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17장 이곳에서는 하나님의 섭리가 어떻게 작용하고, 우리가 하나님의 섭리를 의지하고 어떻게 간구하며 살아갈 것인가? 이 부분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섭리의 적용’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성경이 무슨 목적으로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결정에 따른다고 가르치고 있는지 여기에서 간략하게 다루는 것이 유익하다.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에 관하여 세 가지를 주목해야 한다. 첫째, 그것은 지나간 시간과 다름없이 미래의 시간에도 미친다. 우리는 이를 깊이 고려해야 한다. 둘째, 그것은 모든 것의 지휘자로서 때때로 중간 매개들을 통하여, 때로는 매개들 없이, 때로는 매개들 모두에 역행하는 작용을 한다(sic moderatricem esse rerum omnium, ut nunc mediis interpositis operetur, nunc sine mediis, nunc contra omnia media). 마지막으로, 이와 더불어 섭리는 하나님의 돌보심이 인류 전체에 미친다는 사실과, 특히 그가 보다 가까이서 귀히 살피시는 교회를 다스리심에 있어서 파수꾼의 일을 감당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1.17.1.
하나님의 섭리는 과거의 일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미래에 되어질 일, 미래의 시간에도 미칩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영원하시고, 이전이나 지금이나 이후가 동일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 하나님을 통하여 하나님의 섭리가 과거, 현재, 미래에 걸쳐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섭리는 간혹은 ‘중간 매개’들이 개입합니다. 이런 것을 우리가 ‘이차적 원인’이라고 말하는데, 이러한 이차적인 원인이 있다고 해서 하나님의 섭리가 하나님의 본래의 뜻에 역행하여서 일어나는 그런 경우는 없습니다. 다만 우리에게 그렇게 보일 뿐이지만, 하나님은 그것조차도, 이차적 원인의 개입조차도 이미 작정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모든 것이 섭리 가운데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섭리는 만물에 미치고, 또 우리 개인에 미치지만,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믿는 백성들을 이 땅에, 교회에 두신 것은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의 일을 이루시고, 또 은혜를 베푸시고, 예배를 드리게 하려 하심이라는 것입니다.
비록 아버지의 부성적 호의와 자애나 심판의 엄정함이 섭리의 전체 역정(歷程) 가운데 자주 빛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의 원인들은 때로는 감춰져 있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1.17.1.
하나님은 아버지의 그 호의와 자애가 항상 만물을 통하여 나타나고, 무엇보다 믿는 백성에게 미치게 하십니다. 이와 함께 하나님의 ‘심판’의 엄정함도 드러나는 것입니다. 사랑을 베푸시되, 공의의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이죠. 그래서 ‘하나님의 섭리의 전체 역정이, 그 섭리의 모든 바퀴가 돌아가는데, 그것이 아주 빛나고 있다.’ 이렇게 칼빈은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의 섭리의 역정이 아주 빛나고 있다. 자주 빛나고 있다.’ 이렇게 말합니다.
그렇지만 그 ‘원인’들을 우리가 다 알 수는 없습니다. 해와 달의 운행을 어떻게 우리가 다 알 수 있겠습니까? 우리 자녀들이 자라가는 것을 어떻게 그 원인들을 우리가 다 알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것을 통하여서 하나님의 살아 계신 그 섭리의 모든 역정, 그 섭리의 모든 트랙, 바퀴, 하나님이 뛰어가시는 그 트랙, 그것이 다 우리에게 빛나고 있고, 자주 빛나고 있다라고 그렇게 칼빈은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자신의 계획에 대한 ‘최고의 이유’를 스스로 가지고 계십니다. 우리가 어떤 논법을 내세워 최고의 이유라고 한다고 해도 그것은 하나님의 그 ‘이유’에, ‘뜻’에, ‘원인’에 가닿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스스로 가지고 계신 것입니다. 사물의 원인들은 아무도 알 수가 없습니다. 지으신 분만 아시는 것입니다.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께서 행하신 기적이 많고 우리를 향하신 주의 생각도 많아 누구도 주와 견줄 수 없나이다 내가 널리 알려 말하고자 하나 너무 많아 그 수를 셀 수도 없나이다” 시편 40편 5절에서 기자는 노래하고 있습니다. 많은 기적들, 행하신 일들, 이것은 우리가 다 헤아릴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밀한 계획’, 그것은 우리가 미칠 수 없습니다.
주님은 이 놀라운 광경 가운데 자기 아버지의 영광이 빛나고 있음을 증언하신다[요 9:3]. 우리의 눈이 순수하다면 이를 볼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절제를 유지하는 가운데 하나님으로 하여금 우리에게 변명하시게 하지 말고 오히려 그의 은밀한 심판에 경의를 표함으로써 우리에게 있어 그의 뜻이 모든 것의 가장 의로운 원인이 되도록(ita revereamur occulta eius iudicia, ut nobis eius voluntas iustissima sit rerum omnium causa) 해야 한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1.17.1.
