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은 『기독교 강요』 1권 13장에서 ‘삼위일체론’을 논하기 전에, 11장과 12장을 할애해서 먼저 우상에 대해서 논하고 있습니다.
『기독교 강요』 1권 11-12장은 우상을 금하는 제2계명에 주안점을 두고 하나님을 아는 올바른 지식에 따른 참 예배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논하고 있습니다. 이 점에서 이어서 전개되는 삼위일체, 창조, 섭리 교리의 서론에 해당한다고 볼 것입니다. 이 부분은 십계명의 장(章)에서 제2계명을 다루는 『기독교 강요』 2권 8장 17절과 함께 읽어야 합니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1.11.1. 각주 197.
우상은 죽은 것이요, 우상은 만들어진 피조물이요, 우상은 유한한 것입니다. 이에 비해서 하나님은 무한하시고, 스스로 계신 영이시며, 살아계신 ‘삼위일체’이십니다.
칼빈이 13장에서 ‘삼위일체론’을 논하기 전에 먼저 11장, 12장에서 우상을 논한 것은 마치 ‘하나님 외에 그 무엇도 다 우상이다. 유한한 것은 우상이다. 피조된 것은 우상이다. 죽은 것은 우상이다. 오직 하나님만 살아계신 분이다. 영원하신 분이다. 무한하신 분이다.’ 이것을 강조하기 위한 교리적 배치가 아닌가 라고 우리가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이미 우리는 일반계시를 논하면서도, 만물을 통하여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분명히 보여 알려졌으나 우준하게 되어서 하나님을 예배치도 않고 감사치도 않고 오히려 우상을 만드는, 그러한 금수를 섬기는 이러한 인류의 모습에 대해서 보았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는 자는 그저 중립에 있는 자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거부하고, 하나님께 반역하고, 그리고 예배를 훼방하고, 예배를 부인하고, 나아가서는 다른 신을 섬기고, 또 다른 신을 섬기다가 허무해지면 결국은 자기 자신을 섬기고, 황제를 섬기고, 이러한 모습은 이미 우리가 보았습니다.
사람들이 신성에 대해 자신들의 고유한 소견(divinitatis propria opinione)을 가지고 만들어 낸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수포로 돌아가게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 자신이 자기에 대한 유일하고 적합한 증인이시기 때문이다(quia Deus ipse solus est de se idoneus testis).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1.11.1.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하나님이 친히 알려주시는 방법에 따른 것’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은 어떨 것이라고 마음속에 그리고, 그러한 소견을 가지고 하나님께 예배드린다, 이것은 이미 허무한 것입니다. 예배는 하나님이 받으시는 것이고, 하나님의 뜻에 합해야 됩니다. 하나님은 그 무엇의 질서보다 ‘예배의 질서’를 귀하게 여기십니다. 하나님 자신이 자기에 대한 유일하고 적합한 증인이시기 때문에, 사실상 하나님은 스스로 자신을 계시하시고, 스스로 영광 가운데 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치 우리 인생이 그 무엇을 하여서 하나님의 부족한 영광을 채우듯이, 우리가 그 무엇을 해야 하나님이 완전한 영예를 갖게 되기라도 하듯이, 그렇게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만물은 하나님이 지으신바 된 것이요, 그 생멸(生滅)이, 그 존재와 그 사라짐이 다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있습니다. 하나님을 섬긴다 하면서 피조물로 가시적 형상을 만들고, 나무나 돌이나 금이나 은이나 어떤 죽은 썩을 물질로, 후패(朽敗)하는 것으로 하나님을 섬긴다면, 이것은 ‘짐승과 같은 우매한 짓이다. 야수적인 어리석음이다.’라고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아니하십니다. 하나님은 묘사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계시고, 만유의 만유이십니다. 그러므로 어떤 형상으로도 하나님의 신성을 부착(附着)시킬 수가 없습니다. 무엇을 만들어서 그 안에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집어넣을 수도 없고, 또 하나님의 어떠하심이 어떤 형상으로 드러날 일도 만무합니다.
출애굽기 20장 4절에,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이 말씀에서 주목되는 것은 형상도 만들지 말고, 우상도 만들지 말고, 어떤 것도 만들지 마는데, ‘너를 위하여 만들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이 무엇일까요? 스스로 자기가 옳다 하는 바로, 그렇게 하나님을 섬기거나, 하나님을 예배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혹은 태양을, 별을 숭배하고, 그리고 만신을, 만물을 섬기는 그러한 모든 습성이 우리 인간에게는 남아 있습니다. 사람을 만들거나 그리거나, 무엇을 빚어내거나, 끝없이 형상화하는 그런 버릇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형상에 뭔가 자기 마음에 만들어진 신성을 주입해서, 그것을 섬기는 그러한 우매함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명기 4장 12절의 말씀에서와 같이, 하나님의 말소리는 우리에게 들려지시나 형상은 보여주지 아니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깊이 삼가고, 신명기 4장 15절, 그리고 자기를 위해 어떤 형상으로든 우상을 새겨 만들지 말아야 됩니다. 신명기 4장 16절에 그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상에 대해서 그 어떤 선지자보다 이사야는 우상을 금할 것을 반복해서 선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형체가 없는 분이시기 때문에, 형체가 있는 물질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이요, 비가시적인 분이 가시적인 형상으로, 영적인 분이 생명이 없는 것으로, 무한하신 분이 나무나 돌이나 황금 조각과 동화(同化)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우상은, 조상(彫像)은, 형상은 하나님의 엄위에 어울리지 않고, 천하고 불합리한 허구에 다름없다.’라고 이사야는 증거하고 있습니다(참고. 사 40:18-20; 41:7, 29; 45:9; 46:5-7).
