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위일체 하나님은 ‘무한’하십니다. 이 무한하심은 시간과 공간에 메이지 아니하심을 뜻합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영원’하십니다. 이 영원하심은 시간의 무한성을 뜻합니다. 그리고 ‘무변’하십니다. 이것은 공간에 있어서 가가 없음. 곧, 하나님의 무한성은, 시간적 무한성인 영원성과 공간적 무한성인 무변성은 하나님이 피조물 가운데 갇혀 계시지 않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시간과 공간도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물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은 동일하신 하나님이시고, ‘동일 본질’이십니다. ‘자존’하십니다. ‘무한’하십니다. ‘영’이십니다. 성자도 영원히 불변하게 계십니다. 구약시대 때, 예수 그리스도, 성자 하나님은 자신을 ‘현현’(顯現)하셨습니다. 아직 육체를 입고 성육신하셔서 이 땅에 오시지는 않았지만, 분명히 구약시대에도 성자 하나님은 자신을 드러내셨습니다. 그 드러나심의 가장 중요한 이름이 ‘말씀’(λόγος)이라고 지난 번에 보았습니다. 아직 육체로 옷 입혀지지 않은 말씀, 그러나 그 말씀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아버지의 말씀’이요, ‘영원한 지혜’로서 ‘언제나 동일한 말씀’입니다.
우리는 구약시대 성자의 현현과 구약 백성들이 성자를 믿은 그 믿음에 대해서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칼빈은 먼저 시편 45편에 주목합니다.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는 영원하며’(시 45:6). 여기 하나님은 ‘엘로힘’(אֱלֹהִים, Elohim)이라는 그 명칭입니다. ‘엘로힘’은 하나님을 뜻하는 그 이름의 ‘복수형’입니다. 이 복수형에서 칼빈은 성부, 성자, 성령이 모두 하나님이심, 동일한 하나님이심, 이 이름이 ‘삼위일체’를 뜻한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이사야가 동일하신 분 그리스도를 하나님이시라고도 소개하고, 최고의 권세로 장식된 분(illum sermonem carne indutum)이시라고도 소개하면서, 한 분 하나님의 고유한 특성을 어떤 모호함도 없이 분명하게 전하는 말씀이 있다(사 9:6). … 선지자의 계획은 탁월한 표지들로 그리스도를 장식하여 그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세우는 데 있는 것 아닌가? 그러므로 우리는 조금 전에 그가 ‘임마누엘’이라고 불리시는 이유를 살펴보았다. 바로 그 동일한 이유로 그는 여기서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불리신다. 여기에는 의심의 여지가 있을 수 없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1.13.9.
그리고 이 성자가 하나님이심을 결정적으로 드러내는 말씀으로, 이사야 9장 6절에, ‘그 이름은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기묘요, 모사요, 그리고 전능하신 하나님이요, 영존하시는 아버지요, 평강의 왕이요.’ 이 부분에 다섯 이름이 나오지 않습니까? 그중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이 부분에 특별히 주목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미 이사야서 7장 14절에서, 아하스 왕 때 하나님은 한 징조를 주시는데, ‘처녀가 잉태하여 아이를 낳으리니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이 ‘임마누엘’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 혹은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그 이름 아닙니까? 그래서 앞으로 오실 그 성자, 예수 그리스도, 그 이름이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그래서 이사야 7장 14절과 9장 6절을 이어서 ‘임마누엘’, 그리고 ‘전능하신 하나님’, 여기에서 ‘성자가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드러낸다고 본 것입니다. 구약에는 ‘오실 메시야’에 대한 예언을 많이 담고 있습니다. 이 예언은 특별히 그가 ‘성자’시요, ‘말씀’이시요,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분명히 지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서를 통하여서 오실 예수 그리스도가 ‘임마누엘’이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이심, 곧 성자의 하나님이심을 강조한 후에, 칼빈은 또 예레미야 23장 5절, 6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의 이름은 여호와 우리의 공의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이 부분에 주목합니다. ‘여호와, 우리의 공의’, 그가 ‘한 의로운 가지’로 오신다. 한 의로운 가지는 분명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칭하는 것입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아들로 오시는 그분, 곧 ‘성자의 하나님이심’을 뜻하는 것입니다. ‘여호와, 우리의 공의’, ‘여호와’라고 했습니다. ‘스스로 계신 하나님’, 그리고 ‘우리의 주가 되시는 하나님’, 그 여호와, 우리의 공의, 그분이 성자시라는 것입니다. 칼빈은 이곳에서 구약에 나오는 ‘여호와’를 포함하는 여러 이름들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줍니다.