날 때부터 맹인된 자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은 ‘부모의 죄 때문에 그렇다’, 또 ‘이렇다, 저렇다’ 이야기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뭐라고 했습니까?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요 9:3). 궁극적인 하나님의 ‘뜻’, ‘원인’, ‘이유’, ‘목적’을 이야기하신 것입니다.
‘목적’은 이 사람을 낫게 하고 구원에 이르[게 하]고자 하심에 있었을 것입니다. 그 ‘원인’은 뭐냐? 하나님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드러내고자 하심이다. ‘아들을 통하여’ ‘아버지’가 ‘영광’을 받으시고, 이 일을 위하여. 곧, 날 때부터 맹인된 자를 두신 것은 지금 이때 예수님을 통하여 낫게 하시려고, 그리하여 영광 받으시려고 두신 것이라는 것입니다.
어찌 우리가 이 하나님의 뜻에 가닿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뜻’이 모든 것의 ‘가장 의로운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의’와 ‘지혜’의 ‘순수한 빛’으로 이런 모든 움직임을 다 주장하시고, 가장 ‘최상의 질서’ 가운데, ‘구조’ 가운데 두시고 끝내 ‘올바른 목적’을 이루십니다.
자기의 일이, 자기를 지으신 옹기장이요 세계의 조성자이신 하나님과 함께하는 데 있다는 사실을 깊이 생각하고 겸손하게 낮아져서 두려움과 경의 가운데 자기를 드리고자 힘쓰는 사람이 아니라면 아무도 하나님의 섭리를 올바르고 유익하게 측량할 수 없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1.17.2.
하나님이 만물을 지으신 ‘옹기장이’이시요, ‘조성자’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겸손히 낮아져서, 우리는 질그릇과 같아서 그 그릇을 빚은 ‘창조주 하나님’, ‘섭리주 하나님’께 모든 것을 ‘의지’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만물을 주장하실 때 ‘질서’와 ‘법칙’으로 주장하시듯이, 특별히 인생에게 큰 은혜의 섭리를 베푸실 때는 ‘규범’을 주십니다. 하나님이 ‘율법’의 그 도를 우리에게 새겨주셔서, 그 가운데 우리가 ‘하나님의 은밀한 계획’을 알게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를 거룩하게 이끄시면 우리를 ‘거룩한 백성 삼음’을 알게 하시고,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임하시면, 그 하나님의 사랑에, “너희가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먼저 사랑했다(요일 3:23; 4:11, 19, 21).”
‘하나님의 법’을 우리에게 새겨 주심은 우리가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알게 하시고, 먼저 우리가 은혜 받게 하시고, ‘우리의 죄를 사함받았으니 형제의 죄를 사하여 주라(참조. 마 6:12; 18:21-35).’ 이러한 것이 전부 다 ‘하나님의 불가해한 계획’(incomprehensibilis Dei consilium)이라는 것입니다. 만물의 법칙보다 우리 인생에게 하나님의 법을 새겨주신 것이 더 큰, 더 귀한 하나님의 섭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하나님의 법이 하늘에 있[지 않]고 바다에 있지 아니하고, 우리의 입에 있고, 우리의 마음에 있다’(신 30:11-14)고 이렇게 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하나님의 판단을 헤아리지 못할 것이요, 하나님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요. 누가 하나님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하나님의 모사가 되었느냐? 누가 꾀를 내서 하나님의 뜻을, 계획을 과연 말할 수 있겠느냐? 누가 하나님의 모사가 될 수 있겠느냐?’(롬 11:33-34)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지각이 가닿는 영역 너머 더 높은 곳에 솟아 있는 비밀들이 율법과 복음 가운데서 이해된다고 함은 실로 참되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를 낮추셔서 말씀으로 현시하신 이 비밀들을 자기에게 속한 자들이 받아들일 수 있도록 그들의 마음을 지성의 영으로 조명하시기 때문에(사 11:2; 욥 20:3), 이제 여기에는 어떤 심연도 없다. 오히려 우리가 안전하게 걸을 수 있는 길, 우리의 발을 인도하는 등(시 119:105), 생명의 빛(요 1:4; 참조. 요 8:12), 확실하고 분명한 진리의 학교가 있다. 그러나 세계를 다스리시는 경이로운 방식은 심연이라고 불림이 타당하다. 왜냐하면 그것이 우리에게는 숨겨져 있지만, 우리는 경외함으로 그것을 경배해야 하기 때문이다(At mundi gubernandi admirabilis ratio merito abyssus vocatur; quia, dum nos latet, reverenter adoranda est).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1.17.2.
우리의 지각은 우리의 너머의 하나님의 뜻을 헤아릴 수 없지만, 하나님의 섭리가, 그 비밀스러운 역사가 우리 안에, 또 만물을 통하여 펼쳐지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를 통하여서 ‘빛’ 되시고 ‘등대’시고 그 생명의 역사를 이루시는 확실하고 분명한 ‘진리의 학교’가 우리 앞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가 ‘진리의 학교’라는 것입니다.
언뜻 보기에는 끊임없이 내려가는 심연과 같이 보이지만, 그 ‘비밀스러운 하나님의 섭리의 심연’이 우리 앞에 놓여 있지만, 그래서 숨겨져 있지만, 우리는 그것을 ‘경외’하고 ‘경배’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감추어진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영원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신 29:29). 우리는 끝내 ‘나타난 것’만 압니다. ‘감추인 것’은 영원히 하나님이 아십니다.
