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강 [1.13.7-8] 하나님의 말씀이신 성자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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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 1.13.7-8. (1권 330-333페이지)



하나님의 말씀이신
성자 하나님



     지금까지 칼빈은 삼위일체론 전반에 대한 서론적 언급을 했습니다. 정통적이고 순수한 삼위일체 교리는 ‘한 분 하나님이 세 위격으로 계심’을 이야기합니다. 한 존재, 한 본질, 한 실체, 그 가운데 성부, 성자, 성령, 세 위격적 존재, 곧 세 인격, 위격이 계시다는 것입니다. 



deitas”는 “하나님이심”을 뜻하는 말로서 엄밀하게는 하나님의 본성을 칭하는 ‘divinitas’와 구별된다. 다만 교부들이나 칼케돈 신경을 비롯한 초대 교회의 신경들에서 보듯이, 이 둘은 구별 없이 사용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칼빈은 이 둘을 구별해서 사용하는 경향이 있으나 언제나 그렇지는 않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1.13.7. 각주 295.


     이제 이곳에서 칼빈은 성자와 성령의 ‘신격’에 대한 논의를 이어갑니다. 이미 언급했듯이, ‘신격’(deitas, deity)이라 함은 ‘하나님이심’을 뜻합니다. 성부도 하나님이시고, 성자도 하나님이시고, 성령도 하나님이신데, 그 ‘하나님이심’을 우리는 ‘신격이다’라고 이렇게 부르는 것입니다. 결국 삼위일체론은 ‘신격’을 다루는 것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의 신격. 

     그런데 성부의 신격에 대해서는 의심할 바 없습니다. 이견이 없습니다. 그러나 성자의 신격과 성령의 신격에 대해서는 여러 이단과 이설이 많기 때문에 이제 삼위일체론에서는 성자의 신격, 그리고 성령의 신격, 이 두 가지를 주요한 주제로 삼는 것입니다.


칼빈은 여기에서 성자의 신격을 논하면서 그가 “하나님의 말씀”(verbum Dei)이시며 그 “말씀의 영”(spiritus sermonis)이 “그리스도의 영”(spiritus Christi)으로서 창조와 계시의 “중보자”(intermedium)가 되심을 천명한다. 칼빈은 ‘말씀’(λόγος)을 라틴어 ‘verbum’과 ‘sermo’로 구별 없이 번역한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1.13.7. 각주 296.