에스겔서에 나오는 그 성전, ‘여호와 삼마’(יְהוָ֥ה׀ שָֽׁמָּה, Iehovah ibi, 여호와가 그곳에 계신다는 뜻, 겔 48:35), 여호와가 과연 거기에 계시거늘, 그리고 모세가 제단을 쌓고 이름을 붙인 ‘여호와 닛시’(יְהוָ֥ה׀ נִסִּֽי, Iehovah exaltatio mea, 여호와가 나의 깃발이라는 뜻, 출 17:15), 이러한 성전과, 그리고 ‘여호와 닛시’, 이 제단을 쌓고 붙인 이 이름이 단순히 어떤 성전이나 제단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이 여호와가 ‘오실 여호와’요, ‘우리의 구주’가 되시며, 그가 ‘우리의 의(義)’가 되신다는, 아까 여호와, 우리의 공의다.
예레미야는 이전에는 그리스도가 참 여호와이시며 그로부터 의가 흘러나온다고 증언한 반면, 이제는 하나님의 교회가 이 사실을 분명하게 의식하게 되어 그리스도 자신의 이름을 자랑할 수 있을 것이라고 선포하기 때문이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1.13.9.
그리고 예레미야 33장 16절에도 보면, ‘이 성(城)은 여호와, 우리의 의(義)다(יְהוָ֥ה׀ צִדְקֵֽנוּ, Iehovah iustitia nostra, 여호와가 우리의 대속주가 되신다는 뜻) 이름을 칭하리라.’ 여기에서 우리가 예레미야 23장 6절에, ‘그의 이름은 여호와, 우리의 공의라고 일컬음을 받으리라.’ ‘한 의로운 가지’, 한 의로운 가지가 ‘여호와, 우리의 공의’라고 일컬음을 받는데, 그 ‘여호와, 우리의 공의’라고 일컬음 받는 그 이름으로 이 성(城)의 이름을 얻으리라. 예레미야 33장 16절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 것을 볼 때, 단지 성의 이름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 삼마’나, ‘여호와 닛시’나, ‘여호와, 우리의 의(義)’, 혹은 ‘공의’, 그 성의 이름이 끝내 오실 ‘예수 그리스도’, ‘한 의로운 가지’를 지칭하는 그러한 예언의 말씀이다라고 칼빈은 이야기하면서, 여기에서 ‘그리스도’가 ‘참 여호와’시고, 그로부터 의(義)가 흘러나오며, 하나님의 교회가 이것을 통하여서 그리스도를 ‘주’라 고백하고, 그 주가 모든 의(義)를 이루었음을 증거한다라는 점을 말하고 있습니다.
구약 백성에게 성자 하나님은 자주 ‘여호와의 사자’라는 이름으로 나타나십니다. 여호와의 사자, 이 ‘사자’라는 말은 ‘천사’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단순한 천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 천사라는 이름을 붙였을까요? 칼빈은 ‘하나님의 아들을 천사라고 부르므로, 더 친밀함을 드러내었다. 더 우리에게 자기 자신을 드러내시는, 우리에게 오신 하나님을 표현한다’라고 그렇게 봅니다. 기드온과 삼손의 부모, 마노아와 그 아내에게 나타난 여호와의 사자, 이들은 그 여호와의 사자에게 제물을 바치면서 제사를 드렸어요. 그들이 과연 천사에게 드린 것일까요? 마노아와 그의 아내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보았으니 반드시 우리가 죽으리이다’(삿 13:22). ‘여호와께서 우리를 죽이려고 하셨더라면 우리 손에서 재물을 받지 아니하셨을 것이요’(삿 13:23). 분명히 여기에서 자신들이 제물을 드린 것이 여호와이시고, 그들이 여호와의 얼굴을 보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얼굴을 본 자로서 우리가 과연 살아남을 수 있겠냐?’ 하면서 이야기했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구약 여러 곳에서 ‘하나님의 사자’(מַלְאֲכֵ֣י אֱלֹהִ֔ים, 창 28:12) 혹은 ‘여호와의 사자’(מַלְאַ֨ךְ יְהֹוָ֥ה, 출 3:2)라는 이름으로 제2위 성자 하나님이 현현하신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1.13.10. 각주 312.
그리고 그 제물을 받은 하나님은 그들이 이름을 물었을 때, ‘기묘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삿 13:18). ‘기묘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신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이사야 9장 6절에 그 ‘기묘’는 우리가 아까 보았듯이 바로 ‘성자’ 아니십니까? 그래서 이 기드온과 삼손의 부모에게 나타난 ‘여호와의 사자’는 분명 ‘성자’이셨다는 것입니다.