여기서[신 29:29] 하나님은 우리가 열심을 다하여 율법을 묵상할 뿐만 아니라 자기의 은밀한 섭리를 정중하게 받아들일 것을 명령하고 계신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1.17.2.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해야 될까요? 칼빈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율법을 묵상하고 은밀한 섭리를 정중하게 받아들여라.’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욥기에서도 그 주제가 ‘끝내는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다 알 수 없으나, 우주의 생성과 우주의 운행과 그 구조를 보았을 때, “보라 이런 것들은 그의 행사의 단편일 뿐이요 우리가 그에게서 들은 것도 속삭이는 소리일 뿐이니”(욥 26:14).
하나님의 비밀스러운 경륜, 계획, 섭리는 우리가 다 알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그 심연이 우리를 끝없이 나락으로 받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게 하고, 그리고 끝내 하나님을 ’예배‘하고 ’경배‘하는 데 이르게 한다.’라고 노래하는 것이 욥기의 주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자신 안에 ‘지혜’를 가지고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지혜도 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맞추어 주신 지혜’를 가지고 하나님의 지혜의 근원까지 가닿으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유모가 아이에게 ‘옹알이’하듯이 맞추어 주셨습니다(참조. 『기독교 강요』, 1.13.1). 하나님의 섭리의 비밀도 그러한 것입니다. ‘모든 생물의 눈에 숨겨졌고’(욥 28:21), 하나님만 알려져 있다. 욥은 말했습니다. ‘사람에게 말씀하셨도다 주를 경외함이 지혜요’(욥 28:28)라고 또한 욥은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세계를 다스리는 권리가 자기에게 있다고 주장하실 때, 비록 그것이 우리에게 알려져 있지 않지만, 그의 지고한 주권을 즐거워하는 것이 우리에게 절도와 절제의 법이 되게 하자. 그리하면 그의 뜻이 우리에게 의의 유일한 규범과 모든 것에 대한 더없이 의로운 원인(unica iustitiae regula, et iustissima causa rerum omnium)이 될 것이다. … 이유들은 우리에게 숨겨져 있지만 오직 올바른 것만이 흘러나오는 모든 것의 지휘자(결정적 원리)인 섭리가 존재한다(illa moderatrix rerum omnium providentia, a qua nihil nisi rectum manat, quamvis nobis absconditae sint rationes).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1.17.2.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도 동일한 그러한 내용의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최고의 질서이고 우리는 모든 것을 알지 못하므로 오직 하나님의 선한 뜻을 헤아리고 그의 법에 따라 행할 뿐이다. 그 하나님의 섭리가 불변하는 법이다.’라고 이렇게 아우구스티누스는 이야기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최고의 유일한 규범’이요, 모든 것에 대한 더없이 ‘의로운 원인’이라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원인을 찾으려고 하지 마시고, 규범을 만들려고 하지 마시고, 하나님의 섭리의 비밀을 ‘찬미’하고, 그 하나님의 섭리의 비밀을 ‘누리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들은, 원인들은 우리에게 숨겨져 있지만, 오직 올바른 것만이, 흘러나오는 모든 것의 지휘자(moderatrix)가 섭리다.’라고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섭리에 대한 교리를 아는 것이 최고 유익한 것입니다.
경건한 사람들은 오히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성경으로부터 찾고 배워서 성령의 인도 아래 거기에 이르려고 애쓸 것이다. 그리하여 이와 함께 하나님이 부르시면 어디든지 따를 준비를 하고 있기 때문에, 이 교리[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지식보다 더 유익한 것은 어디에도 없다는 진리를 있는 그대로 나타낼 것이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1.17.3.
하나님의 섭리 이것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고백함이요, 그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심’을 고백하는 것이요, 하나님이 ‘나의 시작과 끝’이 되심을 또한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교리는 우리를 ‘진리’로 이끌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믿음’은 단지 현세에 머물지 아니하고, 앞으로 되어질 일, 나아가서는 ‘이 땅 이후의 삶’까지 ‘하나님께 맡기는’ 그러한 은혜의 길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이는[잠 16:9] 우리가 스스로 앞일을 전망하며 모든 일을 처리해 감에 있어서 하나님의 작정들로 인하여 아무 거리끼는 일이 없다손 치더라도 우리는 그의 뜻 아래 있음을 의미한다. 여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왜냐하면 우리의 삶을 자기가 세운 경계 내로 제한하신 하나님이 동시에 우리에게 우리의 삶을 돌보는 일을 맡기셨고, 그것을 보존할 방법들과 도움들을 준비하셨으며, 또한 우리에게 닥칠 위험들을 미리 알게 하시므로 우리가 부주의하여 그것들을 당하지 않도록 두루 예방하시고 여러 처방을 내리셨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의 직분이 무엇인지 분명하니, 즉 여호와가 우리에게 우리 삶을 보호하라고 맡기셨다면 우리는 그것을 보호하는 것이고, 그가 도움들을 베푸신다면 우리는 그것들을 누리는 것이고, 그가 위험들을 미리 경고하신다면 우리는 무모하게 그것들에 뛰어들지 않는 것이며, 그가 처방들을 내려 주신다면 우리는 그것들을 무시하지 않는 것이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1.17.4.