바울도 사도행전 17장 29절에, 그 마게도냐 아가야의 아테네에서, “이와 같이 하나님의 소생이 되었은즉 하나님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길 것이 아니리라.”(행 17:29) 라고 이렇게 선포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실로 하나님은 자기 신성의 현존을 확실한 ‘표징’들로 제시하셨기 때문에, 이것은 하나님의 뜻 가운데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드러내시기 위하여 보이는 표정을 사용하기도 하십니다. 떨기나무 가운데 불꽃 가운데 하나님이 현존하시거나, 또 하나님의 능력을 반석의 물을 통하여서, 홍해를 가름을 통하여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통하여 보이시거나, 그의 현존을 구름 기둥, 불 기둥으로 드러내시듯이, 마치 하나님은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여 보이신 것처럼(참조. 출 33:11), 그렇게 자신을 드러내시기도 하십니다.
그러나 잘 아실 것은 그러한 보이는 것들이 불가해한 하나님의 본질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현존을 드러내기 위한 가시적으로 제시된 어떤 표징들일 뿐, 그것이 하나님의 본질을 담고 있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구름과 연기와 불길 가운데 자기 자신을 드러내시기도 하시지만, 그것들이 하나님의 본성을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나타나셨다고 해서 비둘기가 성령일리 만무합니다. 하나님이 바람으로도 성령의 그러한 권능을 드러내시지만, 바람에 하나님의 신성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오히려 피조물을 통하여 하나님의 현존을 드러내시는 것은, 모든 사람은 하나님을 섬겨야 되지 피조물을 섬겨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반대 증거가 된다는 것을 우리는 또한 생각해야 됩니다.
속죄소에 하나님의 현존이 있고 그 법궤에 말씀이 있습니다. 그 찬송은 마음을 들어서 하나님께 올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속죄소의 그룹들(Cherubim)은 날개를 펼쳐서 찬송하지만, 얼굴을 가리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참조. 사 6:2). 스랍, 그룹 모두 하나님 앞에 천사로 하나님을 찬미하는 존재이지만, 어떠한 가시적인 것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닙니다.
구약시대 때는 하나님이 아직, 아동기적(갈 4:3) 경륜 가운데 구약시대 백성들이 있었기 때문에, 좀 더 가시적인 것으로 보여주셨지만, 그렇다고 만나와 메추라기를, 쓴물을 단물로 하셨다고 그 물을 섬겨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을 섬기라는 것이요, 여호와의 전능하심에 의지하라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현존을 구하고, 그의 얼굴빛을 구하라는 것이지, 어떤 가시적인 것에 신성을 주입하여 그 가시적인 것을 섬기라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여기에서 우리는 우리의 천성이 얼마나 우상 숭배에 기울어져 있는지를 배워, 누구에게나 속하는 악행의 죄과를 유대인들에게 떠넘긴 채 죄를 짓고자 하는 헛된 유혹에 빠져 죽음에 이르는 잠을 자고 있는 우리의 모습에서 벗어나도록 하자.
이런 취지로, “열국의 우상은 은금이요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이라”라는 말씀에서(시 135:15; 참조. 시 115:4), 선지자는 우상들이 물질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신들이 아니며 금이나 은으로 된 형상들이라고 추론하고, 우리 각자의 지각에 따라 마음속에 품는 하나님에 대한 모든 생각은 무미건조한 허구라는 사실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이제 우리는 사람들의 손으로 만들어진 작품들은 하나님의 권위가 없다는 언술 양식으로 성경의 여러 곳에서 미신들을 맹렬하게 비난하는 말씀들을(사 2:8; 31:7; 37:19; 호 14:3; 미 5:13) 견지해야 한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1.11.4.
그런데 교황주의자들, 로마 카톨릭주의자들은 어떠합니까? 끊임없이 우상을 만들어 내고, 또 그것을 통하여서 여러 것을 숭배하고, 이미 죽은 성자들을 숭배하고, 마리아를 숭배하고. 칼빈은 그 로마 교황주의자들에게는 타는 불과 같이 신속하게 우상을 찾아 헤매는 마음이 있고, 그것이 지하의 수원에 거센 물이 솟구쳐 오르듯이 그들의 심령 가운데 솟구쳐 오른다고 표현했습니다.