교회의 정통 교사들은 저 으뜸가는 천사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며, 그 말씀이 이미 그때 일종의 서막과 같이 중보자의 직분을 수행하기 시작했다고 올바르고 현명하게 해석하였다. 왜냐하면 비록 그는 아직 육체로 옷 입지는 않으셨으나 성도들에게 더욱 친밀하게 다가가기 위해서 마치 중보자와 같이 내려오셨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러한 더욱 가까운 교통으로 말미암아 그에게는 천사라는 이름이 주어지게 되었다. 그 가운데서도 그는 자기 자신에게 속한 것을 유지하셨으며, 하나님으로서 형언할 수 없는 영광을 가지셨다. (“Recte autem et prudenter orthodoxi ecclesiae doctores sermonem Dei esse interpretati sunt principem illum angelum, qui iam tunc praeludio quodam fungi coepit mediatoris officio. Etsi enim nondum erat carne vestitus, descendit tamen quasi intermedius, ut familiarius ad fideles accederet. Propior igitur communicatio dedit ei angeli nomen; interea quod suum erat, retinuit, ut Deus esset ineffabilis gloriae.” 칼빈은 이로써 구약의 그리스도의 존재와 현현을 변증함으로써 세르베투스를 결정적으로 반박한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1.13.10.
이것에 대해서 역시 반(反)삼위일체론, 단일신론자였던 세르베투스(Servetus)는 이것을 정면으로 거부합니다. ‘천사가 단지 경배를 받았을 뿐이다.’라고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정통적인 우리 교회의 교부들, 신학자들은 이런 입장에 분명히 선을 긋습니다.
그 ‘으뜸가는 천사’, 이렇게 ‘천사’라고 불렸지만, 사실상은 천사가 아닌, 그 여호와의 사자는 ‘하나님의 말씀’이며, 이미 일종의 서막과 같이 ‘중보자의 직분’을 수행했고,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영원한 중보자’로서,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로서, 이미 구약시대 때 중보자의 역할을 감당했고, 그 직분을 수행했고, 아직 육체로 옷 입고 오시지는 않았지만, 이미 중보자와 같이 내려오셔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일을 알리시고, 이루심을 드러내셨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욱 친밀하고 더욱 가까운 교통이 있었기 때문에 성경은 그 하나님의 아들을 ‘천사’, ‘사자’, 곧 ‘여호와의 사자’(מַלְאַ֨ךְ יְהֹוָ֥ה, 출 3:2), ‘하나님의 사자’(מַלְאֲכֵ֣י אֱלֹהִ֔ים, 창 28:12)라고 불렀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말씀은 야곱이 얍복강에서 밤새 천사와 씨름했다는 그 말씀에 대한 호세아 선지자의 증거에도 나타납니다. 호세아 12장 5절에 보면, ‘여호와는 만군의 하나님이시라 여호와는 그를 기억하게 하는 이름이니라.’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때 여호와는 야곱이 씨름했던 ‘천사’, ‘그 사람’이라고도 불렸죠. 그 사람, 천사, 그가 다름 아닌 ‘성자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얍복강, 이 이름이 ‘브니엘’이 되지 않습니까? 브니엘은 바로 ‘하나님의 얼굴’, 그래서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또한 그리스도가 광야에서 백성의 지도자이셨음을 전하는 바울의 말씀이 있다(고전 10:4). 왜냐하면 비록 아직 비하의 때가 이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저 영원한 말씀은 자기에게 정해진 직분의 형상을 이미 제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Christum fuisse populi ducem in deserto; quia etsi nondum advenerat humiliationis tempus, figuram tamen proposuit aeternus ille sermo eius officii cui destinatus erat.” Cf. Institutio, 1.14.9.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1.13.10.
