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장에서는 우상 숭배에 대한, ‘그것이 예배와 어떻게 차별되는가?’ 또 ‘우상 숭배와 예배가 양립할 수 없다.’ 이것을 다시 한번 더 강조하는 부분입니다. 왜 우상 숭배가 이렇게 중요하게 다루어질까요? 칼빈은 『기독교 강요』 2권 8장에서 십계명을 다루면서 제2계명에서 우상 숭배에 대해서 꽤 자세히 논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그 모세의 마지막 오경 네 권에 대한 주석, 칼빈은 이 부분을 한 권의 주석으로 쓰거든요. 여기에서 제2계명을 다루면서 거의 200-300페이지 정도로 우상을 자세히 다루고 있습니다.
우상은, 오늘날 우리에게는 ‘우상이다’ 이러면, 그저 뭐 로마 카톨릭, 동방정교회, 무엇이 걸려 있다, 무엇을 흔든다, 향을 피운다, 이런 것들을 우리가 많이 생각하지만, 중세 시대 때는, 이미 우리가 보았듯이, ‘형상들은 무식한 사람들의 책들이다.’ 이것이 교리입니다. 그 당시에는 라틴어가 거룩한 언어로 여겨져서, 중세 때는, 성경 언어인 히브리어와 헬라어조차도 라틴어에 비해서는 그 거룩함이 떨어진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일반 서민들은 라틴어를 배우지 못하지 않습니까? 그저 문자를 익히는 사람도 상대적으로 많지 않았겠지만, 자국어를 쓰는 사람도 드문 그런 때에 라틴어를 읽고 쓰고, 또 듣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겠습니까? 그러면 빨리 교회가 누구라도 듣게 끔, 우리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있듯이, ‘성경은 자국의 언어로 번역하여서 누구라도 알아듣기 쉽게, 그리고 읽을 수 있게 끔 그렇게 해야 된다.’ 라고 이렇게 명문화했거든요(참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8). 그것이 종교개혁의 정신이거든요. 그런데 로마 카톨릭은 그렇게 하지 않고, 이미 사제들은 특권화되고 계급화되어서, 그들은 특별한 자질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수 있는 능력이 있으나, 일반 성도들은 그저 형상들 보고, 만지고, 그렇게 신앙생활하고, 죄를 지었으면 사제들 찾아가서 면전에 고해(告解)하고, 또 더 잘못한 게 있으면 어떤 밭을 팔든 논을 팔든 갚고, 이런 식의 신앙생활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우상 숭배가 이제 종교 개혁 때는 너무나 중요한 논제가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칼빈은 ‘우상 숭배가 미신(superstitio)의 산물이자 도구다.’ 사실 하나님을 섬긴다 하면서 교회 내에 상을 갖다 놓는데요. 제가 이집트, 애굽의 한 교회에 가보니까 기둥이 이렇게 열두 기둥이 있어요. 그리고 거기 안에는 이런 자리들이 한 40-50개 놓여 있는데, 그 기둥 바깥에 벽에 여러 그림이 걸려 있어요. 그래서 제가 안내하는 사람에게 물어봤더니, 말씀을 들을 줄 아는 사람은 저기 안에 앉고, 말씀을 들을 줄 모르는 사람은 그 기둥을 한 바퀴 돌고 그렇게 그냥 집에 간다는 거예요. 자, 이것이 어찌 하나님을 예배하는 예배라고 볼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어떤 사변적 지식도 아닙니다. 우리가 ‘성경의 단순성’에 대해서 말했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의 감화로, 또 조명으로 누구나 그 말씀을 받아들일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성경의 단순성’ 아니었습니까? 하나님의 한 분이심과 또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그 지식,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그 은혜, 이것이 누구에게나 주어진다는 것 아닙니까?
