의 것이 되겠냐 하는 그 이야기인 것입니다.



107강 결론


  1. 생명 얻는 회개가 하나님의 특별한 선물로서 주어지는바, 회개는 구원의 원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로써 믿음과 함께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2. 은혜를 경멸하고 그리스도의 피 공로를 부인하는 자는 주님을 다시금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고, 성령의 역사로 한 번 은혜를 맛보고 진리를 아는 지식을 얻은 자가 성령을 거역하면 다시 사하심을 얻지 못합니다. 
  3. 진리의 빛이 눈부셔 핑계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진리를 거역하는 자는 성령을 거슬러 죄를 짓는 것인바, 지식이 불신과 함께 하는 곳에는 은총의 여지가 없습니다.  
  4. 그리스도와 사귐이 있다 하면서도 짐짓 복음의 진리를 거역하고 하나님의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부인하는 자에게는 그리스도의 제물이 대속의 은혜로서 작용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