칼빈은 또한 고린도전서 10장 4절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그 부분의 말씀을 전하면서, ‘예수 그리스도가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끄셨던 지도자셨다’라고 이야기합니다. 구름기둥, 불기둥으로 앞서 가서 이끌었듯이, 그 구름기둥, 불기둥의 임재 가운데 그리스도가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을 이끄신 지도자셨다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비록 아직 겸손[비하]의 때는 이르지 않았지만, 그가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종의 형체를 가지시고 오시는 성육신에 이르지는 않았지만, 그 영원한 말씀이 이미 직분을 감당하고 계셨다. 이것을 칼빈이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스가랴 2장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그때 나타난 그 여호와의 사자, 천사, 그를 통하여서 만군의 하나님이 선포되고, 최고의 권세가 돌려지는 바로 그분(summa potentia ornatus, 최고의 권세로 장식된 분), 그래서 천사로 표현되지만 하나님이신 그분이 ‘성자, 그리스도’시다라고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실로 이사야가 “보라 이는 우리의 하나님이시라, 이는 여호와시라, 우리가 그를 기다릴 것이니 그가 우리를 구원하시리라”(적용. 사 25:9)라고 전할 때, 눈 있는 자는 이것이 자기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다시 일어나시는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는 우리의 하나님이시라, 이는 여호와시라’라고 두 차례 주어진 강조적인 표현은 이 말씀을 그리스도가 아닌 그 누구에게 돌리는 해석이 불허됨을 확정한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1.13.10.
이사야 25장 9절에서는 ‘보라 이는 우리의 하나님이시라 이는 여호와시라 우리가 그를 기다릴 것이니 그가 우리를 구원하시리라.’ 전체 맥락에서 이사야서는 오실 예수 그리스도, 그 ‘고난 받는 종’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미 이사야 25장 9절, 이 앞부분에서 그가 우리의 하나님이시고, 여호와시고, 우리의 구원자, 그를 우리는 기다릴 것이다. 그가 성자, 그리스도이심을 말했습니다.
또한 더욱 명백하고 더욱 확실한 곳에서 말라기는 당시 사람들이 찾고 있었던 통치자가 자기의 성전으로 오실 것이라고 약속한다(말 3:1). 분명 거룩한 성전은 오직 최고의 하나님 한 분께 속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지자는 그것을 그리스도께 속한 것으로 주장한다. 이로부터 그리스도는 항상 유대인들 가운데서 경배를 받으신 동일하신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이 뒤따른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1.13.10.
말라기도 또한 칼빈은 인용합니다. 말라기 3장 1절을 이야기하면서, ‘오실 그분이 친히 성전으로 오신다.’ 그렇게 이야기한 것입니다. 구약은 여러 말씀을 통하여서, 아니 전 말씀을 통하여서 예수 그리스도, 성자, 오실 메시야를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를 주목하면서 메시야는 없는 분이 오시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계신 말씀,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아들로 오시는 바로 그분이라는 것을 칼빈은 강조하면서, 구약의 성자의 존재, 현현(顯現), 그가 ‘인격’으로, ‘위격’으로, ‘위격적 존재’로 계심을 말하고 있습니다.
정리하자면,
첫째, 구약은 그리스도가 ‘사람이 되신 영원한 말씀’으로서, ‘삼위일체 하나님’, ‘엘로힘’ 되심, 그리고 ‘최고의 권세로 장식된 전능하신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가 ‘모든 의가 흘러나오는 참 여호와’이심, 그리스도가 ‘임마누엘’이심, 그리스도가 ‘평강의 왕’이심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둘째, 구약시대 성자 하나님은 영원하신 말씀으로서, 아직 사람이 되시지는 않으셨으나, 자신을 중보자로서 더욱 친밀하고 더욱 가깝게 현현(顯現)하셔서 교통하셨으므로, 여호와의 사자, 천사라고 일컬어지셨습니다. 그 여호와의 사자는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고, 야곱과 씨름하셨고, 기드온과 삼손의 부모에게 제사를 받으셨고, 그리고 스가랴를 통하여서 만군의 여호와께 속한 자들이 그 백성으로 최고의 권세를 돌려야 하는 그 하나님으로 계시되셨습니다.
이것이 구약시대에 성자께서 하나님이심을 나타내는 그러한 말씀에 증거들이었습니다.
24강 이번 강의 결론
구약은 그리스도가 사람이 되신 영원하신 말씀으로서, 삼위일체 하나님엘로힘, 최고의 권세로 장식된 전능하신 하나님, 모든 의가 흘러나오는 참 여호와, 임마누엘, 평강의 왕이심을 증언합니다.
구약시대 성자 하나님은 영원하신 말씀으로서 아직 사람이 되시지 않으셨으나 자신을 중보자로서 더욱 친밀하고 가깝게 현현하셔서 교통하셨으므로 여호와의 사자천사로 불리십니다.
: 그 사자는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고, 야곱과 씨름하셨으며, 기드온과 삼손의 부모에게 제사를 받으셨으며, 스가랴에게 만군의 여호와께 속한 자들을 자기 백성 삼는 최고의 권세가 돌려진 하나님이십니다.