지금 나는, 성경이 하나님은 한 분이시라고 주장할 때마다 … 그의 신성에 속한 것은 어떤 것도 다른 것에 양도될 수 없다고 명령하기 위함이라는 사실을 간단하게 반복하고자 한다. 이로부터 ‘순수한 종교’는 미신과 다르다는 사실이 또한 명백해진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1.12.1.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은 유일하신 분이요, 하나님의 신성은 그 어디에도 양도 되지 않고, 하나님의 신성은 어떤 사물에도 새겨지거나 형상화 될 수 없다는 것, 하나님은 보이지 아니하시는, 스스로 계시는 ‘만유의 만유’시라는 것, 그것을 우리가 ‘아멘’ 할 때 그것이 순수한 종교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다 하고, 예배한다 하고, 섬긴다 하면서, 교회 안에 만든 것들은 이미 순수한 종교를 떠난 미신에서 나온 것이라는 것입니다.
통상 ‘경건’(pietas)이라는 말로 번역되는 ‘εὐσέβεια’는 ‘예배’(cultus)를 본질적인 요소로 삼는데, ‘종교’(religio)라는 뜻을 함의한다. 이는 ‘pietas’와 ‘religio’가 ‘εὐσέβεια’라는 어의(語義)를 공유하고 있음에 대한 방증이 된다. Cf. Institutio, 1.2.1-2.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1.12.1. 각주 233.
헬라어 ‘유세베이아’(εὐσέβεια)는 ‘경건’(pietas)으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이 경건은 이미 우리가 앞에서, 특별히 1권 2장에서 보았기 때문에, 이곳에서 다시 보지 않겠습니다마는, 경건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대로 예배를 올려드리는, 그 말씀이 선행하는 예배거든요. 하나님의 뜻을 좇고, 그래서 레위기에 보면, 가장 먼저 ‘제사법’을 두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제사하는, 또 ‘절기법’을 두지 않습니까? 때를 쫓아 하나님께 감사하고 화목하고 서원하고, 이러한 모든 것을 하나님이 규정하지 않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우상을 섬기는 것은 경건에서 위배되는 것이요, 경건은 커녕 오히려 하나님을 거역하고 반역한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한 분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만유의 만유이시기 때문에 그 어디에도 갇혀 계시지 아니하십니다. 하나님을 형상화하는 자들은 결코 하나님을 예배할 수 없고, 하나님을 즐겁게 누릴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을 형상화하고 우상을 섬기는 것은 이미 악한 영에 굴복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자유와 거리가 먼 것입니다.
우리는 ‘거듭난 자’로서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거룩한 영’으로, 이제는 죄의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서, ‘의의 종’으로서, ‘예배의 종’으로서, 진정 ‘기쁜 마음’으로, ‘감사의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상을 섬기는 것은 바로 하나님을 거역하는, 그래서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이라고까지 말씀하신 것입니다(출 20:5; 34:14; 신 4:24; 5:9; 수 24:19). ‘나 외에는 다른 것을 네게 두지 말라.’(출 20:3)라고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율법에 두 가지를 포함시키신다. 첫째, 그는 신자들이 그들 자신을 위한 유일한 율법수여자가 되시는 자기에게 헌신하도록 하신다. 둘째, 그는 자기 자신의 의지에 따라 자기가 올바르게 예배를 받으실 수 있도록 규범을 제정하신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1.12.1.
하나님이 율법을 수여하셨습니다. 그래서 제1에서 4계명은 ‘경건의 계명’으로, ‘예배의 계명’으로 주셨고, 제5에서 10계명은 ‘이웃사랑의 계명’으로 주셨습니다. 이 ‘말씀을 좇는 예배’, ‘말씀에 따르는 예배’, 그것이 ‘하나님의 의지에 따르고, 뜻에 따르는 올바른 예배’입니다. 하나님은 ‘예배자’도 규정하시고, ‘예배 방식’도 규정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에 의해서 택함 받았습니다. 이제는 만인이 예배자입니다. 그리고 만인이 하나님의 뜻 가운데 예배를 드려야 됩니다. 그는 ‘성령의 감동, 감화’로, ‘말씀의 진리’대로, 곧 ‘영과 진리’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야 됩니다(요 4:24). 그러므로 우상 숭배는 미신이요, 죽은 것을, 은, 금을 따르는 우매한 짓이요, 하나님의 영광을 소멸시키고, 하나님의 영광을 교활하게 쪼개고, 하나님을 흩트리고, 끝내 하나님을 부인하는 그 패역한 행위인 것입니다. 하나님 외에 성자(聖者)들을 높이거나, 하나님 외에 어떤 것을 섬기는 것, 그것이 바로 우상 숭배입니다. 하나님의 자리에 다른 것을 두고, 하나님 외의 것에 예배를 드리고, 기도를 드리고, 찬미를 드린다면, 그것이 다 우상 숭배입니다.
