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강 [1.11.8-16] 우상으로 예배하는 것과 우상을 예배하는 것은 같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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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 1.11.8-16. (1권 293-306페이지)



우상으로 예배하는 것과
우상을 예배하는 것은 같음



     하나님은 스스로 계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그 무엇으로도 그의 존재가 더하여지지 아니하고, 또 소멸하지도 않고, 변화하지도 않습니다. 또 그 무엇으로 그의 영광이 채워지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을 온전케 한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 ‘하나님께 기쁨이 된다.’ 이러한 모든 표현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함으로 하나님께 되돌려 드리는 그 무엇입니다. 

     우상을 만드는 마음은 하나님을 부인하거나 하나님을 대체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상을 만드는 마음은 하나님을 대적하고 적극적으로 하나님께 반역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천성은 이른바 우상들의 영원한 공장(工場)이라는 사실(hominis ingenium perpetuam, ut ita loquar, esse idolorum fabricam) … 사람의 마음은 교만과 무모함이 가득하여 그 자체의 이해력을 좇아 감히 하나님을 형상화하고, 게으름에 빠져 꾀를 부리며, 무엇보다 아둔한 무지에 압도되어 헛되고 어리석은 환영(幻影)을 하나님이라고 품는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1.11.8.


     ‘사람의 천성은 우상들의 영원한 공장이다(hominis ingenium perpetuam, ut ita loquar, esse idolorum fabricam).’라고 칼빈은 운을 뗍니다. 우리의 마음에 천성적으로 우상을 만드는 그런 공장이 있다는 것입니다. 끝없이 우상을 만들어 낸다는 것입니다. 쭉 열을 세워서, 너무나 신들이 많으니까, 아예 ‘알지 못하는 신들에게’라고(행 17:23), 아예 먼저 상(像)부터 만들어 놓고, 신의 이름을 나중에 새기는 이러한 우매함이 우리 인간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창세기도 보면 라헬이 우상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창세기 31장 [19절]에서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여호수아 24장 2절의 말씀에 보면, 아브라함이 나기 전에 데라와 나홀도 거짓신들에 대한 예배자였음이 말씀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 천성은 ‘거짓’에 사로잡혀 있고, ‘교만’함에 빠져 있습니다. 우리가 『기독교 강요』 1권 1장에서 그렇게 보지 않았습니까? ‘교만함은 거짓에서 비롯된다. 우리가 참 지식 가운데 있다면 결코 교만할 수 없다. 왜곡된 지식이 있을 때, 잘못된 지식에 현혹될 때, 우리는 교만해진다.’ ‘우상을 섬기는 마음’은 ‘교만한 마음’입니다. ‘어리석은 마음’입니다. ‘무식한 마음입니다. 끝내는 하나님을 판단하는 그 자리에 서는, 하나님 위에 앉고자 하는 ’배은망덕한 마음‘입니다. 하나님을 형상화하고, 또 게으름에 빠져서 꾀를 부리고, 예배도 자기 수중에 두는 것입니다. ‘뭐 하나님께 찬송하고, 뭐 하나님께 기도하냐? 뭐 그런 열심을 부리느냐? 그 수고에 땀을 흘리느냐?’ 그렇게 생각하고, 그저 작은 상(像)을 만들어 주머니에 넣거나, 그리고 집안 마당에 새겨놓고, 또 세워놓고, 그것을 바라보고 빌고. 어떻게 보면 ‘영적인 우매함’이요, ‘패역함’이요, ‘게으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환영(幻影)을 품는 거죠. 신비주의자들은 다 게으른 자들입니다, 영적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예배드리고,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는 그 하나님께, 시절(時節)을 쫓아 과실을 주는(참조. 시 1:3, 개역한글) 하나님께 때에 따라 찬양하고 찬미하고 예배드리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섬기는 마음입니다. 