여호와의 손이 이끌지 아니하면, 그의 섭리의 역사가 없으면,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 잠언 16장 9절에서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계획’도 이미 지난 시간에 우리가 보았듯이, 계획도 내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의 경영은 우리에게 있어도, ‘응답’은 하나님께 있다라고도 했지 않습니까?
그리고 여기서는 ‘마음으로 계획할지라도, 인도하시는 분은 여호와시다.’ 이렇게 또한 말하고 있는데요, 전하고 있는데, 경영하는 것, 계획하는 것 내가 하는 것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이미 인도하시는 여호와, 그리고 응답하시는 여호와를 바라보고 우리가 마음의 경영을 하고 계획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이 말씀들을 보아야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마음의 계획조차도, 경영조차도 하나님께서 섭리 가운데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그가 여러 방편을 사용하셔서 그것에 일종의 옷을 입히시기 때문에, 항상 있는 그대로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1.17.4.
그 무엇도 운명에 속한 것이 없습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가 모든 일에 옷을 입힌다.’ 이런 표현을 씁니다. 일은 그저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가 입혀진 일’이라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입혀진 일이요, 또 모든 만물은 ‘하나님의 섭리의 옷’을 입은 그러한 것으로 이 땅에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하나님]의 지혜의 광대함은 무한해서 그는 악한 도구들을 선하고 순수하게 사용하는 방법을 아시기 때문이다. … 그러므로 하나님이 모함을 당하시지 않도록 하자. 그들[악한惡漢들]이 그들 자신 가운데서 모든 악한 것을 발견하게 하자. 하나님 자신의 수중에는 그들의 사악함에 대한 오직 합법적인 사용만이 있다(penes ipsum, non nisi legitimum malitiae suae usum).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1.17.5.
하나님은 악조차도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하십니다. 하나님이 모함을 당하시지 않도록 해야 됩니다. 하나님이 악한 자리에 서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악을 사용하시되, 하나님이 악한 것이 아닙니다. 또 어떤 경우에 하나님은 선을 우리에게 두셨는데, 우리가 악하여 그것이 [우리의 악취를 드러내는] 것이 됩니다.
여러분, 태양 앞에 썩은 생선이 있을 때, 그 생선의 악취가 태양으로 말미암은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고기가 살아있다면 오히려 태양은 그 고기가 물속에 헤엄치는 힘을 주지 않습니까?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 죽은 생선 앞에 태양을 이야기하듯이 태양 때문에 악취가 난다라고 말하지만, 우리의 죽음 때문에 악취가 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선하게 주신 것을 우리가 악하여 우리의 악취를 드러내는 그 일에 이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제 이 부분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첫째, 하나님이 자신의 ‘계획’에 따라 ‘최고의 이유’를 가지시는데, 그 ‘계획’은 ‘은밀’하며, 그 ‘원인’들은 때로는 ‘감춰져’ 있습니다.
둘째, 하나님은 자기 ‘의’와 ‘지혜’의 ‘순수한 빛’으로 모든 것을 자기 ‘질서’ 가운데 조절하셔서 ‘올바른 목적’에 이르게 하십니다.
셋째, ‘하나님의 뜻’이 ‘가장 의로운 원인’이고, ‘의의 유일한 규범’입니다. 하나님이 그 뜻을 이루시는 ‘섭리’는 오직 올바른 것만이 흘러나오는 모든 것의 ‘지휘자’입니다. 섭리가 지휘자라는 것입니다.
넷째, ‘하나님의 섭리의 비밀’은 우리를 비추는 ‘영의 역사’로 확실하고 분명한 ‘진리의 학교’가 되고, ‘경의로운 심연’을 우리가 ‘경외’하고 ‘경배’하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섭리의 심연은 오히려 우리를 ‘예배’케 한다는 것입니다.
다섯째, 하나님의 선한 베푸심이 우리의 악함을 드러낼지라도, 그 원인은 하나님께 있지 않고 우리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를 ‘찬미’하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39강 이번 강의 결론
하나님은 자신의 계획에 대한 최고의 이유를 가지시나, 그 계획은 은밀하며 그 원인들은 때로는 감춰져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의와 지혜의 순수한 빛으로 모든 것을 자기 질서 가운데 조절하셔서 올바른 목적에 이르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뜻은 가장 의로운 원인이며 의의 유일한 규범인바, 하나님이 그 뜻을 이루시는 섭리는 오직 올바른 것만이 흘러나오는 모든 것의 지휘자입니다.
하나님의 섭리의 비밀은 우리를 비추는 영의 역사로 확실하고 분명한 진리의 학교가 되므로 그 경이로운 심연을 경외하며 경배해야 합니다.