예배라는 이름으로 하든지, 섬김이라는 이름으로 하든지, 로마 카톨릭은 아주 교묘하게 ‘라트리아’(latria, 숭배)와 ‘둘리아’(dulia, 섬김)라는 것을 구별해서. 이 두 단어는 사실 성경에서 함께 쓰이는 단어라고 봐도 됩니다. ‘라트리아’는 ‘예배’ 혹은 ‘숭배’, ‘경배’, ‘둘리아’는 ‘섬김’. ‘둘리아’는 ‘service’ 하는 것, 역(役), 일하는 것, 그런 측면이고, ‘라트리아’는 ‘예배’하는 것, 이런 측면이고. 물론 이런 성격이 강한 것은 맞습니다마는, 성경에서 이 두 가지가 따로 쓰이지는 않습니다. 완전히 구별해서 쓰이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로마 카톨릭 교황주의자들은 성자(聖者)들에게 돌리는 예배는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와 달리 그것은 ‘둘리아’이기 때문에, 섬기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행할 때 형상(形象)과 조상(彫像)을 두는 것은 우상 숭배가 아니다라고 이렇게 궁색한 변명을 합니다. 그러나 ‘라트리아’나 ‘둘리아’는 함께 쓰이는 것이고, 바로 성경에서 이 두 가지가 함께 나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섬김을 통하여서도 영광을 받으신다고 분명히 이야기했고, 그 섬김이 예배라고 했기 때문에, 섬김은 예배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결코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우리는 본질상 패역하여서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노릇 했습니다. 악한 영에게 종노릇 했습니다. 갈라디아 4장 8절.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거듭나고, 예수 그리스도의 영으로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들은 오직 하나님께만 경배해야 됩니다. 마태복음 4장 10절,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adorabis).” 예수님이 시험 받았을 때 이 말씀으로 그 궤계(詭計)를 물리쳤지 않습니까? 사탄의 시험을 물리쳤지 않습니까? 사탄은 무릎 꿇기를 또 요구했지만, 예수님은 천하 만물의 영화를 보여주어도 사탄에게 무릎을 꿇지 않았습니다. 바로 오직 하나님께만 예배드리고, 하나님께만 경배하고, 그것이 숭배든, 그것이 섬김이든, 어떤 이름이든 우리의 무릎을 꿇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의 마음이 어떤 대상 앞에 숙여진다면, 우리 마음의 무릎이 꿇어진다면 그것이 곧 우상입니다. 사도 요한이 천사 앞에 무릎을 꿇었을 때, 그 천사에게 책망을 받았습니다. 요한계시록 19장 10절, 22장 8-9절에 이 말씀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새 하늘과 새 땅에서도 오직 보좌의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 그분께 면류관을 던져야 돼요(참조. 계 4:10). 오직 우리의 기도와 예배와 찬송을 받으실 분은 ‘보좌의 하나님’, ‘삼위일체 하나님’이십니다. 어떤 경우도 우리는 천사에게 무릎 꿇어서는 안 됩니다. 항상 하나님 앞에.
우리가 한 분 하나님을 모시기를 원한다면 그의 영광의 한 터럭조차도 뽑아내려고 해서는 안 되며, 나아가 그 자신에게 고유한 것을 우리 속에 간직해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이런 취지에서 스가랴는 교회의 회복을 선포하면서, 여호와는 “홀로 한 분”이실 뿐만 아니라, “그의 이름이 홀로 하나”(슥 14:9)라는 사실을 명료하게 표명함으로써, 하나님은 우상들과 공유하시는 것이 아무것도 없음을 뚜렷이 부각시킨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1.12.3.