이러한 악들[첫 번째 인용문]에 새로운 사악함이 가미된다. 즉 사람은 자기가 내적으로 품은 것을 자기의 작품 가운데 표현해 내고자 일을 감행한다. 그러므로 마음은 우상을 잉태하고 손은 그것을 출산한다(Mens … idolum gignit, manus parit). 이스라엘 사람들의 예에서 보듯이, 사람들은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육체적으로 현존하시는 분으로 제시하시지 않는 이상 자기들에게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믿지 않는데, 이것이 우상 숭배의 기원이다[참조. 출 32:1].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1.11.8.


     사람은 자기가 내적으로 품은 것을 자기 작품 가운데 표현해냅니다. 그래서 ‘마음은 우상을 잉태하고, 손은 그것을 출산한다.’라고 유명한 이야기를 칼빈이 하는 것입니다. 손으로 만든 것은 다 마음이 전이(轉移)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마음이 그곳에 투영(投影)되고, 투사(投射)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상의 어떤 신적 조각물은 내 마음의 투사물이라는 것입니다. ‘아이, 저는 그저 뭐 그냥 하나 만들어 놓아 봤습니다. 별 의미 없습니다.’ 이러한 형상물은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육체적으로 현존하시는 분으로 제시하지 않는 이상 하나님을 믿지 않으려고 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왜 그럴까요? 바로 타락으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을 가로막기 때문에 그렇습니다(참조. 롬 1:18-20; 고후 3:13-18; 4:3-7). 여기에 우상의 기원이 있는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이 온전히 예배되지 않을 때 우리는 다른 것으로 신을 섬긴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 이 모세는 어찌 되었는지 알지 못함이니라.’(출 32:1) 이렇게 말하지 않았습니까? 모세는 어디 갔습니까? 지금 하나님의 말씀을 받으러 갔잖아요. 그것을 못 참고, 그것을 견디지 못하고 사람들은 금 귀고리를 모아서 금 송아지를 만드는 그러한 우매함을 범하는 것입니다. 

     우상 숭배에는 우상을 조형화하고 우상을 그리는 것, 그것이 필히 따릅니다. 어떤 신적 조형물도 숭배가 따릅니다. 그것을 앞에 놓고 절을 하고 무릎을 꿇습니다. 누구든 형상을 응시하고 있으면 그 형상을 예배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섬긴다 하고 우상을 만들면, 하나님을 그 우상 안에 가두고, 끝내는 우상을 섬기게 됩니다. 


사람들은 너무나 어리석어서 그들이 하나님을 숭배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따라서 그들이 우상을 예배하는 것이나 우상 가운데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나 어떤 차이도 없다. 하나님의 영예들이 우상에게 표해질 때, 그 예배가 어떤 식으로 드려지든, 그것은 언제나 우상 숭배이다(Neque interest idolumne simpliciter colant, an Deum in idolo: haec semper idololatria est quum idolo, qualicunque colore, exhibentur divini honores). 하나님은 미신적으로 예배받기를 원하지 않으시므로, 우상에게 부여되는 것은 무엇이든 하나님에게서 빼앗은 것이 된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1.11.9.


     그러므로 우상을 예배하는 것이나, 우상 가운데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나, 어떤 차이도 없습니다. 그냥 바위를 섬기는 것이나, ‘내가 이 바위에서 기도하니까 하나님께서 큰 은혜를 베푸셨어.’ 하면서 바위를 섬기는 것이나, 그냥 우상을 섬기는 것이나, 우상의 이름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나 어떤 차이도 없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잘 말할 수 있잖아요? 그렇게 말하는 경향이 있을 수 있잖아요? ‘하나님을 열심히 섬기고 예배를 잘 드리려고, 우리가 저렇게 상(像)도 만들어 놓고, 그림도 그리고 했어요.’ 그렇게 할 수 있잖아요. 그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예가 우상에게 표해질 때, 그 예배가 어떤 식으로 드려지든 그것은 우상 숭배입니다. 결코 예배의 마음을 가진 적 없다라고 아무리 이야기한다고 해도 그것은 우상 숭배입니다. 