열국의 우상은 은금이요,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이라고 시편은 전하고 있습니다(시 135:15; 참조. 시 115:4). 우상은 허구입니다. 우리 각자의 지각에 따라 마음속에 품는 것을 그저 표현할 뿐입니다. 우리 마음에 있는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무미건조하고 허구인 그러한 형상으로 표현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돌릴 영예가 우상에게 돌려지는 것입니다. 매 순간 죽어가고, 매 순간 쓰러지는 그 가운데, 지상의 가장 작은 인간, 보잘것없는 인간이 또 가장 보잘것없는 어떤 나무 막대기, 나무줄기를 가지고 만든 것을 그의 후손들이 섬기고, 또 그것에 절하고 비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같은 나무로 목재를 만들면 그저 땔감에 불과하고, 그것을 가지고 무슨 기구를 만들면 그저 하나의 천한 도구의 재료에 불과할 텐데, 그것을 신이라고 섬긴다는 것입니다(참조. 사 44:12-17). ‘무한하고 불가해한 하나님을 오 척의 키로 축소시키고자 원하는 것보다 더 어울리지 않는 것은 어디에도 없다.’ 작게 만들어 놓고, 그냥 자기 손으로 빚어 놓고, 그것을 섬기고. (그러나) ‘사람들의 손으로 만들어진 그런 작품에는 하나의 권위도 없고(참조. 사 2:8; 31:7; 37:19; 호 14:3; 미 5:13), 극도의 광증(狂症)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바로 우상숭배자다.’ 이렇게 진단하는 것입니다.
“우상들을 만드는 자들과 그것을 의지하는 자들이 다 그와 같으리로다.” 시편 115편 8절에 말하고 있습니다. 우상을 만드는 것과 그리는 것과 우상을 섬기는 것이 똑같다는 것입니다. 로마 카톨릭은 허무맹랑한 교리를 만들어서, ‘형상들은 무식한 사람들의 책들이다(libros idiotarum esse imagines, 그레고리우스[Gregorius]).’라고 해서, ‘일반 성도들은 말씀을 듣지 못하고 무식하기 때문에, 형상들을 보고 만지고 신앙생활을 하라.’라고 이렇게 교리를 정했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 선지자가 전했듯이, 우상의 가르침은 그저 나무일 뿐이고(렘 10:8), 하박국 선지자가 전했듯이, 부어 만든 우상은 모두 거짓 스승에 불과합니다(합 2:18). 사람들이 형상을 통하여 배우는 것은 전부 거짓입니다. 그러므로 형상을 책들 대신에 섬기라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우상들을 숭배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것들을 하나님께 봉헌하는 것도 불법이라고(nefas esse non modo adorare simulacra, sed Deo collocare) 거리낌 없이 선포한다. 결국 그가 한 말은 오래 전에 엘비라 회의에서 규정되었던 것과 전혀 다르지 않다. 그중 교령 제36장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결정된바, 성전 안에 화상들이 소유되어서는 안 되며, 예배나 숭배의 대상이 벽에 그려져서는 안 된다.”(placuit in templis non haberi picturas; ne quod colitur vel adoratur, in parietibus pingatur) 라고 기록되어 있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1.11.6.
아우구스티누스는 우상들을 숭배하는 것뿐만 아니라 봉헌하는 것도 불법이라고 했습니다(nefas esse non modo adorare simulacra, sed Deo collocare). 그냥 우상을 앞에 두는 것이 이미 우리의 마음을 앗아간다는 것입니다. 성전 아래에 화상(畫像)들, 그린 것이 소유되어서도 안되고, 예배나 숭배의 대상이 벽에 그려져서도 안 된다고 엘비라 회의(Council of Elvira, 305 경), 그 회의에서 이미 선포되었습니다.
이렇듯 ‘우상은 그 어떤 창녀의 화상보다 더 음란한 것이다.’ 칼빈은 이렇게 강하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동정녀의 형상을 만드는 것은 매음굴의 창녀들이 차려입은 옷보다 더 불순하다. 매음굴의 창녀들의 옷이 오히려 더 순수하고 온화하다.’라고 칼빈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런 까닭에 우리는 화상들 역시 거룩한 곳에서 신자 된 백성을 가르치는 방식은 아니라고 응수할 것이다. 하나님은 이러한 쓰레기들과는 전혀 다른 교리로써 그들이 가르침을 받게 되기를 원하신다. 그는 자기의 말씀에 대한 설교와 거룩한 비밀들로써 모든 사람에게 공통된 교리가 제시되도록 명령하셨다. 그러나 자기들의 눈을 굴리면서 우상들을 묵상하는 사람들은 자기들의 마음을 쏟아 교리를 익히는 부지런함을 거의 보이지 않는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1.11.7.