‘여호와는 홀로 한 분이시고, 그의 이름이 홀로 하나다.’ 스가랴 14장 9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섬겨야 될 한 분 하나님, 유일하신 하나님, 우리가 하나님이라고 칭하는 유일한 이름.’ 천사를 하나님이라고 불러도 안 돼요. 천사를 경배해서도 안 됩니다. 천사에게 영광 돌려서도 안 됩니다. 사람에게도, 어떤 하나님께 드려야 될 것을 사람에게 드리는 것, 그것이 전부 다 우상 숭배입니다.
진정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합법적이고 올바른 것이 무엇인지를 자기의 율법에서 규정하시고 그들을 확실한 규범으로 묶으심으로써 자기가 기뻐하시는 예배를 아무도 자의대로 섞지 못하도록 하셨기 때문이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1.12.3.
이 점에서 칼빈은 율법을 “경건하고 올바른 삶의 규범”(pie et iusteque vivendi regula)이자 “종교의 양식”(forma religionis)이라고 정의한다. Institutio, 2.7.1.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1.12.3. 각주 242.
하나님은 진정 사람들에게 무엇이 합당하고, 무엇이 올바른 것인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그의 계명과 율례와 법도를 통하여서 ‘확실한 규범’으로 우리에게 묶어 두셨습니다. 그것이 ‘예배의 규범’인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섬길 때, 바로 섬기고, 올바로 섬기고, 질서 가운데, 규모 있게 하나님 앞에 섬겨야 됩니다. 하나님은 사울이 친히 사무엘 대신 제사를 드리고자 했고, 그 제사를 드린 것을 가장 싫어하셨습니다. 그래서 사울을 왕으로 세운 것을 후회하신다고 하실 만큼 그것을 싫어하셨습니다.
‘경건의 직무’들은 그 제1원칙이 ‘오직 한 분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앞에 두지 말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경건의 직무입니다. 모든 성도는 ‘경건’해야 하며, ‘경건의 비밀’을 가져야 되고, ‘경건의 직무’가 있습니다. 마땅히 우리가 경건해야 됩니다. 그리고 ‘경건한 예배’를 하나님께 올려드리는데,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우리 앞에 두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만이 ‘삼위일체, 유일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이 ‘성부, 성자, 성령, 스스로 계시고, 만유의 만유시고, 영원하시고, 불변하시고, 자존하시는 우리의 유일한 찬송 받으실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이제 이어지는 13장에서 그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와, 그리고 그 하나님의 ‘사역’과 ‘경륜’과, 그 ‘하나님의 어떠하심’과, 삼위일체 하나님의 놀라운 ‘비밀’에 대해서 배울 것입니다.
이 부분의 결론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 번째, 유일하신 하나님의 신성에 속한 것은 그 무엇도 양도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 것을 다른 것에 이양(移讓)해서는 안 됩니다. 옮겨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 마땅히 돌려드려야 할 것을 다른 곳에 돌려드려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오직 하나님 홀로 예배와 찬미를 받으시는 ‘경건의 직무’라고 칼빈이 이야기했습니다. 경건은 우리에게 마땅한 바입니다. 그 경건의 제1원칙은 오직 한 분 하나님만 우리 앞에 두는 것이라고 그렇게 말했습니다. 여기에 기독교의 본질이 있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 하나님은 친히 율법을 제정(制定)하셔서 하나님께 마땅히 돌려드려야 될 ‘예배법’을 우리에게 알려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외의 그 무엇 앞에서도 그 이름이 예배건, 섬김이건, 봉사건, 마음을 빼앗기거나, 그 앞에 무릎을 꿇거나, 마음에 무릎을 꿇거나, 마음의 굴종적 자세를 취하거나, 이런 모든 것은 하나님이 금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이 예배건, 섬김이건, 그것이 숭배건, 섬김이건,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려야 하고 다른 것에 무릎을 꿇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20강 이번 강의 결론
유일하신 하나님의 신성에 속한 것은 그 무엇도 양도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 홀로 예배와 찬미를 받으시는 경건의 직무를 다함에 순수한 종교의 본질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친히 율법을 제정하셔서 자신의 어떠하심에 합당한 ‘예배(라트리아, latria)’와 ‘섬김(둘리아, dulia)’을 받으시므로,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야 하며, 어떤 명분으로든 그 무엇 앞에 무릎을 꿇어서는 안 됩니다.