     유대인들도 송아지를 만들어서 섬기기 전에 이미 그들은 불평의 마음을 가졌고 끊임없이 하나님을 대적했습니다(참조. 민 14:22, 27; 시 106:24-25; 잠 19:3; 행 7:35, 39-42, 51). 그 마음의 뜻한 것이, 생각한 것이 금 송아지로 표현되는 것입니다. 결국은 하나님은 보이지 아니하시면 죽은 하나님이라고 생각하고, 하나님의 응답이 늦어지면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무능하다고 생각하고, 다른 것을 만들어서 ‘이 금 송아지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신이다.’(출 32:4; 참조. 출 32:8) 라고 이렇게 외치는 것입니다. 아론이 외쳤듯이, 출애굽기 32장에서요.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보다도 우상 숭배는 물론이거니와, 우상을 앞에 두는 것조차 금해야 됩니다(참조. 출 20:25). 하나님을 명분으로 삼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긴다 하면서 무슨 조형물을 갖다 놓고 무슨 조각물을 갖다 놓고, 그리고 그것으로 하나님을 형상화하는 것, 그것은 벌써 마음이 빼앗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예배’ 드려야 됩니다. ‘영’과 ‘진리’로 ‘예배’ 드려야 됩니다. 하나님을 우상으로 숭배하는 것은 그 자체로 ‘영적 간음’입니다(참조. 대상 5:25; 렘 3:8; 5:7; 겔 23:11; 호 4:13-14; 약 4:4; 계 2:22). 우상을 응시하며 기도하거나 숭배할 때, 그 마음속에는 자기의 소리를 들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곳에 다 주목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상 앞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우상 앞에 자기의 염원을 투사해서, 뭔가 보이지 않는 그 무엇에 의지하고, 그것을 그 조형물에 투사하는 이것이 누구에게나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어거스틴(아우구스티누스, Augustinus)의 이야기를 인용하면서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우상들을 ‘우리의 신들’이라고 부르지 않기 때문에 문제가 없다라고 자주 말합니다. 그러나 사실 그들은 이미 우상을 만들고 그 우상 앞에 서는 이상 나무와 돌과 간음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됩니다. 선지서에는,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하박국, 계속 이 말씀이 반복해서 나오는 것입니다(참조. 렘 2:27; 겔 6:4-10; 참조. 사 40:19-20; 합 2:18-19; 신 32:37).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을 만드는 것은, 금 송아지를 만드는 것은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있음에도 감사하지도 않고, 하나님께 영화롭게도 하지 않고, 그래서 마음이 어리석게 되고 우준(愚蠢)하게 되어서 결국은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조형(造形)을, 또 그림을 섬기는 것입니다(참조. 롬 1:21-23). 

     제가 있는 곳에 우면산에 보면 소망탑이라고 있습니다. 지난번 비에 그 소망탑이 무너졌습니다. 그러니까 줄을 쳐놓고 언제까지 다시 공사하겠다. 옛날에는 조금 울퉁불퉁하게 만들어 놓아서 사람들이 그 주변에 돌고, 이런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었]습니다. 저는 아예 그 밑에 길로 이렇게 해서 지나갑니다만. 근데 이번 비가 그치고 나서 다시 다른 모양으로 또 이렇게, 더 옛날보다 동그랗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또 사람들이 그곳에 여전히 두 손을 모으고, 어른도 아이도 돌고 있는 모습을 봅니다. 과연 그게 무엇이겠습니까? 때가 되면 무너지는 왜 그 돌 앞에 손을 모으고 그렇게 비는 것입니까? 그리고 어제의 모양이 다르고, 오늘의 모양이 다른 것에 무슨 ‘불변성’이 있다고 그렇게 비는 것입니까? 그것은 다 하나님을 잃어버린 ‘상실의 마음’입니다(참조. 롬 1:28). 그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반역의 마음’입니다(참조. 호 6:4-11). 하나님께 감사치 않는 ‘배은망덕’한 타락한 인류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Second Council of Nicaea(787). 이 회의에서 우상에게 예배드리는 것(λατρεία)은 금지 했으나 경의를 표하는 것(προσκύνησις)은 허용하였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1.11.14, 각주 228.


