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강 [2.8.51-55] 율법 전체의 목적: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관리자
조회수 89





72 | 2.8.51-55 (2권 303-309페이지)



율법 전체의 목적: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기독교 강요』. 2.8.51.] 

     칼빈은 지금까지의 십계명을 조목별로 다루었습니다. 이제 이곳에서는 십계명의 목적이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에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율법 전체가 무엇을 지향하느냐. 제1-4계명은 하나님 사랑, 하나님에 대한 사랑, 그리고 5-10계명은 이웃 사랑, 이웃에 대한 사랑을 담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율법을 통하여서 하나님의 어떠하심과 우리를 향한 뜻을 계시하셨습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레 11:45)라고 하나님이 명령하실 때 하나님은 자신의 거룩하심을 드러내시고, 그리고 우리가 그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쫓아 우리 자신이 거룩에 힘쓰도록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자녀가 하나님의 거룩함과 의로움과 선함, 그것을 따라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사람은 스스로 아무도 그것까지 미칠 수가 없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을 바라보기는 하되 하나님의 어떠하심과 함께 그의 은혜를 구해야 됩니다. 

그것(율법 전체가 지향하는 것)은 의의 완성에 이르도록 하나님의 순결을 모범으로 삼아 사람의 삶을 형성하는 데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자기의 성품을 율법에 기술해 놓으셨으므로 그곳에 명령된 것을 무엇이든지 행위들로써 표상하는 자는 자기의 삶 가운데 이른바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nempe in iustitiae complementum: ut hominis vitam ad divinae puritatis exemplar formet. Ita enim suum ingenium Deus illic delineavit, ut, si quis factis quidquid illic praecipitur repraesentet, imaginem Dei quodammodo sit in vita expressurus).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8.51.

     하나님의 성품이 율법에 기술되어 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마땅히 무엇을 추구해야 되고 본받아야 할지, 어떤 삶을 살아야 될지[를] 알게 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어떠하심에는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도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함만 알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비를 함께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율법은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드러낼 뿐만 아니라, 율법은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 무조건적 사랑, 값없는 사랑도 드러낸다는 것이죠. 그것이 바로 율법에는 명령과 함께 약속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이런 약속을 담고 있는 계명인 것입니다. 이웃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가운데 이웃을 사랑해야 되는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시는 은혜를 전제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코 이웃 사랑의 온전함에 이를 수 없습니다. 한 계명도 은혜가 없이는 가닿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신명기 10장 12-13절에서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여호와를 경외하여 [그의]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라고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여호와의 율법을 다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순종이 마음과 뜻을 다하여 순종하는 그런 순종이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인격적 순종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마음과 뜻이 어떻게 보이느냐, 잡히느냐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 중심까지 보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마음과 뜻을 헤아리십니다. 그 가운데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율법을 주셔서 그 율법의 가르침을 통하여서 우리가 하나님과 하나 되는 자리로 나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율법은 삶의 거룩함(sanctitas vitae)을 통해 하나님과 우리가 하나로 결합하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사람을 하나님께 부착시키는(cohaerere) 것이죠. 이것이 결국 안식의 개념이죠. 이것이 결국 그리스도와 성도가 하나 됨으로 성취되는 그 역사인 것이죠. 그래서 하나님은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 6:5; 참조. 신 11:13)라는 이 사랑의 계명과 함께 이웃 사랑의 계명, [즉]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레 19:18; 참조. 마 22:37, 39)라는 계명을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이 전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 차는 것이다. 이로부터 이웃에 대한 사랑이 직접 흘러나온다(ut Dei dilectione anima nostra omni ex parte impleatur. Ex ea protinus ultro fluet proximi dilectio).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8.51.