39강 | 1.17.1-5. (1권 463-475페이지)
하나님의 뜻이
유일하고 불변하는 최상의 법
이제 17장 이곳에서는 하나님의 섭리가 어떻게 작용하고, 우리가 하나님의 섭리를 의지하고 어떻게 간구하며 살아갈 것인가? 이 부분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섭리의 적용’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성경이 무슨 목적으로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결정에 따른다고 가르치고 있는지 여기에서 간략하게 다루는 것이 유익하다.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에 관하여 세 가지를 주목해야 한다. 첫째, 그것은 지나간 시간과 다름없이 미래의 시간에도 미친다. 우리는 이를 깊이 고려해야 한다. 둘째, 그것은 모든 것의 지휘자로서 때때로 중간 매개들을 통하여, 때로는 매개들 없이, 때로는 매개들 모두에 역행하는 작용을 한다(sic moderatricem esse rerum omnium, ut nunc mediis interpositis operetur, nunc sine mediis, nunc contra omnia media). 마지막으로, 이와 더불어 섭리는 하나님의 돌보심이 인류 전체에 미친다는 사실과, 특히 그가 보다 가까이서 귀히 살피시는 교회를 다스리심에 있어서 파수꾼의 일을 감당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1.17.1.
하나님의 섭리는 과거의 일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미래에 되어질 일, 미래의 시간에도 미칩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영원하시고, 이전이나 지금이나 이후가 동일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 하나님을 통하여 하나님의 섭리가 과거, 현재, 미래에 걸쳐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섭리는 간혹은 ‘중간 매개’들이 개입합니다. 이런 것을 우리가 ‘이차적 원인’이라고 말하는데, 이러한 이차적인 원인이 있다고 해서 하나님의 섭리가 하나님의 본래의 뜻에 역행하여서 일어나는 그런 경우는 없습니다. 다만 우리에게 그렇게 보일 뿐이지만, 하나님은 그것조차도, 이차적 원인의 개입조차도 이미 작정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모든 것이 섭리 가운데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섭리는 만물에 미치고, 또 우리 개인에 미치지만,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믿는 백성들을 이 땅에, 교회에 두신 것은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의 일을 이루시고, 또 은혜를 베푸시고, 예배를 드리게 하려 하심이라는 것입니다.
비록 아버지의 부성적 호의와 자애나 심판의 엄정함이 섭리의 전체 역정(歷程) 가운데 자주 빛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의 원인들은 때로는 감춰져 있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1.17.1.
하나님은 아버지의 그 호의와 자애가 항상 만물을 통하여 나타나고, 무엇보다 믿는 백성에게 미치게 하십니다. 이와 함께 하나님의 ‘심판’의 엄정함도 드러나는 것입니다. 사랑을 베푸시되, 공의의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이죠. 그래서 ‘하나님의 섭리의 전체 역정이, 그 섭리의 모든 바퀴가 돌아가는데, 그것이 아주 빛나고 있다.’ 이렇게 칼빈은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의 섭리의 역정이 아주 빛나고 있다. 자주 빛나고 있다.’ 이렇게 말합니다.
그렇지만 그 ‘원인’들을 우리가 다 알 수는 없습니다. 해와 달의 운행을 어떻게 우리가 다 알 수 있겠습니까? 우리 자녀들이 자라가는 것을 어떻게 그 원인들을 우리가 다 알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것을 통하여서 하나님의 살아 계신 그 섭리의 모든 역정, 그 섭리의 모든 트랙, 바퀴, 하나님이 뛰어가시는 그 트랙, 그것이 다 우리에게 빛나고 있고, 자주 빛나고 있다라고 그렇게 칼빈은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자신의 계획에 대한 ‘최고의 이유’를 스스로 가지고 계십니다. 우리가 어떤 논법을 내세워 최고의 이유라고 한다고 해도 그것은 하나님의 그 ‘이유’에, ‘뜻’에, ‘원인’에 가닿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스스로 가지고 계신 것입니다. 사물의 원인들은 아무도 알 수가 없습니다. 지으신 분만 아시는 것입니다.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께서 행하신 기적이 많고 우리를 향하신 주의 생각도 많아 누구도 주와 견줄 수 없나이다 내가 널리 알려 말하고자 하나 너무 많아 그 수를 셀 수도 없나이다” 시편 40편 5절에서 기자는 노래하고 있습니다. 많은 기적들, 행하신 일들, 이것은 우리가 다 헤아릴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밀한 계획’, 그것은 우리가 미칠 수 없습니다.
주님은 이 놀라운 광경 가운데 자기 아버지의 영광이 빛나고 있음을 증언하신다[요 9:3]. 우리의 눈이 순수하다면 이를 볼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절제를 유지하는 가운데 하나님으로 하여금 우리에게 변명하시게 하지 말고 오히려 그의 은밀한 심판에 경의를 표함으로써 우리에게 있어 그의 뜻이 모든 것의 가장 의로운 원인이 되도록(ita revereamur occulta eius iudicia, ut nobis eius voluntas iustissima sit rerum omnium causa) 해야 한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1.17.1.