     로마 카톨릭은 자기들이 만든 조상(彫像)과 화상(畫像), 만든 조각품과 그린 그림, 화상, 이것들은 ‘예배’(latria, 숭배)의 대상이 아니라(우상 숭배, εἰδωλολατλεία), ‘섬김’(dulia)의 대상이다(우상 섬김, εἰδωλοδουλεία). 이렇게 말하면서, ‘자기들은 그것들에게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것들을 섬기기 때문에 그것은 우상 숭배가 아니다.’ 이렇게 아주 궤변을 내놓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예배건, 숭배건 하나님 외에는 위에 두지 마라 했습니다. 하나님 외에는 섬기지 말라 했어요. 예배하지 말라 했어요(참조. 마 4:8-10). 예배와 섬김이 별도의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어떤 형상들도 절대 용인되어서는 안 된다고 볼 만큼 미신에 사로잡혀 있지 않다. 조각들이나 회화들은 하나님의 선물들이기 때문에, 나는 하나님이 자기의 영광과 우리의 선을 위하여 우리에게 부여하신 것들이 오염되어 터무니없이 사용되지 않게 할 뿐만 아니라 전용되어 우리를 파멸에 이르지 않게 하기 위하여, 이 둘 모두의 순수하고 합버적인 사용을 추구한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1.11.12.


     하나님이 만물을 주신 것은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혹 인간의 그림이 있겠죠, 또 설계도가 있겠죠, 그런 사실적인 그림들, 그런 것은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그러한 인간의 산물들이죠. 그래서 순수하고 합법적인 사용을 해라(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1.11.12.), 만물을. 만물이 주어진 대로 순수하고 합법적인 사용. 간혹 어떤 상(像)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정표가 있어서 길을 찾을 수도 있고요, 어떤 경계표가 있을 수 있습니다. 순수하고 합법적인 사용을 하라는 거죠. 그림도 있을 수 있습니다. 사실적인 그림이 있을 수 있습니다. 순수하고 합법적인 사용을 하라는 거죠. 그것들을 섬기지는 말라는 거죠. 그것들에 예배하지 말라는 거죠. 


실로 하나님을 유형적인 형상으로 표상하는 것이 불법일진대, 하나님 대신에 형상 자체를 예배하는 것 못지않게 형상 자체 안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 역시 결코 허용될 수 없다(Si ne figurare quidem Deo corpoream effigiem fas est, multo minus ipsam pro Deo, vel Deum in ipsa colere licebit). 그러므로 나는 오직 눈에 담을 수 있는 것만 그려지고 새겨져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한다. 우리는 우리 눈의 지각을 훨씬 넘어 있는 하나님의 엄위를 볼품없는 환영(幻影)들로 오염시키지 말도록 하자.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1.11.12.


     ‘하나님 대신에 형상 자체를 예배하는 것 못지않게 형상 자체 안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 역시 결코 허용될 수 없다(Si ne figurare quidem Deo corpoream effigiem fas est, multo minus ipsam pro Deo, vel Deum in ipsa colere licebit).’라고 칼빈이 이야기합니다(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1.11.12.). 아까 이야기했지만,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을 예배한다 하면서, 어느 바위에 무슨 신령한 능력이 있다고 한다거나, 그 바위를 보고 사람들이 찾아와서 그 앞에서 무릎을 꿇는다거나, 이런 것은 똑같다는 것입니다. ‘바위를’ 섬기는 것이나, ‘바위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나, 똑같은 것이다. 우상 숭배는 물론 우상 자체도 인정되지 않습니다(참조. 출 20:4). 