하나님은 이러한 우상들을 멀리하게 하고, 이러한 쓰레기들을 다 걷어내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르침을 받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그 설교에 거룩한 비밀들이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우상은 무식한 사람들의 책이다.’라고 말하지 말고, 무식한 사람들이 있다면 말씀으로 가르쳐서 그들이 하나님을 예배하고 섬기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교황주의자들이 일컫는, 자기들의 무지로 말미암아 오직 우상들로부터만 가르침을 받는 것이 허용되는 ‘무식한 사람들’은 누구인가? 실로 그들은 주님이 자기의 제자들로 인정하신 사람들이고, 그가 자기의 하늘 철학의 계시로 고귀하게 되도록 하신 사람들이며, 그가 생명을 살리는 자기 나라의 비밀들로 교육을 받게 하기를 원하시는 사람들이다. 실로 나는 오늘날 이러한 책들이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들이, 그들의 상황이 그러하듯이, 적지 않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묻건대, 이러한 어리석음은 그들이 자기 자신들을 가르치기에 적합했던 그 유일한 교리를 사취당하는 데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면 무엇으로부터 말미암겠는가? 교회들을 다스리는 사람들이 가르치는 권세를 우상들에게 이양하고 자기들은 침묵을 지키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면 다른 이유는 어디에도 없지 않는가? 바울은 복음을 참되게 설교하면서 그리스도가 못 박힌 것이 우리 눈앞에 그려지게 된다고(갈 3:1) 입증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죽으신 것은 십자가에서 우리의 저주를 참으시고(갈 3:13), 자기 몸을 희생제물로 드려 우리의 죄들을 속해 주시고(히 10:10), 그것들을 자기의 피로 씻어 주시며(계 1:5), 끝내 우리를 하나님 아버지와 화목하게 하시기 위함이라는(롬 5:10) 사실에 대해서 우리가 순수하고 충실한 가르침을 받아 새기게 되었더라면, 수많은 십자가들이 나무나 돌이나 은이나 금으로 만들어져 교회 여기 저기에 세워져야 했을 필요가 있었겠는가? 그들은 천 개의 나무나 돌 십자가들보다 이 한 가지 사실로부터 더 많이 배울 수 있었을 텐데 실상 그렇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추측컨대 탐욕스런 사람들은 마음과 눈을 하나님의 어떤 말씀보다 금과 은에 더욱 집요하게 부착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1.11.7.
바울은 복음을 참되게 설교하면서,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이 우리의 눈앞에 밝히 보여 알려져 있다’고 했습니다(갈 3:1). “누가 너희를 꾀더냐!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이 밝히 보이거늘.” 이것이 그저 돌로 만든, 나무로 만든 십자가를 뜻하는 것입니까? 그것이 아닙니다. 바로 갈라디아서 3장 2절에 보면, ‘성령을 율법의 행위로 받았느냐? 듣고 믿음으로 받았느냐?’ 곧, 갈라디아 3장 1절에,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이 밝히 보이는 것은 보혜사 성령이 임하여서, 그 믿음으로, 그 말씀으로, 그 들음으로 십자가를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칼빈은 ‘천개의 나무나 돌 십자가들보다, 갈라디아서 3장 1절, 이 한마디 말씀의 교훈으로부터 더 많은 것을 배우게 된다.’라고 했습니다.
이제 이 부분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첫째, 자존하시는 하나님은 자신이 자기에 대한 유일하고 적합한 증인이시므로, 그의 신성을 자의적으로 형상화하는 것은 야수적인 어리석음입니다.
둘째, 하나님을 우리의 지각으로 마음에 품는 모든 생각은 허구이고, 그 생각을 표현하고자 손으로 만든 작품은 아무 권위도 없습니다.
셋째, 우상을 숭배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것을 봉헌하는 것도 불법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한다 하면서 무엇 하나 슬쩍 갖다 놓는 것도 우상숭배라는 것입니다.
넷째, 우상은 교리와 설교를 대체하지 못하기 때문에, ‘우상은 무식한 사람들의 책이다.’라고 하면서, 우상을 통하여 하나님을 섬기라고 하는 로마 카톨릭은 궤변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천개의 돌, 나무 십자가를 만드는 것보다, 성령의 감동, 감화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밝히 보는 그 유익함, 은혜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할 것입니다.
18강 이번 강의 결론
자존하시는 하나님은 자신이 자기에 대한 유일하고 적합한 증인이시므로, 그의 신성을 자의적으로 형상화하는 것은 야수적인 어리석음입니다.
하나님을 우리의 지각으로 마음에 품는 모든 생각은 허구이며, 그 생각을 표현하고자 손으로 만든 작품은 그 무엇도 권위가 없습니다.
우상을 숭배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것을 하나님께 봉헌하는 것도 불법입니다.
우상은 교리와 설교를 대체하지 못하므로, ‘형상들은 무식한 사람들의 책들’이라는 로마 가톨릭의 궤변은 광기입니다.
: 천 개의 나무나 돌 십자가보다, 복음 설교를 통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밝히 보게 됩니다.