20강 | 1.12.1-3. (1권 307-314페이지)
우상 숭배는 하나님에 대한 참 예배와
양립할 수 없음
12장에서는 우상 숭배에 대한, ‘그것이 예배와 어떻게 차별되는가?’ 또 ‘우상 숭배와 예배가 양립할 수 없다.’ 이것을 다시 한번 더 강조하는 부분입니다. 왜 우상 숭배가 이렇게 중요하게 다루어질까요? 칼빈은 『기독교 강요』 2권 8장에서 십계명을 다루면서 제2계명에서 우상 숭배에 대해서 꽤 자세히 논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그 모세의 마지막 오경 네 권에 대한 주석, 칼빈은 이 부분을 한 권의 주석으로 쓰거든요. 여기에서 제2계명을 다루면서 거의 200-300페이지 정도로 우상을 자세히 다루고 있습니다.
우상은, 오늘날 우리에게는 ‘우상이다’ 이러면, 그저 뭐 로마 카톨릭, 동방정교회, 무엇이 걸려 있다, 무엇을 흔든다, 향을 피운다, 이런 것들을 우리가 많이 생각하지만, 중세 시대 때는, 이미 우리가 보았듯이, ‘형상들은 무식한 사람들의 책들이다.’ 이것이 교리입니다. 그 당시에는 라틴어가 거룩한 언어로 여겨져서, 중세 때는, 성경 언어인 히브리어와 헬라어조차도 라틴어에 비해서는 그 거룩함이 떨어진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일반 서민들은 라틴어를 배우지 못하지 않습니까? 그저 문자를 익히는 사람도 상대적으로 많지 않았겠지만, 자국어를 쓰는 사람도 드문 그런 때에 라틴어를 읽고 쓰고, 또 듣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겠습니까? 그러면 빨리 교회가 누구라도 듣게 끔, 우리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있듯이, ‘성경은 자국의 언어로 번역하여서 누구라도 알아듣기 쉽게, 그리고 읽을 수 있게 끔 그렇게 해야 된다.’ 라고 이렇게 명문화했거든요(참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8). 그것이 종교개혁의 정신이거든요. 그런데 로마 카톨릭은 그렇게 하지 않고, 이미 사제들은 특권화되고 계급화되어서, 그들은 특별한 자질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수 있는 능력이 있으나, 일반 성도들은 그저 형상들 보고, 만지고, 그렇게 신앙생활하고, 죄를 지었으면 사제들 찾아가서 면전에 고해(告解)하고, 또 더 잘못한 게 있으면 어떤 밭을 팔든 논을 팔든 갚고, 이런 식의 신앙생활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우상 숭배가 이제 종교 개혁 때는 너무나 중요한 논제가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칼빈은 ‘우상 숭배가 미신(superstitio)의 산물이자 도구다.’ 사실 하나님을 섬긴다 하면서 교회 내에 상을 갖다 놓는데요. 제가 이집트, 애굽의 한 교회에 가보니까 기둥이 이렇게 열두 기둥이 있어요. 그리고 거기 안에는 이런 자리들이 한 40-50개 놓여 있는데, 그 기둥 바깥에 벽에 여러 그림이 걸려 있어요. 그래서 제가 안내하는 사람에게 물어봤더니, 말씀을 들을 줄 아는 사람은 저기 안에 앉고, 말씀을 들을 줄 모르는 사람은 그 기둥을 한 바퀴 돌고 그렇게 그냥 집에 간다는 거예요. 자, 이것이 어찌 하나님을 예배하는 예배라고 볼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어떤 사변적 지식도 아닙니다. 우리가 ‘성경의 단순성’에 대해서 말했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의 감화로, 또 조명으로 누구나 그 말씀을 받아들일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성경의 단순성’ 아니었습니까? 하나님의 한 분이심과 또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그 지식,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그 은혜, 이것이 누구에게나 주어진다는 것 아닙니까?