     우리가 사랑을 논할 때, 일차적으로 우리는 이웃 사랑을 먼저 생각할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이라는 것은 우리에게 과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니까 우리는 그것에 대하여 반응하는 것이겠죠. 빛이 비치니 빛의 자녀가 되듯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임하니 우리도 그 사랑의 표현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겠죠. 그렇게 본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로서, ‘먼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였으니 너희가 서로 사랑함이 마땅하다’(참조. 요일 4:11, 19)는 그 요한일서의 말씀과 같이, 이웃 사랑은 하나님 사랑으로부터 기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에 대한 우리의 감사와 확신이 없이는 그 누구도 이웃 사랑의 온전함에 나아갈 수 없을 것입니다.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힘과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사랑의 인격적인 측면은 이웃 사랑에도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웃[에게]도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목숨을 다하여, 힘을 다하여 이웃 사랑해야 됩니다. 하나님 사랑만 그러한 것이 아닙니다. 이웃을 위하여 목숨을 주는 것이 가장 큰 사랑이라고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지 않았습니까? 그렇게 본다면 이웃 사랑도 하나님 사랑의 절대적인 은총이 선행하지 않는다면 결코 우리 안에서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영혼이 전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 찰 때, 이로부터 이웃에 대한 사랑이 직접 흘러나온다고 칼빈은 이야기했습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고 교회에서 섬기는 것, 서로 교회의 지체들이 섬기는 것도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이거늘”(딤전 1:5), 선한 양심(conscientia pura)이 뭡니까? 하나님 앞에서의 양심입니다. 믿음이 뭡니까? 거짓 없는 믿음(fides non simulata)이 뭡니까? 하나님을 믿는 참 믿음입니다. 그 가운데 우리에게 사랑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뭡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하고 의지하는 것 아닙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께 의지하고 간구하지 않는 이상 우리로부터 이웃을 향한 참 사랑이 나올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사랑이 연원하는 참 경건이 있다(hoc est…veram pietatem; inde caritatem deduci).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8.51.

     그리하여 칼빈은 “사랑이 연원하는 참 경건”이라고 이 부분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참 경건으로부터 사랑이 연원한다. 사랑의 샘은 경건에 있다.’ 경건(pietas)이 뭡니까? 바로 하나님께 붙들리고 말씀을 받고 올려드리되,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는 가운데, 믿음 가운데 여호와를 경외하는 그 인자를 간구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경건과 사랑은 함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이분법적으로 전개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진정 사랑한다면 하나님이 사랑하는 이웃을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인 것입니다.

[『기독교 강요』. 2.8.52.] 

     선지자들은 회개를 이야기할 때 하나님 사랑보다 이웃 사랑을 많이 이야기합니다. 서로 간에 믿음(fides)과 정의(iudicium)와 긍휼(misericordia)과 공평(aequitas)을 촉구하는, 그래서 선지자들은 마지막 때 ‘이웃에게 공평하라. 그리고 이웃을 불쌍히 여겨라. 공정하라. 또 참 믿음을 가져라’[라고] 이웃을 향한 계명을 많이 이야기합니다(참조. 사 1:17). 그러나 우리는 이웃 사랑의 계명은 항상 하나님에 대한 사랑, 하나님을 경외하고 예배하는 제1-4계명의 순종이 전제된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는 이웃을 사랑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계명이 이웃 사랑의 계명의 본질을 이룬다는 것입니다. 그 경건으로부터 이웃 사랑이 흘러나온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강요』. 2.8.53.] 