18강 | 1.11.1-7. (1권 281-293페이지)
우상을 만드는 것과 섬기는 것 모두 금함
칼빈은 『기독교 강요』 1권 13장에서 ‘삼위일체론’을 논하기 전에, 11장과 12장을 할애해서 먼저 우상에 대해서 논하고 있습니다.
『기독교 강요』 1권 11-12장은 우상을 금하는 제2계명에 주안점을 두고 하나님을 아는 올바른 지식에 따른 참 예배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논하고 있습니다. 이 점에서 이어서 전개되는 삼위일체, 창조, 섭리 교리의 서론에 해당한다고 볼 것입니다. 이 부분은 십계명의 장(章)에서 제2계명을 다루는 『기독교 강요』 2권 8장 17절과 함께 읽어야 합니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1.11.1. 각주 197.
우상은 죽은 것이요, 우상은 만들어진 피조물이요, 우상은 유한한 것입니다. 이에 비해서 하나님은 무한하시고, 스스로 계신 영이시며, 살아계신 ‘삼위일체’이십니다.
칼빈이 13장에서 ‘삼위일체론’을 논하기 전에 먼저 11장, 12장에서 우상을 논한 것은 마치 ‘하나님 외에 그 무엇도 다 우상이다. 유한한 것은 우상이다. 피조된 것은 우상이다. 죽은 것은 우상이다. 오직 하나님만 살아계신 분이다. 영원하신 분이다. 무한하신 분이다.’ 이것을 강조하기 위한 교리적 배치가 아닌가 라고 우리가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이미 우리는 일반계시를 논하면서도, 만물을 통하여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분명히 보여 알려졌으나 우준하게 되어서 하나님을 예배치도 않고 감사치도 않고 오히려 우상을 만드는, 그러한 금수를 섬기는 이러한 인류의 모습에 대해서 보았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는 자는 그저 중립에 있는 자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거부하고, 하나님께 반역하고, 그리고 예배를 훼방하고, 예배를 부인하고, 나아가서는 다른 신을 섬기고, 또 다른 신을 섬기다가 허무해지면 결국은 자기 자신을 섬기고, 황제를 섬기고, 이러한 모습은 이미 우리가 보았습니다.
사람들이 신성에 대해 자신들의 고유한 소견(divinitatis propria opinione)을 가지고 만들어 낸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수포로 돌아가게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 자신이 자기에 대한 유일하고 적합한 증인이시기 때문이다(quia Deus ipse solus est de se idoneus testis).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1.11.1.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하나님이 친히 알려주시는 방법에 따른 것’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은 어떨 것이라고 마음속에 그리고, 그러한 소견을 가지고 하나님께 예배드린다, 이것은 이미 허무한 것입니다. 예배는 하나님이 받으시는 것이고, 하나님의 뜻에 합해야 됩니다. 하나님은 그 무엇의 질서보다 ‘예배의 질서’를 귀하게 여기십니다. 하나님 자신이 자기에 대한 유일하고 적합한 증인이시기 때문에, 사실상 하나님은 스스로 자신을 계시하시고, 스스로 영광 가운데 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치 우리 인생이 그 무엇을 하여서 하나님의 부족한 영광을 채우듯이, 우리가 그 무엇을 해야 하나님이 완전한 영예를 갖게 되기라도 하듯이, 그렇게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만물은 하나님이 지으신바 된 것이요, 그 생멸(生滅)이, 그 존재와 그 사라짐이 다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있습니다. 하나님을 섬긴다 하면서 피조물로 가시적 형상을 만들고, 나무나 돌이나 금이나 은이나 어떤 죽은 썩을 물질로, 후패(朽敗)하는 것으로 하나님을 섬긴다면, 이것은 ‘짐승과 같은 우매한 짓이다. 야수적인 어리석음이다.’라고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아니하십니다. 하나님은 묘사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계시고, 만유의 만유이십니다. 그러므로 어떤 형상으로도 하나님의 신성을 부착(附着)시킬 수가 없습니다. 무엇을 만들어서 그 안에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집어넣을 수도 없고, 또 하나님의 어떠하심이 어떤 형상으로 드러날 일도 만무합니다.
출애굽기 20장 4절에,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이 말씀에서 주목되는 것은 형상도 만들지 말고, 우상도 만들지 말고, 어떤 것도 만들지 마는데, ‘너를 위하여 만들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이 무엇일까요? 스스로 자기가 옳다 하는 바로, 그렇게 하나님을 섬기거나, 하나님을 예배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혹은 태양을, 별을 숭배하고, 그리고 만신을, 만물을 섬기는 그러한 모든 습성이 우리 인간에게는 남아 있습니다. 사람을 만들거나 그리거나, 무엇을 빚어내거나, 끝없이 형상화하는 그런 버릇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형상에 뭔가 자기 마음에 만들어진 신성을 주입해서, 그것을 섬기는 그러한 우매함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명기 4장 12절의 말씀에서와 같이, 하나님의 말소리는 우리에게 들려지시나 형상은 보여주지 아니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깊이 삼가고, 신명기 4장 15절, 그리고 자기를 위해 어떤 형상으로든 우상을 새겨 만들지 말아야 됩니다. 신명기 4장 16절에 그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상에 대해서 그 어떤 선지자보다 이사야는 우상을 금할 것을 반복해서 선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형체가 없는 분이시기 때문에, 형체가 있는 물질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이요, 비가시적인 분이 가시적인 형상으로, 영적인 분이 생명이 없는 것으로, 무한하신 분이 나무나 돌이나 황금 조각과 동화(同化)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우상은, 조상(彫像)은, 형상은 하나님의 엄위에 어울리지 않고, 천하고 불합리한 허구에 다름없다.’라고 이사야는 증거하고 있습니다(참고. 사 40:18-20; 41:7, 29; 45:9; 46:5-7).