날 때부터 맹인된 자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은 ‘부모의 죄 때문에 그렇다’, 또 ‘이렇다, 저렇다’ 이야기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뭐라고 했습니까?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요 9:3). 궁극적인 하나님의 ‘뜻’, ‘원인’, ‘이유’, ‘목적’을 이야기하신 것입니다.
‘목적’은 이 사람을 낫게 하고 구원에 이르[게 하]고자 하심에 있었을 것입니다. 그 ‘원인’은 뭐냐? 하나님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드러내고자 하심이다. ‘아들을 통하여’ ‘아버지’가 ‘영광’을 받으시고, 이 일을 위하여. 곧, 날 때부터 맹인된 자를 두신 것은 지금 이때 예수님을 통하여 낫게 하시려고, 그리하여 영광 받으시려고 두신 것이라는 것입니다.
어찌 우리가 이 하나님의 뜻에 가닿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뜻’이 모든 것의 ‘가장 의로운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의’와 ‘지혜’의 ‘순수한 빛’으로 이런 모든 움직임을 다 주장하시고, 가장 ‘최상의 질서’ 가운데, ‘구조’ 가운데 두시고 끝내 ‘올바른 목적’을 이루십니다.
자기의 일이, 자기를 지으신 옹기장이요 세계의 조성자이신 하나님과 함께하는 데 있다는 사실을 깊이 생각하고 겸손하게 낮아져서 두려움과 경의 가운데 자기를 드리고자 힘쓰는 사람이 아니라면 아무도 하나님의 섭리를 올바르고 유익하게 측량할 수 없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1.17.2.
하나님이 만물을 지으신 ‘옹기장이’이시요, ‘조성자’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겸손히 낮아져서, 우리는 질그릇과 같아서 그 그릇을 빚은 ‘창조주 하나님’, ‘섭리주 하나님’께 모든 것을 ‘의지’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만물을 주장하실 때 ‘질서’와 ‘법칙’으로 주장하시듯이, 특별히 인생에게 큰 은혜의 섭리를 베푸실 때는 ‘규범’을 주십니다. 하나님이 ‘율법’의 그 도를 우리에게 새겨주셔서, 그 가운데 우리가 ‘하나님의 은밀한 계획’을 알게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를 거룩하게 이끄시면 우리를 ‘거룩한 백성 삼음’을 알게 하시고,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임하시면, 그 하나님의 사랑에, “너희가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먼저 사랑했다(요일 3:23; 4:11, 19, 21).”
‘하나님의 법’을 우리에게 새겨 주심은 우리가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알게 하시고, 먼저 우리가 은혜 받게 하시고, ‘우리의 죄를 사함받았으니 형제의 죄를 사하여 주라(참조. 마 6:12; 18:21-35).’ 이러한 것이 전부 다 ‘하나님의 불가해한 계획’(incomprehensibilis Dei consilium)이라는 것입니다. 만물의 법칙보다 우리 인생에게 하나님의 법을 새겨주신 것이 더 큰, 더 귀한 하나님의 섭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하나님의 법이 하늘에 있[지 않]고 바다에 있지 아니하고, 우리의 입에 있고, 우리의 마음에 있다’(신 30:11-14)고 이렇게 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하나님의 판단을 헤아리지 못할 것이요, 하나님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요. 누가 하나님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하나님의 모사가 되었느냐? 누가 꾀를 내서 하나님의 뜻을, 계획을 과연 말할 수 있겠느냐? 누가 하나님의 모사가 될 수 있겠느냐?’(롬 11:33-34)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지각이 가닿는 영역 너머 더 높은 곳에 솟아 있는 비밀들이 율법과 복음 가운데서 이해된다고 함은 실로 참되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를 낮추셔서 말씀으로 현시하신 이 비밀들을 자기에게 속한 자들이 받아들일 수 있도록 그들의 마음을 지성의 영으로 조명하시기 때문에(사 11:2; 욥 20:3), 이제 여기에는 어떤 심연도 없다. 오히려 우리가 안전하게 걸을 수 있는 길, 우리의 발을 인도하는 등(시 119:105), 생명의 빛(요 1:4; 참조. 요 8:12), 확실하고 분명한 진리의 학교가 있다. 그러나 세계를 다스리시는 경이로운 방식은 심연이라고 불림이 타당하다. 왜냐하면 그것이 우리에게는 숨겨져 있지만, 우리는 경외함으로 그것을 경배해야 하기 때문이다(At mundi gubernandi admirabilis ratio merito abyssus vocatur; quia, dum nos latet, reverenter adoranda est).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1.17.2.
우리의 지각은 우리의 너머의 하나님의 뜻을 헤아릴 수 없지만, 하나님의 섭리가, 그 비밀스러운 역사가 우리 안에, 또 만물을 통하여 펼쳐지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를 통하여서 ‘빛’ 되시고 ‘등대’시고 그 생명의 역사를 이루시는 확실하고 분명한 ‘진리의 학교’가 우리 앞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가 ‘진리의 학교’라는 것입니다.