     성자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가 사람의 아들이 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아들이 되셨으되,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그치지 아니하시고 사람의 아들이 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자 사람의 아들로서’ 모든 중보를 이루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영원하십니다. 그 아들의 영원하심, 그리고 영원히 아버지로부터 나심, 이러한 아들의 위격적 특성을 가장 잘 드러내는 이름이 ‘말씀’(λόγος)입니다. 그래서 성자는 ‘하나님의 말씀’, ‘아버지의 말씀’, 이렇게 칭해집니다. 제2위 성자 하나님은 하나님이시므로 성부와 성령과 ‘동일한 본질’을 지니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그 말씀은 영원하고 본질적인 아버지의 말씀입니다(ipse aeternus et essentialis est patris sermo, 아들 자신이 영원하고 본질적인 아버지의 말씀이다). 아들의 말씀은 아버지의 말씀이고, 그리하여 아버지와 아들은 본질에 있어서 동일하시나(동일 본질), 위격에 있어서, 인격에 있어서, 위격적 존재에 있어서 구별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영원함은 그 하나님의 말씀이 ‘영원한 지혜’가 되심을 또한 드러냅니다. ‘지혜’라는 것은 ‘생명의 지식’입니다. 생명이 말씀 안에 있고, 그 말씀이 사람들의 빛인데, 요한복음 1장 4절에, 그 ‘생명의 말씀’, 그 ‘생명의 말씀’이 지혜인 것입니다. 그래서 영원하고 본질적인 아버지의 말씀이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 그가 영원한 지혜가 되시고, 이 지혜로부터 모든 신적인 명령과 예언이 나오는 것입니다. 성경의 모든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 그리고 섭리 경륜은 이 영원한 지혜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영원한 지혜가 구약의 선지자들을 통하여서 또한 선포된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1장 11절, 그리고 베드로후서 1장 21절, 이 부분을 통하여 볼 때, 구약시대 때 선지자들이 ‘그리스도의 영’(spiritus Christi)으로 말했다라고 했는데, 이 그리스도의 영이 영원하신 하나님의 말씀, 그 ‘영원한 지혜의 영’이라는 것입니다. 말씀은 우리에게 임하여서 이제 ‘중보자’(intermedium)로서 우리를 위한 모든 구원을 이루셨지만, 이미 창세전에 존재하셨습니다. 그래서 말씀이 창세전에 계시되, 성자로서 계심으로 ‘영원히 아버지로부터 그 말씀이 나셨다’라고 우리가 말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봤을 때, 구약시대 백성이 ‘그리스도 영’으로 이야기했다고 전하는 그 베드로 사도의 말씀은 그 그리스도의 영이 곧 ‘말씀의 영’이고, 성자시고, 그가 영원히 계시며, 구약이든 신약이든 ‘말씀의 영’으로 그렇게 말씀하셨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성자는 ‘말씀의 영’(spiritus sermonis)으로서 ‘참 하나님’이십니다. 아버지의 말씀으로서 아들의 말씀이고, 그 아버지와 아들은 동일하시므로(동일 본질) 아버지와 아들은 말씀으로 동일하신 분입니다. 그래서 ‘아들의 말씀’, ‘아버지의 말씀’,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렇게 동일하게 표현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친히 아들을 ‘중보자’로 세우셔서 하나님 자신의 말씀을 아들을 통하여 또한 우리가 듣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통하여, 그 말씀으로 만물을 지으시고, 그 말씀으로 만물을 운행하시고 붙드십니다. 구약시대 때 선지자들과 다름없이, 신약시대의 사도들도 이 말씀으로 말씀을 전하고, 또 그들이 이 말씀으로 천지가 지어졌고, 천지가 운행된다는 것, 섭리 가운데 하나님이 천지를 붙드신다는, 히브리서 1장 2-3절, 창조와 섭리가 다 말씀으로 말미암은 것을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잠언 8장 22절에는 하나님이 영원히 창세전에 ‘지혜’를 가지셨다고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영원히 하나님이 가지신 지혜, 이 잠언 8장 22절에 이 지혜가 요한복음 1장 1절에 말씀, 곧 ‘로고스’인 것입니다. 이 말씀이 우리에게 전해지는 ‘아버지의 말씀’, ‘아들의 말씀’,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이 전해진 즉, 또 그 말씀대로 역사합니다. 말씀이 말씀으로 우리에게 전해지고, 또 말씀이 친히 역사합니다. 이 말씀이 아버지와 함께 일하십니다.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요한복음 5장 17절에서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일하심에 있어서 말씀이 역할을 감당하셨으므로 그 일이 하나님과 말씀 모두에 속한 사역(utriusque communis…operatio)이 된다고 하나님이 말씀하셨다는 결론에 이른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1.13.7.


     칼빈은 이 부분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일하심에 있어서 말씀이 역할을 감당하셨기 때문에 그 일이 하나님과 말씀 모두에 속한 사역(utriusque communis…operatio)이 된다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말씀에 속한 모두의 사역이 된다.’ 이것을 달리 표현한다면, 성부와 성자가 함께 일하신다, 그 성부와 성자가 ‘동일하신 하나님’(동일 본질)이시라는 것입니다. 


요한은 이를 그 무엇보다 더욱 명확하게 전하고 있는데, 말씀이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하나님이시고, 동시에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만물의 원인이었다고 선포하였다. 참으로 요한은 완전하고 영원한 본질을(solidam permanentemque …essentiam) 말씀에 부여하고 고유한 어떤 것을 그것에 돌린다. 그리고 하나님이 어떻게 말씀하심으로 천지의 창조주가 되셨는지를 선명하게 보여 준다. 따라서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모든 계시를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말로 식별하는 것이 올바르기 때문에, 그 본질적인 말씀을 모든 신적인 명령의 원천으로(oraculorum omnium scaturiginem) 여겨 최고의 자리에 두는 것이 마땅하다. 이 말씀은 어떤 변화에도 구애받지 않으신 채 영원히 한 분 그리고 동일하신 분으로 하나님과 함께 머무시고, 그 자신이 하나님이시다(요 1:1-3).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1.13.7.