     하나님이 십계명의 목적을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고], 이렇게 칼빈에 의해서 파악되듯이, 그렇게 말씀하셨다면, 이 하나님의 사랑과 이웃 사랑은 결코 배치되는 것도 아니요, 하나를 얻고 하나를 잃게 되는 그러한 상황에 놓인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이 온전하다면 그것은 이미 이웃 사랑을 내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경건의 확증(pietatis approbatio)이다’라고 칼빈은 말하고 있습니다. 이게 무엇을 의미합니까?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경건함으로부터 흘러나오기 때문에, 사람을 사랑하는 모습이 경건의 확증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웃 사랑을 말할 때, 이웃 사랑은 그저 껍데기 사랑이 아닙니다, 외피적 사랑이 아닙니다, 그저 모양만 내는 형식적 사랑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은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갈 5:14)는 것입니다.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듯이 이웃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도 많은 구제를 하고, 많은 선을 행하고, 그들도 자기들의 사랑을 항상 이야기합니다. 인성의 뛰어남은 남을 사랑하는 데 있다라고 세상의 윤리에서도 가르칩니다. 그러나 하나님 보시기에 그것은 결코 사랑이 아닙니다. 우리는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하는, 그래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결국 하나님을 사랑하는 경건의 확증이 되는 그 자리에 이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 가운데 은혜를 받는 자로서 겸손해야 이웃을 사랑하지 않겠습니까? 많은 경우에 이웃을 사랑한다 하면서 내가 베푼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또 다른 교만을 낳지 않겠습니까? 내게 있는 것을 베풀면서 남을 더 없이 여기고, 남을 낮게 여기고, 남을 저 아래로 본다면, 그것이 어떻게 베풂이라는 이름으로 사랑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아무리 베풂이 있다 해도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겸손하고, 내가 낮은 가운데 여호와의 너무 큰 은혜를 입었기 때문에 마땅히 이웃에게 함께 나눈다는 그것이 초대교회 오순절 성령 사건의 의미가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서로 떡을 떼고, 서로 있는 것 없는 것[을] 나누는 그러한 일들이 성령의 역사로 나타나지 않습니까? 
     바로 사도가 성도들의 완전함은 사랑(caritas)에 자리 잡고 있다고 말하는 것도 이러한 뜻입니다. 이 사랑이 예배의 완전함이라는 것이 아니라 예배의 완전함으로부터 나오는 사랑이야말로 진정한 이웃 사랑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다(롬 13:8)라고 하는 말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남을 사랑하면 1-4계명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 아니라, 1-4계명을 지키는 자가 남을 사랑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남을 사랑하는 것이 율법을 다 이룬다는 것입니다. 왜요?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의 열매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죠, 확증이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죠. 그래서 이 말씀을 우리가 그릇되게 오해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같이 하라” 하는 이 말씀에 이루어졌다는 갈라디아서 5장 14절도 분명히 하나님 사랑을 전제하는 이웃 사랑, 그래서 이웃 사랑의 열매를 통하여서 하나님 사랑의 확증, 그래서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계명의 완성이라는 그 뜻에서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고. 우리가 “무엇이든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는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마 7:12)라고 했을 때, 우리가 은혜를 구하듯이, 우리가 하나님께 바라듯이 이웃에게도 베푸는 이 질서를 말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저 이웃과 우리 사이에 ‘give and take’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께 받고 하나님께 누리고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와 은총을 우리가 누리는, 그래서 그것을 얻기를 원하는 만큼 이웃에게 베푸는 것, 이게 계명 아닙니까, 이게 약속 있는 계명 아닙니까? 
     세상의 구제의 방식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의 구제 방식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것을 나누는 것입니다. 그것이 연보하는 것이고 그것이 헌금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초대교회에서는 서로 돕고, 서로 구제하지 않았습니까? 이 부분에서 이웃 사랑이 모든 계명의 완성이라는 것은 이웃 사랑의 계명이 하나님 사랑의 계명 위에 있다는 말이 아니라 이웃 사랑의 계명의 열매가, (“열매로 알리라”[라는 말씀처럼,]) 하나님 사랑의 계명의 확증이요, 하나님 사랑의 계명의 정확한 열매라는 것이죠. 그것을 우리에게 말해 주고 있습니다. 

율법과 선지자들은 믿음과 하나님에 대한 합법적인 예배에 속한 모든 것을 첫 자리에 두고 사랑을 그것들에 부속하는 자리에 세운다(in lege et prophetis primum locum tenere fidem et quidquid ad legitimum Dei cultum pertinet, inferiore loco subsidere dilectionem).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8.53.

     율법과 선지자들은 믿음과 하나님에 대한 합법적인 예배를 첫 자리에 두고 사랑, 이웃 사랑을 그것에 부속하는 가운데 두었습니다. 이 가운데 이웃 사랑이 모든 계명의 완성이라는 의미가 확실해지는 것입니다. 

[『기독교 강요』. 2.8.54.] 