언뜻 보기에는 끊임없이 내려가는 심연과 같이 보이지만, 그 ‘비밀스러운 하나님의 섭리의 심연’이 우리 앞에 놓여 있지만, 그래서 숨겨져 있지만, 우리는 그것을 ‘경외’하고 ‘경배’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감추어진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영원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신 29:29). 우리는 끝내 ‘나타난 것’만 압니다. ‘감추인 것’은 영원히 하나님이 아십니다.
여기서[신 29:29] 하나님은 우리가 열심을 다하여 율법을 묵상할 뿐만 아니라 자기의 은밀한 섭리를 정중하게 받아들일 것을 명령하고 계신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1.17.2.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해야 될까요? 칼빈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율법을 묵상하고 은밀한 섭리를 정중하게 받아들여라.’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욥기에서도 그 주제가 ‘끝내는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다 알 수 없으나, 우주의 생성과 우주의 운행과 그 구조를 보았을 때, “보라 이런 것들은 그의 행사의 단편일 뿐이요 우리가 그에게서 들은 것도 속삭이는 소리일 뿐이니”(욥 26:14).
하나님의 비밀스러운 경륜, 계획, 섭리는 우리가 다 알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그 심연이 우리를 끝없이 나락으로 받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게 하고, 그리고 끝내 하나님을 ’예배‘하고 ’경배‘하는 데 이르게 한다.’라고 노래하는 것이 욥기의 주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자신 안에 ‘지혜’를 가지고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지혜도 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맞추어 주신 지혜’를 가지고 하나님의 지혜의 근원까지 가닿으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유모가 아이에게 ‘옹알이’하듯이 맞추어 주셨습니다(참조. 『기독교 강요』, 1.13.1). 하나님의 섭리의 비밀도 그러한 것입니다. ‘모든 생물의 눈에 숨겨졌고’(욥 28:21), 하나님만 알려져 있다. 욥은 말했습니다. ‘사람에게 말씀하셨도다 주를 경외함이 지혜요’(욥 28:28)라고 또한 욥은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세계를 다스리는 권리가 자기에게 있다고 주장하실 때, 비록 그것이 우리에게 알려져 있지 않지만, 그의 지고한 주권을 즐거워하는 것이 우리에게 절도와 절제의 법이 되게 하자. 그리하면 그의 뜻이 우리에게 의의 유일한 규범과 모든 것에 대한 더없이 의로운 원인(unica iustitiae regula, et iustissima causa rerum omnium)이 될 것이다. … 이유들은 우리에게 숨겨져 있지만 오직 올바른 것만이 흘러나오는 모든 것의 지휘자(결정적 원리)인 섭리가 존재한다(illa moderatrix rerum omnium providentia, a qua nihil nisi rectum manat, quamvis nobis absconditae sint rationes).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1.17.2.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도 동일한 그러한 내용의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최고의 질서이고 우리는 모든 것을 알지 못하므로 오직 하나님의 선한 뜻을 헤아리고 그의 법에 따라 행할 뿐이다. 그 하나님의 섭리가 불변하는 법이다.’라고 이렇게 아우구스티누스는 이야기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최고의 유일한 규범’이요, 모든 것에 대한 더없이 ‘의로운 원인’이라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원인을 찾으려고 하지 마시고, 규범을 만들려고 하지 마시고, 하나님의 섭리의 비밀을 ‘찬미’하고, 그 하나님의 섭리의 비밀을 ‘누리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들은, 원인들은 우리에게 숨겨져 있지만, 오직 올바른 것만이, 흘러나오는 모든 것의 지휘자(moderatrix)가 섭리다.’라고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섭리에 대한 교리를 아는 것이 최고 유익한 것입니다.
경건한 사람들은 오히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성경으로부터 찾고 배워서 성령의 인도 아래 거기에 이르려고 애쓸 것이다. 그리하여 이와 함께 하나님이 부르시면 어디든지 따를 준비를 하고 있기 때문에, 이 교리[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지식보다 더 유익한 것은 어디에도 없다는 진리를 있는 그대로 나타낼 것이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1.17.3.
하나님의 섭리 이것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고백함이요, 그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심’을 고백하는 것이요, 하나님이 ‘나의 시작과 끝’이 되심을 또한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교리는 우리를 ‘진리’로 이끌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믿음’은 단지 현세에 머물지 아니하고, 앞으로 되어질 일, 나아가서는 ‘이 땅 이후의 삶’까지 ‘하나님께 맡기는’ 그러한 은혜의 길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이는[잠 16:9] 우리가 스스로 앞일을 전망하며 모든 일을 처리해 감에 있어서 하나님의 작정들로 인하여 아무 거리끼는 일이 없다손 치더라도 우리는 그의 뜻 아래 있음을 의미한다. 여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왜냐하면 우리의 삶을 자기가 세운 경계 내로 제한하신 하나님이 동시에 우리에게 우리의 삶을 돌보는 일을 맡기셨고, 그것을 보존할 방법들과 도움들을 준비하셨으며, 또한 우리에게 닥칠 위험들을 미리 알게 하시므로 우리가 부주의하여 그것들을 당하지 않도록 두루 예방하시고 여러 처방을 내리셨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의 직분이 무엇인지 분명하니, 즉 여호와가 우리에게 우리 삶을 보호하라고 맡기셨다면 우리는 그것을 보호하는 것이고, 그가 도움들을 베푸신다면 우리는 그것들을 누리는 것이고, 그가 위험들을 미리 경고하신다면 우리는 무모하게 그것들에 뛰어들지 않는 것이며, 그가 처방들을 내려 주신다면 우리는 그것들을 무시하지 않는 것이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1.17.4.