바울도 사도행전 17장 29절에, 그 마게도냐 아가야의 아테네에서, “이와 같이 하나님의 소생이 되었은즉 하나님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길 것이 아니리라.”(행 17:29) 라고 이렇게 선포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실로 하나님은 자기 신성의 현존을 확실한 ‘표징’들로 제시하셨기 때문에, 이것은 하나님의 뜻 가운데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드러내시기 위하여 보이는 표정을 사용하기도 하십니다. 떨기나무 가운데 불꽃 가운데 하나님이 현존하시거나, 또 하나님의 능력을 반석의 물을 통하여서, 홍해를 가름을 통하여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통하여 보이시거나, 그의 현존을 구름 기둥, 불 기둥으로 드러내시듯이, 마치 하나님은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여 보이신 것처럼(참조. 출 33:11), 그렇게 자신을 드러내시기도 하십니다.
그러나 잘 아실 것은 그러한 보이는 것들이 불가해한 하나님의 본질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현존을 드러내기 위한 가시적으로 제시된 어떤 표징들일 뿐, 그것이 하나님의 본질을 담고 있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구름과 연기와 불길 가운데 자기 자신을 드러내시기도 하시지만, 그것들이 하나님의 본성을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나타나셨다고 해서 비둘기가 성령일리 만무합니다. 하나님이 바람으로도 성령의 그러한 권능을 드러내시지만, 바람에 하나님의 신성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오히려 피조물을 통하여 하나님의 현존을 드러내시는 것은, 모든 사람은 하나님을 섬겨야 되지 피조물을 섬겨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반대 증거가 된다는 것을 우리는 또한 생각해야 됩니다.
속죄소에 하나님의 현존이 있고 그 법궤에 말씀이 있습니다. 그 찬송은 마음을 들어서 하나님께 올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속죄소의 그룹들(Cherubim)은 날개를 펼쳐서 찬송하지만, 얼굴을 가리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참조. 사 6:2). 스랍, 그룹 모두 하나님 앞에 천사로 하나님을 찬미하는 존재이지만, 어떠한 가시적인 것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닙니다.
구약시대 때는 하나님이 아직, 아동기적(갈 4:3) 경륜 가운데 구약시대 백성들이 있었기 때문에, 좀 더 가시적인 것으로 보여주셨지만, 그렇다고 만나와 메추라기를, 쓴물을 단물로 하셨다고 그 물을 섬겨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을 섬기라는 것이요, 여호와의 전능하심에 의지하라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현존을 구하고, 그의 얼굴빛을 구하라는 것이지, 어떤 가시적인 것에 신성을 주입하여 그 가시적인 것을 섬기라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여기에서 우리는 우리의 천성이 얼마나 우상 숭배에 기울어져 있는지를 배워, 누구에게나 속하는 악행의 죄과를 유대인들에게 떠넘긴 채 죄를 짓고자 하는 헛된 유혹에 빠져 죽음에 이르는 잠을 자고 있는 우리의 모습에서 벗어나도록 하자.
이런 취지로, “열국의 우상은 은금이요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이라”라는 말씀에서(시 135:15; 참조. 시 115:4), 선지자는 우상들이 물질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신들이 아니며 금이나 은으로 된 형상들이라고 추론하고, 우리 각자의 지각에 따라 마음속에 품는 하나님에 대한 모든 생각은 무미건조한 허구라는 사실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이제 우리는 사람들의 손으로 만들어진 작품들은 하나님의 권위가 없다는 언술 양식으로 성경의 여러 곳에서 미신들을 맹렬하게 비난하는 말씀들을(사 2:8; 31:7; 37:19; 호 14:3; 미 5:13) 견지해야 한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1.11.4.
그런데 교황주의자들, 로마 카톨릭주의자들은 어떠합니까? 끊임없이 우상을 만들어 내고, 또 그것을 통하여서 여러 것을 숭배하고, 이미 죽은 성자들을 숭배하고, 마리아를 숭배하고. 칼빈은 그 로마 교황주의자들에게는 타는 불과 같이 신속하게 우상을 찾아 헤매는 마음이 있고, 그것이 지하의 수원에 거센 물이 솟구쳐 오르듯이 그들의 심령 가운데 솟구쳐 오른다고 표현했습니다.