     말씀은 단지 인생의 언어가 아닙니다. 정보만 담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전달 매체가 아닙니다. ‘말씀은 인격입니다. 말씀은 살아있습니다. 말씀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리하여 말씀은 ‘영원’하고, 또 말씀은 ‘완전’합니다. 이 ‘완전하고 영원한 본질’(solidam permanentemque …essentiam)이 ‘말씀’에 부여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말씀이 우리에게 임할 때, 그 말씀을 우리가 영접할 때, 그 말씀을 빛으로 우리가 영접할 때, 요한복음 1장에 나오지만, 그 말씀을 빛으로 영접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영생에 이르는 길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불변’합니다. 그 어떤 변화에도 구애받지 아니하십니다. 그리고 한 분 동일하신 하나님으로 계십니다. ‘말씀은 성자시고, 말씀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리하여 성부와 함께 머무시는 하나님, 곧 그 자신이 하나님이십니다. 

     이 부분을 칼빈은 특별히 강조하고 있습니다. 말씀이 영원한 아버지의 말씀으로, 곧 영원한 지혜로 생명의 역사를 이루고, 그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시고, 함께 머무시고, 함께 일하시고, 그리하여 그 말씀, 그 자신이 하나님이신, 그 말씀이 ‘성자’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저 언어로 우리에게 말씀하실 뿐, 그 말씀은 어떤 위격이나, 인격이나, 위격적 존재가 될 수 없다라고 말하는 그러한 이단들은 잘못된 견해를 표방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칼빈 시대 때 세르베투스는 그렇게 본 것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실 때 비로소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말씀은 그때 작용한, 그러한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그 무엇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말씀을 성자라고 그렇게 부를 수는 있지만, 성자는 결코 영원하지 않고 성부와 동일 본질이지 않다. 이렇게 하여서 삼위일체론을 거부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야고보서 1장 17절에서 전하듯이,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십니다. 하나님은 영원히 계시며, 변함이 없으시며, 그리고 절대적으로 계십니다. 무엇을 비추어서 계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다. 움직이지만 움직이지 않으시고, 움직이지 않지만 움직이시는, 그러므로 시간과 공간에 매임이 없으신, 그러한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신 분이십니다. 그는 항상 동일하신 하나님이시고, 그 하나님이 창조주시고, 그 하나님이 말씀과 함께 만물을 지으셨습니다. 말씀으로 지으셨고, 말씀과 함께 지으셨습니다. 영원히 하나님은 한 분으로 계시고, 그 말씀은 시작이 없기 때문에 그러한 것입니다. 


어떤 시점에 무엇이 드러나기 시작한다는 이유로 결코 그것이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다고 결론 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참으로 나는 이와는 아주 다르게 결론을 내린다.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창 1:3) 말씀하셨던 바로 그 순간에 말씀의 능력이 나타났고 존재했으므로 말씀 자신은 훨씬 이전에 존재했었다(quum in ipso momento quo dixit Deus: fiat lux, sermonis virtus emerserit et exstiterit, ipsum multo ante fuisse). 만약 얼마나 오래 전에 그가 계셨는지 묻는 자가 있더라도 그는 아무 시작도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1.13.8.


     창세기 1장 3절에,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라고 그 빛에 창조의 명령을 하셨을 때, 말씀은 그 순간에 비로소 존재한 것이 아닙니다. 영원히 계신 말씀이, 그 말씀이 말씀되심으로, 그리고 그 말씀으로 말미암아, 그 말씀을 통하여, 그 말씀 가운데 만물이 조성되고 지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창조는 말씀의 능력이 나타난 것입니다. 그 말씀이 영원히 계심을 드러내는 것이 창조지, 창조 때 비로소 말씀이 존재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만물은 하나님을 드러내는, 그 능력과 신성을 드러내는, 그 ‘일반계시’, 우리가 배웠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만물은 성자의 영광, 말씀의 영광, 말씀의 의미, 존귀, 그것을 또한 드러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피조물에 갇히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도 지으십니다. 성자가 시간과 공간 가운데 비로소 어느 때, 어느 곳에 처음 있게 되셨다면, 그 성자는 결코 하나님일 수 없을 것입니다. 요한복음 17장 5절에는, ‘창세전에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서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라고 주님이 기도하시는 그 말씀을 담고 있습니다. 