지금 나는, 성경이 하나님은 한 분이시라고 주장할 때마다 … 그의 신성에 속한 것은 어떤 것도 다른 것에 양도될 수 없다고 명령하기 위함이라는 사실을 간단하게 반복하고자 한다. 이로부터 ‘순수한 종교’는 미신과 다르다는 사실이 또한 명백해진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1.12.1.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은 유일하신 분이요, 하나님의 신성은 그 어디에도 양도 되지 않고, 하나님의 신성은 어떤 사물에도 새겨지거나 형상화 될 수 없다는 것, 하나님은 보이지 아니하시는, 스스로 계시는 ‘만유의 만유’시라는 것, 그것을 우리가 ‘아멘’ 할 때 그것이 순수한 종교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다 하고, 예배한다 하고, 섬긴다 하면서, 교회 안에 만든 것들은 이미 순수한 종교를 떠난 미신에서 나온 것이라는 것입니다.
통상 ‘경건’(pietas)이라는 말로 번역되는 ‘εὐσέβεια’는 ‘예배’(cultus)를 본질적인 요소로 삼는데, ‘종교’(religio)라는 뜻을 함의한다. 이는 ‘pietas’와 ‘religio’가 ‘εὐσέβεια’라는 어의(語義)를 공유하고 있음에 대한 방증이 된다. Cf. Institutio, 1.2.1-2.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1.12.1. 각주 233.
헬라어 ‘유세베이아’(εὐσέβεια)는 ‘경건’(pietas)으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이 경건은 이미 우리가 앞에서, 특별히 1권 2장에서 보았기 때문에, 이곳에서 다시 보지 않겠습니다마는, 경건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대로 예배를 올려드리는, 그 말씀이 선행하는 예배거든요. 하나님의 뜻을 좇고, 그래서 레위기에 보면, 가장 먼저 ‘제사법’을 두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제사하는, 또 ‘절기법’을 두지 않습니까? 때를 쫓아 하나님께 감사하고 화목하고 서원하고, 이러한 모든 것을 하나님이 규정하지 않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우상을 섬기는 것은 경건에서 위배되는 것이요, 경건은 커녕 오히려 하나님을 거역하고 반역한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한 분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만유의 만유이시기 때문에 그 어디에도 갇혀 계시지 아니하십니다. 하나님을 형상화하는 자들은 결코 하나님을 예배할 수 없고, 하나님을 즐겁게 누릴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을 형상화하고 우상을 섬기는 것은 이미 악한 영에 굴복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자유와 거리가 먼 것입니다.
우리는 ‘거듭난 자’로서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거룩한 영’으로, 이제는 죄의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서, ‘의의 종’으로서, ‘예배의 종’으로서, 진정 ‘기쁜 마음’으로, ‘감사의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상을 섬기는 것은 바로 하나님을 거역하는, 그래서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이라고까지 말씀하신 것입니다(출 20:5; 34:14; 신 4:24; 5:9; 수 24:19). ‘나 외에는 다른 것을 네게 두지 말라.’(출 20:3)라고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율법에 두 가지를 포함시키신다. 첫째, 그는 신자들이 그들 자신을 위한 유일한 율법수여자가 되시는 자기에게 헌신하도록 하신다. 둘째, 그는 자기 자신의 의지에 따라 자기가 올바르게 예배를 받으실 수 있도록 규범을 제정하신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1.12.1.
하나님이 율법을 수여하셨습니다. 그래서 제1에서 4계명은 ‘경건의 계명’으로, ‘예배의 계명’으로 주셨고, 제5에서 10계명은 ‘이웃사랑의 계명’으로 주셨습니다. 이 ‘말씀을 좇는 예배’, ‘말씀에 따르는 예배’, 그것이 ‘하나님의 의지에 따르고, 뜻에 따르는 올바른 예배’입니다. 하나님은 ‘예배자’도 규정하시고, ‘예배 방식’도 규정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에 의해서 택함 받았습니다. 이제는 만인이 예배자입니다. 그리고 만인이 하나님의 뜻 가운데 예배를 드려야 됩니다. 그는 ‘성령의 감동, 감화’로, ‘말씀의 진리’대로, 곧 ‘영과 진리’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야 됩니다(요 4:24). 그러므로 우상 숭배는 미신이요, 죽은 것을, 은, 금을 따르는 우매한 짓이요, 하나님의 영광을 소멸시키고, 하나님의 영광을 교활하게 쪼개고, 하나님을 흩트리고, 끝내 하나님을 부인하는 그 패역한 행위인 것입니다. 하나님 외에 성자(聖者)들을 높이거나, 하나님 외에 어떤 것을 섬기는 것, 그것이 바로 우상 숭배입니다. 하나님의 자리에 다른 것을 두고, 하나님 외의 것에 예배를 드리고, 기도를 드리고, 찬미를 드린다면, 그것이 다 우상 숭배입니다.