칼빈은 아우구스티누스의 글을 인용하기 전 우상 숭배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먼저 만약 옛 교회의 권위가 우리를 감동시키는 무엇이 있다면, 종교가 여전히 흥왕하고 보다 순수한 교리가 활기를 더했던 약 500년 동안, 기독교 성전들은 일반적으로 형상들 없이 텅 비어 있었다는 사실을 떠올리게 될 것이다. 그것들이 처음 받아들여진 것은 직분의 수누함이 다소 변질되었을 때 성전들의 장식을 위해서였다. … 만약 당신이 한 시대와 다른 시대를 비교해 본다면 형상들이 없는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순전함으로부터 다른 시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비껴 나갔는지 보게 될 것이다. 확실히 그들은 그것의 유용함이 아주 없거나 거의 없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 아주 대단한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을 직시했기 때문에, 그것을 무지(無知)나 무시(無視)로 간과하기보다 계획과 이성을 가지고 배척하였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1.11.13.


     아우구스티누스는 ‘지각이 없는, 영혼이 없는, 생기가 없는 그런 것들에 어떠한 호흡을 부여하여서 사람들이 그 앞에 무릎을 꿇는, 이 우상들을 섬기는 것이야말로 가장 불행한 것이다. 그것들은 입도, 눈도, 귀도, 발도 없다. 그것들은 볼 수도, 말할 수도, 들을 수도, 걸을 수도 없다.’라고 이야기 했습니다(참조. 요일 5:21). 

     하나님은 우리에게 ‘세례’와 ‘성찬’을 제정(制定)하셔서 우리의 거듭남과 또 거룩한 삶, ‘살아남’과 ‘살아감’을 표하게 하셨습니다. 이 두 가지가 우리에게 충분합니다. 성경 말씀을 바로 받고, 그 말씀대로 살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요셉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이 요셉에게 베푼 은혜를 기억해야지, 왜 요셉의 지팡이를 섬깁니까(참조. 창 47:31; 히 11:21)? 야곱의 ‘벧엘’ 사건을 통하여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창 28:16), 야곱의 ‘벧엘’ 사건을 통하여 그 사닥다리 하나님을 섬겨야지(참조, 창 28:13), 하나님을 예배해야지, 왜 돌 기둥(창 28:18)을 예배합니까? 발등상 앞에서 경배하라고 해서(참조. 시 99:5; 132:7), 이것은 하나님 앞에 겸손히 낮아져서 기도하고 예배하라는 것이지, 어떻게 의자를 섬기고, 발등상을 섬깁니까? 

     하나님은 어떤 것으로도 형상화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 명분이 예배건, 그 명분이 섬김이건, 어떤 명분으로도 하나님을 대체하는 사물의 형상, 또 사물 자체를 두는 것을 원치 아니하십니다. 


     이제 이 부분의 말씀을 요약해 보겠습니다. 

     첫째, 사람의 천성은 우상의 영원한 공장으로서 마음은 우상을 잉태하고 손은 그것을 출산합니다. 

     두 번째, 우상을 예배하는 것이나 우상 가운데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나 아무 차이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예가 우상에게 표해지면 그것이 언제나 우상 숭배입니다. 무슨 옛날 오래된 엔티크, 이런 거 모은다 하는 명분으로 여러 형상들, 우상들, 이런 것을 모으고 두는 것도 금해야 될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이 제정하신 성례 외에 그 어떤 형상도 가시적인 은혜의 도구가 될 수 없습니다. 우상을 성전에 두는 것 자체가 숭배이고, 이것이 참 예배와 양립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19강 이번 강의 결론


1. 사람의 천성은 우상의 영원한 공장으로서 마음은 우상을 잉태하고 손은 그것을 출산합니다.
2. 우상을 예배하는 것이나 우상 가운데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나 아무 차이가 없습니다.
     : 하나님의 영예가 우상에게 표해지면 그것은 언제나 우상숭배입니다.
3. 하나님이 제정하신 성례 외의 그 어떤 형상도 은혜의 도구가 될 수 없습니다.
     : 우상을 성전에 두는 것 자체가 숭배이며, 참 예배와 양립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