24강 | 1.13.9-10. (1권 333-338페이지)
구약에 있어서
성자의 현존과 계시
삼위일체 하나님은 ‘무한’하십니다. 이 무한하심은 시간과 공간에 메이지 아니하심을 뜻합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영원’하십니다. 이 영원하심은 시간의 무한성을 뜻합니다. 그리고 ‘무변’하십니다. 이것은 공간에 있어서 가가 없음. 곧, 하나님의 무한성은, 시간적 무한성인 영원성과 공간적 무한성인 무변성은 하나님이 피조물 가운데 갇혀 계시지 않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시간과 공간도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물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은 동일하신 하나님이시고, ‘동일 본질’이십니다. ‘자존’하십니다. ‘무한’하십니다. ‘영’이십니다. 성자도 영원히 불변하게 계십니다. 구약시대 때, 예수 그리스도, 성자 하나님은 자신을 ‘현현’(顯現)하셨습니다. 아직 육체를 입고 성육신하셔서 이 땅에 오시지는 않았지만, 분명히 구약시대에도 성자 하나님은 자신을 드러내셨습니다. 그 드러나심의 가장 중요한 이름이 ‘말씀’(λόγος)이라고 지난 번에 보았습니다. 아직 육체로 옷 입혀지지 않은 말씀, 그러나 그 말씀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아버지의 말씀’이요, ‘영원한 지혜’로서 ‘언제나 동일한 말씀’입니다.
우리는 구약시대 성자의 현현과 구약 백성들이 성자를 믿은 그 믿음에 대해서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칼빈은 먼저 시편 45편에 주목합니다.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는 영원하며’(시 45:6). 여기 하나님은 ‘엘로힘’(אֱלֹהִים, Elohim)이라는 그 명칭입니다. ‘엘로힘’은 하나님을 뜻하는 그 이름의 ‘복수형’입니다. 이 복수형에서 칼빈은 성부, 성자, 성령이 모두 하나님이심, 동일한 하나님이심, 이 이름이 ‘삼위일체’를 뜻한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이사야가 동일하신 분 그리스도를 하나님이시라고도 소개하고, 최고의 권세로 장식된 분(illum sermonem carne indutum)이시라고도 소개하면서, 한 분 하나님의 고유한 특성을 어떤 모호함도 없이 분명하게 전하는 말씀이 있다(사 9:6). … 선지자의 계획은 탁월한 표지들로 그리스도를 장식하여 그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세우는 데 있는 것 아닌가? 그러므로 우리는 조금 전에 그가 ‘임마누엘’이라고 불리시는 이유를 살펴보았다. 바로 그 동일한 이유로 그는 여기서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불리신다. 여기에는 의심의 여지가 있을 수 없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1.13.9.
그리고 이 성자가 하나님이심을 결정적으로 드러내는 말씀으로, 이사야 9장 6절에, ‘그 이름은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기묘요, 모사요, 그리고 전능하신 하나님이요, 영존하시는 아버지요, 평강의 왕이요.’ 이 부분에 다섯 이름이 나오지 않습니까? 그중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이 부분에 특별히 주목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미 이사야서 7장 14절에서, 아하스 왕 때 하나님은 한 징조를 주시는데, ‘처녀가 잉태하여 아이를 낳으리니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이 ‘임마누엘’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 혹은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그 이름 아닙니까? 그래서 앞으로 오실 그 성자, 예수 그리스도, 그 이름이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그래서 이사야 7장 14절과 9장 6절을 이어서 ‘임마누엘’, 그리고 ‘전능하신 하나님’, 여기에서 ‘성자가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드러낸다고 본 것입니다. 구약에는 ‘오실 메시야’에 대한 예언을 많이 담고 있습니다. 이 예언은 특별히 그가 ‘성자’시요, ‘말씀’이시요,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분명히 지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서를 통하여서 오실 예수 그리스도가 ‘임마누엘’이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이심, 곧 성자의 하나님이심을 강조한 후에, 칼빈은 또 예레미야 23장 5절, 6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의 이름은 여호와 우리의 공의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이 부분에 주목합니다. ‘여호와, 우리의 공의’, 그가 ‘한 의로운 가지’로 오신다. 한 의로운 가지는 분명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칭하는 것입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아들로 오시는 그분, 곧 ‘성자의 하나님이심’을 뜻하는 것입니다. ‘여호와, 우리의 공의’, ‘여호와’라고 했습니다. ‘스스로 계신 하나님’, 그리고 ‘우리의 주가 되시는 하나님’, 그 여호와, 우리의 공의, 그분이 성자시라는 것입니다. 칼빈은 이곳에서 구약에 나오는 ‘여호와’를 포함하는 여러 이름들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줍니다.