예배라는 이름으로 하든지, 섬김이라는 이름으로 하든지, 로마 카톨릭은 아주 교묘하게 ‘라트리아’(latria, 숭배)와 ‘둘리아’(dulia, 섬김)라는 것을 구별해서. 이 두 단어는 사실 성경에서 함께 쓰이는 단어라고 봐도 됩니다. ‘라트리아’는 ‘예배’ 혹은 ‘숭배’, ‘경배’, ‘둘리아’는 ‘섬김’. ‘둘리아’는 ‘service’ 하는 것, 역(役), 일하는 것, 그런 측면이고, ‘라트리아’는 ‘예배’하는 것, 이런 측면이고. 물론 이런 성격이 강한 것은 맞습니다마는, 성경에서 이 두 가지가 따로 쓰이지는 않습니다. 완전히 구별해서 쓰이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로마 카톨릭 교황주의자들은 성자(聖者)들에게 돌리는 예배는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와 달리 그것은 ‘둘리아’이기 때문에, 섬기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행할 때 형상(形象)과 조상(彫像)을 두는 것은 우상 숭배가 아니다라고 이렇게 궁색한 변명을 합니다. 그러나 ‘라트리아’나 ‘둘리아’는 함께 쓰이는 것이고, 바로 성경에서 이 두 가지가 함께 나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섬김을 통하여서도 영광을 받으신다고 분명히 이야기했고, 그 섬김이 예배라고 했기 때문에, 섬김은 예배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결코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우리는 본질상 패역하여서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노릇 했습니다. 악한 영에게 종노릇 했습니다. 갈라디아 4장 8절.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거듭나고, 예수 그리스도의 영으로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들은 오직 하나님께만 경배해야 됩니다. 마태복음 4장 10절,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adorabis).” 예수님이 시험 받았을 때 이 말씀으로 그 궤계(詭計)를 물리쳤지 않습니까? 사탄의 시험을 물리쳤지 않습니까? 사탄은 무릎 꿇기를 또 요구했지만, 예수님은 천하 만물의 영화를 보여주어도 사탄에게 무릎을 꿇지 않았습니다. 바로 오직 하나님께만 예배드리고, 하나님께만 경배하고, 그것이 숭배든, 그것이 섬김이든, 어떤 이름이든 우리의 무릎을 꿇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의 마음이 어떤 대상 앞에 숙여진다면, 우리 마음의 무릎이 꿇어진다면 그것이 곧 우상입니다. 사도 요한이 천사 앞에 무릎을 꿇었을 때, 그 천사에게 책망을 받았습니다. 요한계시록 19장 10절, 22장 8-9절에 이 말씀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새 하늘과 새 땅에서도 오직 보좌의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 그분께 면류관을 던져야 돼요(참조. 계 4:10). 오직 우리의 기도와 예배와 찬송을 받으실 분은 ‘보좌의 하나님’, ‘삼위일체 하나님’이십니다. 어떤 경우도 우리는 천사에게 무릎 꿇어서는 안 됩니다. 항상 하나님 앞에.
우리가 한 분 하나님을 모시기를 원한다면 그의 영광의 한 터럭조차도 뽑아내려고 해서는 안 되며, 나아가 그 자신에게 고유한 것을 우리 속에 간직해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이런 취지에서 스가랴는 교회의 회복을 선포하면서, 여호와는 “홀로 한 분”이실 뿐만 아니라, “그의 이름이 홀로 하나”(슥 14:9)라는 사실을 명료하게 표명함으로써, 하나님은 우상들과 공유하시는 것이 아무것도 없음을 뚜렷이 부각시킨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1.12.3.