여호와의 손이 이끌지 아니하면, 그의 섭리의 역사가 없으면,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 잠언 16장 9절에서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계획’도 이미 지난 시간에 우리가 보았듯이, 계획도 내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의 경영은 우리에게 있어도, ‘응답’은 하나님께 있다라고도 했지 않습니까?
그리고 여기서는 ‘마음으로 계획할지라도, 인도하시는 분은 여호와시다.’ 이렇게 또한 말하고 있는데요, 전하고 있는데, 경영하는 것, 계획하는 것 내가 하는 것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이미 인도하시는 여호와, 그리고 응답하시는 여호와를 바라보고 우리가 마음의 경영을 하고 계획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이 말씀들을 보아야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마음의 계획조차도, 경영조차도 하나님께서 섭리 가운데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그가 여러 방편을 사용하셔서 그것에 일종의 옷을 입히시기 때문에, 항상 있는 그대로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1.17.4.
그 무엇도 운명에 속한 것이 없습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가 모든 일에 옷을 입힌다.’ 이런 표현을 씁니다. 일은 그저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가 입혀진 일’이라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입혀진 일이요, 또 모든 만물은 ‘하나님의 섭리의 옷’을 입은 그러한 것으로 이 땅에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하나님]의 지혜의 광대함은 무한해서 그는 악한 도구들을 선하고 순수하게 사용하는 방법을 아시기 때문이다. … 그러므로 하나님이 모함을 당하시지 않도록 하자. 그들[악한惡漢들]이 그들 자신 가운데서 모든 악한 것을 발견하게 하자. 하나님 자신의 수중에는 그들의 사악함에 대한 오직 합법적인 사용만이 있다(penes ipsum, non nisi legitimum malitiae suae usum).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1.17.5.
하나님은 악조차도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하십니다. 하나님이 모함을 당하시지 않도록 해야 됩니다. 하나님이 악한 자리에 서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악을 사용하시되, 하나님이 악한 것이 아닙니다. 또 어떤 경우에 하나님은 선을 우리에게 두셨는데, 우리가 악하여 그것이 [우리의 악취를 드러내는] 것이 됩니다.
여러분, 태양 앞에 썩은 생선이 있을 때, 그 생선의 악취가 태양으로 말미암은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고기가 살아있다면 오히려 태양은 그 고기가 물속에 헤엄치는 힘을 주지 않습니까?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 죽은 생선 앞에 태양을 이야기하듯이 태양 때문에 악취가 난다라고 말하지만, 우리의 죽음 때문에 악취가 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선하게 주신 것을 우리가 악하여 우리의 악취를 드러내는 그 일에 이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제 이 부분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첫째, 하나님이 자신의 ‘계획’에 따라 ‘최고의 이유’를 가지시는데, 그 ‘계획’은 ‘은밀’하며, 그 ‘원인’들은 때로는 ‘감춰져’ 있습니다.
둘째, 하나님은 자기 ‘의’와 ‘지혜’의 ‘순수한 빛’으로 모든 것을 자기 ‘질서’ 가운데 조절하셔서 ‘올바른 목적’에 이르게 하십니다.
셋째, ‘하나님의 뜻’이 ‘가장 의로운 원인’이고, ‘의의 유일한 규범’입니다. 하나님이 그 뜻을 이루시는 ‘섭리’는 오직 올바른 것만이 흘러나오는 모든 것의 ‘지휘자’입니다. 섭리가 지휘자라는 것입니다.
넷째, ‘하나님의 섭리의 비밀’은 우리를 비추는 ‘영의 역사’로 확실하고 분명한 ‘진리의 학교’가 되고, ‘경의로운 심연’을 우리가 ‘경외’하고 ‘경배’하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섭리의 심연은 오히려 우리를 ‘예배’케 한다는 것입니다.
다섯째, 하나님의 선한 베푸심이 우리의 악함을 드러낼지라도, 그 원인은 하나님께 있지 않고 우리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를 ‘찬미’하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39강 이번 강의 결론
하나님은 자신의 계획에 대한 최고의 이유를 가지시나, 그 계획은 은밀하며 그 원인들은 때로는 감춰져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의와 지혜의 순수한 빛으로 모든 것을 자기 질서 가운데 조절하셔서 올바른 목적에 이르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뜻은 가장 의로운 원인이며 의의 유일한 규범인바, 하나님이 그 뜻을 이루시는 섭리는 오직 올바른 것만이 흘러나오는 모든 것의 지휘자입니다.
하나님의 섭리의 비밀은 우리를 비추는 영의 역사로 확실하고 분명한 진리의 학교가 되므로 그 경이로운 심연을 경외하며 경배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선한 베푸심이 우리의 악함을 드러낼지라도 그 원인은 우리의 악함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