에스겔서에 나오는 그 성전, ‘여호와 삼마’(יְהוָ֥ה׀ שָֽׁמָּה, Iehovah ibi, 여호와가 그곳에 계신다는 뜻, 겔 48:35), 여호와가 과연 거기에 계시거늘, 그리고 모세가 제단을 쌓고 이름을 붙인 ‘여호와 닛시’(יְהוָ֥ה׀ נִסִּֽי, Iehovah exaltatio mea, 여호와가 나의 깃발이라는 뜻, 출 17:15), 이러한 성전과, 그리고 ‘여호와 닛시’, 이 제단을 쌓고 붙인 이 이름이 단순히 어떤 성전이나 제단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이 여호와가 ‘오실 여호와’요, ‘우리의 구주’가 되시며, 그가 ‘우리의 의(義)’가 되신다는, 아까 여호와, 우리의 공의다.
예레미야는 이전에는 그리스도가 참 여호와이시며 그로부터 의가 흘러나온다고 증언한 반면, 이제는 하나님의 교회가 이 사실을 분명하게 의식하게 되어 그리스도 자신의 이름을 자랑할 수 있을 것이라고 선포하기 때문이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1.13.9.
그리고 예레미야 33장 16절에도 보면, ‘이 성(城)은 여호와, 우리의 의(義)다(יְהוָ֥ה׀ צִדְקֵֽנוּ, Iehovah iustitia nostra, 여호와가 우리의 대속주가 되신다는 뜻) 이름을 칭하리라.’ 여기에서 우리가 예레미야 23장 6절에, ‘그의 이름은 여호와, 우리의 공의라고 일컬음을 받으리라.’ ‘한 의로운 가지’, 한 의로운 가지가 ‘여호와, 우리의 공의’라고 일컬음을 받는데, 그 ‘여호와, 우리의 공의’라고 일컬음 받는 그 이름으로 이 성(城)의 이름을 얻으리라. 예레미야 33장 16절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 것을 볼 때, 단지 성의 이름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 삼마’나, ‘여호와 닛시’나, ‘여호와, 우리의 의(義)’, 혹은 ‘공의’, 그 성의 이름이 끝내 오실 ‘예수 그리스도’, ‘한 의로운 가지’를 지칭하는 그러한 예언의 말씀이다라고 칼빈은 이야기하면서, 여기에서 ‘그리스도’가 ‘참 여호와’시고, 그로부터 의(義)가 흘러나오며, 하나님의 교회가 이것을 통하여서 그리스도를 ‘주’라 고백하고, 그 주가 모든 의(義)를 이루었음을 증거한다라는 점을 말하고 있습니다.
구약 백성에게 성자 하나님은 자주 ‘여호와의 사자’라는 이름으로 나타나십니다. 여호와의 사자, 이 ‘사자’라는 말은 ‘천사’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단순한 천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 천사라는 이름을 붙였을까요? 칼빈은 ‘하나님의 아들을 천사라고 부르므로, 더 친밀함을 드러내었다. 더 우리에게 자기 자신을 드러내시는, 우리에게 오신 하나님을 표현한다’라고 그렇게 봅니다. 기드온과 삼손의 부모, 마노아와 그 아내에게 나타난 여호와의 사자, 이들은 그 여호와의 사자에게 제물을 바치면서 제사를 드렸어요. 그들이 과연 천사에게 드린 것일까요? 마노아와 그의 아내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보았으니 반드시 우리가 죽으리이다’(삿 13:22). ‘여호와께서 우리를 죽이려고 하셨더라면 우리 손에서 재물을 받지 아니하셨을 것이요’(삿 13:23). 분명히 여기에서 자신들이 제물을 드린 것이 여호와이시고, 그들이 여호와의 얼굴을 보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얼굴을 본 자로서 우리가 과연 살아남을 수 있겠냐?’ 하면서 이야기했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구약 여러 곳에서 ‘하나님의 사자’(מַלְאֲכֵ֣י אֱלֹהִ֔ים, 창 28:12) 혹은 ‘여호와의 사자’(מַלְאַ֨ךְ יְהֹוָ֥ה, 출 3:2)라는 이름으로 제2위 성자 하나님이 현현하신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1.13.10. 각주 312.