‘여호와는 홀로 한 분이시고, 그의 이름이 홀로 하나다.’ 스가랴 14장 9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섬겨야 될 한 분 하나님, 유일하신 하나님, 우리가 하나님이라고 칭하는 유일한 이름.’ 천사를 하나님이라고 불러도 안 돼요. 천사를 경배해서도 안 됩니다. 천사에게 영광 돌려서도 안 됩니다. 사람에게도, 어떤 하나님께 드려야 될 것을 사람에게 드리는 것, 그것이 전부 다 우상 숭배입니다.
진정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합법적이고 올바른 것이 무엇인지를 자기의 율법에서 규정하시고 그들을 확실한 규범으로 묶으심으로써 자기가 기뻐하시는 예배를 아무도 자의대로 섞지 못하도록 하셨기 때문이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1.12.3.
이 점에서 칼빈은 율법을 “경건하고 올바른 삶의 규범”(pie et iusteque vivendi regula)이자 “종교의 양식”(forma religionis)이라고 정의한다. Institutio, 2.7.1.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1.12.3. 각주 242.
하나님은 진정 사람들에게 무엇이 합당하고, 무엇이 올바른 것인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그의 계명과 율례와 법도를 통하여서 ‘확실한 규범’으로 우리에게 묶어 두셨습니다. 그것이 ‘예배의 규범’인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섬길 때, 바로 섬기고, 올바로 섬기고, 질서 가운데, 규모 있게 하나님 앞에 섬겨야 됩니다. 하나님은 사울이 친히 사무엘 대신 제사를 드리고자 했고, 그 제사를 드린 것을 가장 싫어하셨습니다. 그래서 사울을 왕으로 세운 것을 후회하신다고 하실 만큼 그것을 싫어하셨습니다.
‘경건의 직무’들은 그 제1원칙이 ‘오직 한 분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앞에 두지 말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경건의 직무입니다. 모든 성도는 ‘경건’해야 하며, ‘경건의 비밀’을 가져야 되고, ‘경건의 직무’가 있습니다. 마땅히 우리가 경건해야 됩니다. 그리고 ‘경건한 예배’를 하나님께 올려드리는데,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우리 앞에 두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만이 ‘삼위일체, 유일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이 ‘성부, 성자, 성령, 스스로 계시고, 만유의 만유시고, 영원하시고, 불변하시고, 자존하시는 우리의 유일한 찬송 받으실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이제 이어지는 13장에서 그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와, 그리고 그 하나님의 ‘사역’과 ‘경륜’과, 그 ‘하나님의 어떠하심’과, 삼위일체 하나님의 놀라운 ‘비밀’에 대해서 배울 것입니다.
이 부분의 결론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 번째, 유일하신 하나님의 신성에 속한 것은 그 무엇도 양도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 것을 다른 것에 이양(移讓)해서는 안 됩니다. 옮겨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 마땅히 돌려드려야 할 것을 다른 곳에 돌려드려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오직 하나님 홀로 예배와 찬미를 받으시는 ‘경건의 직무’라고 칼빈이 이야기했습니다. 경건은 우리에게 마땅한 바입니다. 그 경건의 제1원칙은 오직 한 분 하나님만 우리 앞에 두는 것이라고 그렇게 말했습니다. 여기에 기독교의 본질이 있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 하나님은 친히 율법을 제정(制定)하셔서 하나님께 마땅히 돌려드려야 될 ‘예배법’을 우리에게 알려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외의 그 무엇 앞에서도 그 이름이 예배건, 섬김이건, 봉사건, 마음을 빼앗기거나, 그 앞에 무릎을 꿇거나, 마음에 무릎을 꿇거나, 마음의 굴종적 자세를 취하거나, 이런 모든 것은 하나님이 금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이 예배건, 섬김이건, 그것이 숭배건, 섬김이건,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려야 하고 다른 것에 무릎을 꿇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20강 이번 강의 결론
유일하신 하나님의 신성에 속한 것은 그 무엇도 양도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 홀로 예배와 찬미를 받으시는 경건의 직무를 다함에 순수한 종교의 본질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친히 율법을 제정하셔서 자신의 어떠하심에 합당한 ‘예배(라트리아, latria)’와 ‘섬김(둘리아, dulia)’을 받으시므로,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야 하며, 어떤 명분으로든 그 무엇 앞에 무릎을 꿇어서는 안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