열국의 우상은 은금이요,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이라고 시편은 전하고 있습니다(시 135:15; 참조. 시 115:4). 우상은 허구입니다. 우리 각자의 지각에 따라 마음속에 품는 것을 그저 표현할 뿐입니다. 우리 마음에 있는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무미건조하고 허구인 그러한 형상으로 표현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돌릴 영예가 우상에게 돌려지는 것입니다. 매 순간 죽어가고, 매 순간 쓰러지는 그 가운데, 지상의 가장 작은 인간, 보잘것없는 인간이 또 가장 보잘것없는 어떤 나무 막대기, 나무줄기를 가지고 만든 것을 그의 후손들이 섬기고, 또 그것에 절하고 비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같은 나무로 목재를 만들면 그저 땔감에 불과하고, 그것을 가지고 무슨 기구를 만들면 그저 하나의 천한 도구의 재료에 불과할 텐데, 그것을 신이라고 섬긴다는 것입니다(참조. 사 44:12-17). ‘무한하고 불가해한 하나님을 오 척의 키로 축소시키고자 원하는 것보다 더 어울리지 않는 것은 어디에도 없다.’ 작게 만들어 놓고, 그냥 자기 손으로 빚어 놓고, 그것을 섬기고. (그러나) ‘사람들의 손으로 만들어진 그런 작품에는 하나의 권위도 없고(참조. 사 2:8; 31:7; 37:19; 호 14:3; 미 5:13), 극도의 광증(狂症)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바로 우상숭배자다.’ 이렇게 진단하는 것입니다.
“우상들을 만드는 자들과 그것을 의지하는 자들이 다 그와 같으리로다.” 시편 115편 8절에 말하고 있습니다. 우상을 만드는 것과 그리는 것과 우상을 섬기는 것이 똑같다는 것입니다. 로마 카톨릭은 허무맹랑한 교리를 만들어서, ‘형상들은 무식한 사람들의 책들이다(libros idiotarum esse imagines, 그레고리우스[Gregorius]).’라고 해서, ‘일반 성도들은 말씀을 듣지 못하고 무식하기 때문에, 형상들을 보고 만지고 신앙생활을 하라.’라고 이렇게 교리를 정했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 선지자가 전했듯이, 우상의 가르침은 그저 나무일 뿐이고(렘 10:8), 하박국 선지자가 전했듯이, 부어 만든 우상은 모두 거짓 스승에 불과합니다(합 2:18). 사람들이 형상을 통하여 배우는 것은 전부 거짓입니다. 그러므로 형상을 책들 대신에 섬기라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우상들을 숭배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것들을 하나님께 봉헌하는 것도 불법이라고(nefas esse non modo adorare simulacra, sed Deo collocare) 거리낌 없이 선포한다. 결국 그가 한 말은 오래 전에 엘비라 회의에서 규정되었던 것과 전혀 다르지 않다. 그중 교령 제36장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결정된바, 성전 안에 화상들이 소유되어서는 안 되며, 예배나 숭배의 대상이 벽에 그려져서는 안 된다.”(placuit in templis non haberi picturas; ne quod colitur vel adoratur, in parietibus pingatur) 라고 기록되어 있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1.11.6.
아우구스티누스는 우상들을 숭배하는 것뿐만 아니라 봉헌하는 것도 불법이라고 했습니다(nefas esse non modo adorare simulacra, sed Deo collocare). 그냥 우상을 앞에 두는 것이 이미 우리의 마음을 앗아간다는 것입니다. 성전 아래에 화상(畫像)들, 그린 것이 소유되어서도 안되고, 예배나 숭배의 대상이 벽에 그려져서도 안 된다고 엘비라 회의(Council of Elvira, 305 경), 그 회의에서 이미 선포되었습니다.
이렇듯 ‘우상은 그 어떤 창녀의 화상보다 더 음란한 것이다.’ 칼빈은 이렇게 강하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동정녀의 형상을 만드는 것은 매음굴의 창녀들이 차려입은 옷보다 더 불순하다. 매음굴의 창녀들의 옷이 오히려 더 순수하고 온화하다.’라고 칼빈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런 까닭에 우리는 화상들 역시 거룩한 곳에서 신자 된 백성을 가르치는 방식은 아니라고 응수할 것이다. 하나님은 이러한 쓰레기들과는 전혀 다른 교리로써 그들이 가르침을 받게 되기를 원하신다. 그는 자기의 말씀에 대한 설교와 거룩한 비밀들로써 모든 사람에게 공통된 교리가 제시되도록 명령하셨다. 그러나 자기들의 눈을 굴리면서 우상들을 묵상하는 사람들은 자기들의 마음을 쏟아 교리를 익히는 부지런함을 거의 보이지 않는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1.11.7.