그리고 그 제물을 받은 하나님은 그들이 이름을 물었을 때, ‘기묘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삿 13:18). ‘기묘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신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이사야 9장 6절에 그 ‘기묘’는 우리가 아까 보았듯이 바로 ‘성자’ 아니십니까? 그래서 이 기드온과 삼손의 부모에게 나타난 ‘여호와의 사자’는 분명 ‘성자’이셨다는 것입니다.
교회의 정통 교사들은 저 으뜸가는 천사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며, 그 말씀이 이미 그때 일종의 서막과 같이 중보자의 직분을 수행하기 시작했다고 올바르고 현명하게 해석하였다. 왜냐하면 비록 그는 아직 육체로 옷 입지는 않으셨으나 성도들에게 더욱 친밀하게 다가가기 위해서 마치 중보자와 같이 내려오셨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러한 더욱 가까운 교통으로 말미암아 그에게는 천사라는 이름이 주어지게 되었다. 그 가운데서도 그는 자기 자신에게 속한 것을 유지하셨으며, 하나님으로서 형언할 수 없는 영광을 가지셨다. (“Recte autem et prudenter orthodoxi ecclesiae doctores sermonem Dei esse interpretati sunt principem illum angelum, qui iam tunc praeludio quodam fungi coepit mediatoris officio. Etsi enim nondum erat carne vestitus, descendit tamen quasi intermedius, ut familiarius ad fideles accederet. Propior igitur communicatio dedit ei angeli nomen; interea quod suum erat, retinuit, ut Deus esset ineffabilis gloriae.” 칼빈은 이로써 구약의 그리스도의 존재와 현현을 변증함으로써 세르베투스를 결정적으로 반박한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1.13.10.
이것에 대해서 역시 반(反)삼위일체론, 단일신론자였던 세르베투스(Servetus)는 이것을 정면으로 거부합니다. ‘천사가 단지 경배를 받았을 뿐이다.’라고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정통적인 우리 교회의 교부들, 신학자들은 이런 입장에 분명히 선을 긋습니다.
그 ‘으뜸가는 천사’, 이렇게 ‘천사’라고 불렸지만, 사실상은 천사가 아닌, 그 여호와의 사자는 ‘하나님의 말씀’이며, 이미 일종의 서막과 같이 ‘중보자의 직분’을 수행했고,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영원한 중보자’로서,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로서, 이미 구약시대 때 중보자의 역할을 감당했고, 그 직분을 수행했고, 아직 육체로 옷 입고 오시지는 않았지만, 이미 중보자와 같이 내려오셔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일을 알리시고, 이루심을 드러내셨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욱 친밀하고 더욱 가까운 교통이 있었기 때문에 성경은 그 하나님의 아들을 ‘천사’, ‘사자’, 곧 ‘여호와의 사자’(מַלְאַ֨ךְ יְהֹוָ֥ה, 출 3:2), ‘하나님의 사자’(מַלְאֲכֵ֣י אֱלֹהִ֔ים, 창 28:12)라고 불렀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말씀은 야곱이 얍복강에서 밤새 천사와 씨름했다는 그 말씀에 대한 호세아 선지자의 증거에도 나타납니다. 호세아 12장 5절에 보면, ‘여호와는 만군의 하나님이시라 여호와는 그를 기억하게 하는 이름이니라.’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때 여호와는 야곱이 씨름했던 ‘천사’, ‘그 사람’이라고도 불렸죠. 그 사람, 천사, 그가 다름 아닌 ‘성자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얍복강, 이 이름이 ‘브니엘’이 되지 않습니까? 브니엘은 바로 ‘하나님의 얼굴’, 그래서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또한 그리스도가 광야에서 백성의 지도자이셨음을 전하는 바울의 말씀이 있다(고전 10:4). 왜냐하면 비록 아직 비하의 때가 이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저 영원한 말씀은 자기에게 정해진 직분의 형상을 이미 제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Christum fuisse populi ducem in deserto; quia etsi nondum advenerat humiliationis tempus, figuram tamen proposuit aeternus ille sermo eius officii cui destinatus erat.” Cf. Institutio, 1.14.9.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1.13.10.