우리의 삶은 모든 면에서 우리의 형제들에게 가장 유익할 때 하나님의 뜻과 율법의 교훈에 최고로 순응하게 될 것이다(tum optime ad Dei voluntatem legisque praescriptum compositam fore vitam nostram, quum fratribus omni ex parte fructuosissima fuerit).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8.54.

     우리는 모든 삶에 있어서 이웃을 헤아려야 됩니다. 자기애(自己愛, amor sui)에 빠져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이웃 사랑이 우리에게 당위성으로 나타나는 것은 우리가 먼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야 됩니다. 하나님을 우리를 무조건 사랑하시는 분으로 모시는 자만이 이웃을 우리의 사랑이 빚진 자로 그렇게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자기애를 버려야 됩니다. 자기 사랑을 버려야 됩니다. 자기 사랑을 버리는 것은 하나님 앞에 서야 됩니다. 하나님 앞에 서지 않고는 누구나 자기 사랑을 버릴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사랑하게 될 때, (그게 이기적이지 않고 이기심이 아니라, 내 자기애가 아니고,) 내가 나를 바라볼 때, 진짜 나를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는 그 나로서 나를 바라볼 때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입은 자로서 나를 바라볼 때 그때 우리는 나를 진정 사랑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나를 내가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 우리는 나의 사랑, 그 자기애라는 것이 편협된 자기애가 아니라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나를 사랑하는 것이 될 때, 그때 우리는 이웃을 사랑하게 됩니다. 왜요?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사랑하는 이웃을 사랑하게 됩니다. 

[『기독교 강요』. 2.8.55.] 

     이렇게 봤을 때, 이웃(proximus)은 우리가 헤아리는 이웃이 아닙니다. 우리가 판단해서 어떤 사람은 원수고 어떤 사람은 이웃이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사람은 다 이웃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사람은 원수라도 나의 이웃입니다. 그래서 그 측면에서 칼빈은 이웃을 넓게 해석합니다.

우리는 전체 인류를 향한 예외 없는 사랑이라는 한 가지 정서로 포용해야 한다(universum hominum genus, nulla exceptione, uno caritatis affectu esse amplexandum).…만약 우리가 참된 사랑의 길을 어김없이 가려면 우리는 먼저 눈을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 돌려야 한다.…하나님은 우리가 그를 향해 품고 있는 사랑이 모든 사람에게 미치게 하라고 명령하신다(qui[Deus] amorem, quem sibi deferimus, ad universos homines diffundi iubet).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8.55.

     하나님은 우리가 그를 향해 품고 있는 사랑이 모든 사람에게 미치라고 명령하십니다. 이게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이웃을 향한 사랑은 모든 사람을 향한 사랑이 되어야 된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그게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이웃의 개념이라는 것입니다. 

[결론] 

     이제 이 부분을 정리해보겠습니다. 
     첫째, 율법의 가르침은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사람이 하나님의 성품에 부합하는 거룩한 삶을 통하여서 의의 완성에 이르러 하나님께 부착되도록 하는 데 있습니다.
     둘째, 사랑은 참 경건에서 연원하고 참 경건에 부속할 뿐만 아니라 참 경건을 확증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이 율법의 완성이라고 할 때, 이 사랑은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 하나님 사랑이 본질적인 사랑인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은 우리가 본성상 빠져 있는 자기애를 버리고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품는 데 이르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가운데서 우리는 이웃을 전체적으로 사랑하는, 곧 원수라도 이웃으로 알고 사랑하는 그 사랑에 이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72강 결론


  1. 율법의 가르침의 목적은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사람이 하나님의 성품에 부합하는 거룩한 삶을 통하여 의의 완성에 이르러 하나님께 부착되도록 함에 있습니다. 
  2. 사랑은 참 경건에 연원하고 부속할 뿐만 아니라 참 경건을 확증하는바, 율법의 완성이 됩니다. 
  3. 하나님은 우리가 본성상 빠져 있는 자기애를 버리고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품는 데 이르고 그 사랑을 모든 사람에게 미치게 하도록 명령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