하나님은 이러한 우상들을 멀리하게 하고, 이러한 쓰레기들을 다 걷어내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르침을 받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그 설교에 거룩한 비밀들이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우상은 무식한 사람들의 책이다.’라고 말하지 말고, 무식한 사람들이 있다면 말씀으로 가르쳐서 그들이 하나님을 예배하고 섬기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교황주의자들이 일컫는, 자기들의 무지로 말미암아 오직 우상들로부터만 가르침을 받는 것이 허용되는 ‘무식한 사람들’은 누구인가? 실로 그들은 주님이 자기의 제자들로 인정하신 사람들이고, 그가 자기의 하늘 철학의 계시로 고귀하게 되도록 하신 사람들이며, 그가 생명을 살리는 자기 나라의 비밀들로 교육을 받게 하기를 원하시는 사람들이다. 실로 나는 오늘날 이러한 책들이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들이, 그들의 상황이 그러하듯이, 적지 않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묻건대, 이러한 어리석음은 그들이 자기 자신들을 가르치기에 적합했던 그 유일한 교리를 사취당하는 데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면 무엇으로부터 말미암겠는가? 교회들을 다스리는 사람들이 가르치는 권세를 우상들에게 이양하고 자기들은 침묵을 지키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면 다른 이유는 어디에도 없지 않는가? 바울은 복음을 참되게 설교하면서 그리스도가 못 박힌 것이 우리 눈앞에 그려지게 된다고(갈 3:1) 입증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죽으신 것은 십자가에서 우리의 저주를 참으시고(갈 3:13), 자기 몸을 희생제물로 드려 우리의 죄들을 속해 주시고(히 10:10), 그것들을 자기의 피로 씻어 주시며(계 1:5), 끝내 우리를 하나님 아버지와 화목하게 하시기 위함이라는(롬 5:10) 사실에 대해서 우리가 순수하고 충실한 가르침을 받아 새기게 되었더라면, 수많은 십자가들이 나무나 돌이나 은이나 금으로 만들어져 교회 여기 저기에 세워져야 했을 필요가 있었겠는가? 그들은 천 개의 나무나 돌 십자가들보다 이 한 가지 사실로부터 더 많이 배울 수 있었을 텐데 실상 그렇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추측컨대 탐욕스런 사람들은 마음과 눈을 하나님의 어떤 말씀보다 금과 은에 더욱 집요하게 부착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1.11.7.
바울은 복음을 참되게 설교하면서,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이 우리의 눈앞에 밝히 보여 알려져 있다’고 했습니다(갈 3:1). “누가 너희를 꾀더냐!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이 밝히 보이거늘.” 이것이 그저 돌로 만든, 나무로 만든 십자가를 뜻하는 것입니까? 그것이 아닙니다. 바로 갈라디아서 3장 2절에 보면, ‘성령을 율법의 행위로 받았느냐? 듣고 믿음으로 받았느냐?’ 곧, 갈라디아 3장 1절에,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이 밝히 보이는 것은 보혜사 성령이 임하여서, 그 믿음으로, 그 말씀으로, 그 들음으로 십자가를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칼빈은 ‘천개의 나무나 돌 십자가들보다, 갈라디아서 3장 1절, 이 한마디 말씀의 교훈으로부터 더 많은 것을 배우게 된다.’라고 했습니다.
이제 이 부분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첫째, 자존하시는 하나님은 자신이 자기에 대한 유일하고 적합한 증인이시므로, 그의 신성을 자의적으로 형상화하는 것은 야수적인 어리석음입니다.
둘째, 하나님을 우리의 지각으로 마음에 품는 모든 생각은 허구이고, 그 생각을 표현하고자 손으로 만든 작품은 아무 권위도 없습니다.
셋째, 우상을 숭배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것을 봉헌하는 것도 불법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한다 하면서 무엇 하나 슬쩍 갖다 놓는 것도 우상숭배라는 것입니다.
넷째, 우상은 교리와 설교를 대체하지 못하기 때문에, ‘우상은 무식한 사람들의 책이다.’라고 하면서, 우상을 통하여 하나님을 섬기라고 하는 로마 카톨릭은 궤변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천개의 돌, 나무 십자가를 만드는 것보다, 성령의 감동, 감화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밝히 보는 그 유익함, 은혜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할 것입니다.
18강 이번 강의 결론
자존하시는 하나님은 자신이 자기에 대한 유일하고 적합한 증인이시므로, 그의 신성을 자의적으로 형상화하는 것은 야수적인 어리석음입니다.
하나님을 우리의 지각으로 마음에 품는 모든 생각은 허구이며, 그 생각을 표현하고자 손으로 만든 작품은 그 무엇도 권위가 없습니다.
우상을 숭배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것을 하나님께 봉헌하는 것도 불법입니다.
우상은 교리와 설교를 대체하지 못하므로, ‘형상들은 무식한 사람들의 책들’이라는 로마 가톨릭의 궤변은 광기입니다.
: 천 개의 나무나 돌 십자가보다, 복음 설교를 통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밝히 보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