칼빈은 또한 고린도전서 10장 4절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그 부분의 말씀을 전하면서, ‘예수 그리스도가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끄셨던 지도자셨다’라고 이야기합니다. 구름기둥, 불기둥으로 앞서 가서 이끌었듯이, 그 구름기둥, 불기둥의 임재 가운데 그리스도가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을 이끄신 지도자셨다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비록 아직 겸손[비하]의 때는 이르지 않았지만, 그가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종의 형체를 가지시고 오시는 성육신에 이르지는 않았지만, 그 영원한 말씀이 이미 직분을 감당하고 계셨다. 이것을 칼빈이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스가랴 2장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그때 나타난 그 여호와의 사자, 천사, 그를 통하여서 만군의 하나님이 선포되고, 최고의 권세가 돌려지는 바로 그분(summa potentia ornatus, 최고의 권세로 장식된 분), 그래서 천사로 표현되지만 하나님이신 그분이 ‘성자, 그리스도’시다라고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실로 이사야가 “보라 이는 우리의 하나님이시라, 이는 여호와시라, 우리가 그를 기다릴 것이니 그가 우리를 구원하시리라”(적용. 사 25:9)라고 전할 때, 눈 있는 자는 이것이 자기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다시 일어나시는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는 우리의 하나님이시라, 이는 여호와시라’라고 두 차례 주어진 강조적인 표현은 이 말씀을 그리스도가 아닌 그 누구에게 돌리는 해석이 불허됨을 확정한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1.13.10.
이사야 25장 9절에서는 ‘보라 이는 우리의 하나님이시라 이는 여호와시라 우리가 그를 기다릴 것이니 그가 우리를 구원하시리라.’ 전체 맥락에서 이사야서는 오실 예수 그리스도, 그 ‘고난 받는 종’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미 이사야 25장 9절, 이 앞부분에서 그가 우리의 하나님이시고, 여호와시고, 우리의 구원자, 그를 우리는 기다릴 것이다. 그가 성자, 그리스도이심을 말했습니다.
또한 더욱 명백하고 더욱 확실한 곳에서 말라기는 당시 사람들이 찾고 있었던 통치자가 자기의 성전으로 오실 것이라고 약속한다(말 3:1). 분명 거룩한 성전은 오직 최고의 하나님 한 분께 속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지자는 그것을 그리스도께 속한 것으로 주장한다. 이로부터 그리스도는 항상 유대인들 가운데서 경배를 받으신 동일하신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이 뒤따른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1.13.10.
말라기도 또한 칼빈은 인용합니다. 말라기 3장 1절을 이야기하면서, ‘오실 그분이 친히 성전으로 오신다.’ 그렇게 이야기한 것입니다. 구약은 여러 말씀을 통하여서, 아니 전 말씀을 통하여서 예수 그리스도, 성자, 오실 메시야를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를 주목하면서 메시야는 없는 분이 오시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계신 말씀,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아들로 오시는 바로 그분이라는 것을 칼빈은 강조하면서, 구약의 성자의 존재, 현현(顯現), 그가 ‘인격’으로, ‘위격’으로, ‘위격적 존재’로 계심을 말하고 있습니다.
정리하자면,
첫째, 구약은 그리스도가 ‘사람이 되신 영원한 말씀’으로서, ‘삼위일체 하나님’, ‘엘로힘’ 되심, 그리고 ‘최고의 권세로 장식된 전능하신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가 ‘모든 의가 흘러나오는 참 여호와’이심, 그리스도가 ‘임마누엘’이심, 그리스도가 ‘평강의 왕’이심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둘째, 구약시대 성자 하나님은 영원하신 말씀으로서, 아직 사람이 되시지는 않으셨으나, 자신을 중보자로서 더욱 친밀하고 더욱 가깝게 현현(顯現)하셔서 교통하셨으므로, 여호와의 사자, 천사라고 일컬어지셨습니다. 그 여호와의 사자는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고, 야곱과 씨름하셨고, 기드온과 삼손의 부모에게 제사를 받으셨고, 그리고 스가랴를 통하여서 만군의 여호와께 속한 자들이 그 백성으로 최고의 권세를 돌려야 하는 그 하나님으로 계시되셨습니다.
이것이 구약시대에 성자께서 하나님이심을 나타내는 그러한 말씀에 증거들이었습니다.
24강 이번 강의 결론
구약은 그리스도가 사람이 되신 영원하신 말씀으로서, 삼위일체 하나님엘로힘, 최고의 권세로 장식된 전능하신 하나님, 모든 의가 흘러나오는 참 여호와, 임마누엘, 평강의 왕이심을 증언합니다.
구약시대 성자 하나님은 영원하신 말씀으로서 아직 사람이 되시지 않으셨으나 자신을 중보자로서 더욱 친밀하고 가깝게 현현하셔서 교통하셨으므로 여호와의 사자천사로 불리십니다.
: 그 사자는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고, 야곱과 씨름하셨으며, 기드온과 삼손의 부모에게 제사를 받으셨으며, 스가랴에게 만군의 여호와께 속한 자들을 자기 백성 삼는 최고의 권세가 돌려진 하나님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