     창세전에 성자와 성부는 함께 ‘영광’ 가운데 계셨습니다. 창세, 만물을 짓기 전에, 시간이 있기 전에 성자 하나님은 영광 가운데 계셨던 것입니다. 그 하나님께 영원한 영광을 돌려야 되는 것입니다. 그가 말씀으로 계셨고, 말씀으로 계신 그분이 말씀으로 천지를 지으신 그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시간의 간격의 경계 가운데 놓여 있지 않습니다. 그는 태초에 말씀과 함께 계셨습니다. 여기 ‘태초’는 태초에 비로소 계셨다는 태초가 아니라, 태초에 이미 말씀이 계셨음을 우리에게 이야기해 줍니다. 요한복음 1장 1절, 그리고 3절에서 반복해서 이 사실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말씀은 시간을 초월해서 존재합니다. 


우리는 말씀이 시간의 시작을 초월해서 하나님의 의해 잉태되셨으며, 하나님 자신과 함께 영원히 거하셨다는 사실로부터 말씀의 영원성과 참 본질과 신성이 모두 증명되었다고 확정한다(Constituimus ergo rursum, sermonem extra temporis initium a Deo conceptum, apud ipsum perpetuo resedisse; unde et aeternitas et vera essentia et divinitas eius comprobatur).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1.13.8.


     칼빈은 이곳에서 재미있는 표현을 씁니다. ‘시간의 시작을 초월해서 하나님에 의해서 잉태되었다.’ 이런 표현을 씁니다. ‘잉태 되었다’는 말은 어떤 육신적인, 생리적인 잉태가 아니라, 성자는 영원히 성부로부터 나셨고, 그 나셨음을 강조하는 표현이라고 볼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은 영원히 계시고, 시간이 있기 전에 계시고, 시간을 짓기 전에 계시고, 그 말씀이 영원히 잉태되시고, 나시고, 결코 생리적인 표현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 말씀이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거하고, 그러므로 ‘성자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위격적 존재는 그의 영원성과 참 본질과 신성을 우리에게 증명하고 확증한다’라고 칼빈은 이 부분의 논의를 결론 짓고 있습니다. 


     이제 요약해 본다면, 

     첫째로, 성자는 창세전에 아버지로부터 나신 영원하고 본질적인 아버지의 말씀으로서, 모든 신적인 명령과 예언의 원천이 되시는 그 영원한 지혜시다. 

     둘째, 성자는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계시고, 함께 머무시고, 함께 영화로우시며, 함께 일하시는 한 분 동일하신 분으로서, 그 자신이 영원성과 참 본질과 신성을 지니신 하나님이시다. 

     셋째, 하나님의 일하심은 하나님과 말씀 모두에 속한 사역이며, 하나님은 만물을 말씀으로 창조하시고 운행하시므로, 말씀은 창세전부터 ‘하나님’이시며 ‘중보자’이십니다. 

     넷째, 하나님의 선지자는 ‘하나님의 영’으로 전하는 바, 그 영이 ‘말씀의 영’, 곧 ‘그리스도의 영’이시므로, 그리스도는 ‘참 말씀’으로서 ‘참 하나님’ 되십니다.




23강 이번 강의 결론


  1. 성자는 창세전에 아버지로부터 나신, 영원하고 본질적인 아버지의 말씀으로서, 모든 신적인 명령과 예언의 원천이 되시는 영원한 지혜이십니다.
  2. 성자는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계시고, 함께 머무시며, 함께 영화로우시며, 함께 일하시는, 한 분 동일하신 분으로서, 그 자신이 영원성과 참 본질과 신성을 지니신 하나님이십니다.
  3. 하나님의 일하심은 하나님과 말씀 모두에 속한 사역이며, 하나님은 말씀으로 만물을 창조하시고 운행하시므로, 말씀은 창세전부터 하나님이시자 중보자이십니다.
  4. 하나님의 선지자는 하나님의 영으로 전하는바, 그 영이 말씀의 영, 즉 그리스도의 영이시므로, 그리스도는 말씀으로서 참 하나님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