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발표 | 김규섭 박사 | 칼빈의 바울 해석에 관한 소고: 존 바클레이와 존 칼빈의 저작에 나타난 은혜의 개념

관리자
조회수 53




한국칼빈-개혁신학연구소
제1회 정기학술세미나

제2발표 | 김규섭 박사


칼빈의 바울 해석에 관한 소고
: 존 바클레이와 존 칼빈의 저작에 나타난 은혜의 개념


• 세미나 논문 pdf 자료 링크
: https://drive.google.com/file/d/1gkoDu2sFJOXY7fGByQ0e_dXCbORMu2gE/view?usp=drive_link

     제목은 “칼빈의 바울 해석에 관한 소고”입니다. 존 바클레이(John M.G. Barclay)와 존 칼빈의 저작에 나타난 은혜의 개념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제가 읽으면서 제가 중간중간 설명하는 방식으로 하도록 하겠습니다. 
     서양 학계에서 자끄 데리다와 장 뤽 마리옹의 선물 개념에 대한 논쟁에서 알 수 있듯이, 선물의 개념이 마르셀 모스와 마르틴 하이데거 이후 중요한 사유의 영역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선물에 대한 논의는 2000년 이후 처음 선물 신학이라는 제목으로 존 밀방크와 캐서린 태너 등이 논의와 더불어서 신학계에서도 시작되었고, 그리고 토드 빌링스와 같은 학자들에 의해서 칼빈신학과 관련하여 이 주제가 다루어진 바 있습니다. 바울 학계에서 선물과 은혜에 대한 논의는 제임스 해리슨과 제임스 드실바가 2000년대 초반에 논의한 것이 있지만, 가장 중요한 논의는 아마도 존 바클레이의 논의일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오늘 이 논문에서는 칼빈, 존 바클레이, 바울이 3자에 대한 좀 논의를 하고 싶습니다. 바클레이의 저작이 『바울과 선물』 인데요. 왜 바울과 은혜가 아니고 바울과 선물이냐면 헬라어에서 ‘카리스’는 증여라는 뜻이 있거든요. 은혜라는 뜻도 있지만 증여, 선물이란 뜻도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도 은혜라는 뜻이기도 하지만 선물이라는 뜻 등으로 혹은 증여라는 뜻으로도 ‘카리스’라는 개념을 사용을 하거든요. 그래서 존 바클레이가 그의 저작의 제목을 “Paul and the Gift”라고 제목을 정한 것은 그가 ‘카리스’라는 원래 헬라어 개념이 가지고 있는 그 의미를 좀더 드러내기 위해서 이렇게 정한 것 같습니다. 
     존 바클레이가 이렇게 『바울과 선물』이라는 책을 낸 이후에, 사실 이게 대작이었었거든요, 이게 바울 학계에서는 활발한 토론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런데 한국 학계에서는 제가 검색을 해보니까 존 바클레이의 은혜의 개념에 대해서 직접 반응한 국내 학자의 저작은 서평 한 편이 있고 단지 부분적으로만 존 바클레이를 언급한 논문들이 존재합니다. 그래서 제가 존 바클레이의 저작과 그의 은혜 개념에 대해서 평가를 하면서 그 기준을 칼빈에 대해서 살펴보고 칼빈의 은혜 개념과 그리고 바울의 은혜 개념을 생각을 해보면서 이 대작이 지니는 함의를 직접 고려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약간 헷갈리실까 봐 제가 먼저 바클레이에 대해서 말씀드리면, 우리나라에 윌리엄 바클레이가 좀 잘 알려져 있어서 윌리엄 바클레이랑 존 바클레이는 무슨 관계냐, 동일인이냐? 동일인은 일단 아닙니다. 아들이냐? 아들도 아닌데 그냥 이름만 같은 겁니다. 그러니까 헷갈리지 않으시도록 제가 바클레이에 대해서 먼저 말씀드립니다. 
     바울신학에 대한 해석이 다양해져 왔습니다. 그 이유는 E.P. 샌더스(E.P. Sanders)의 “Paul and Palestinian Judaism”(바울과 팔레스타인 유대교)가 1977년에 출간이 되었고, 샌더스의 주요 논제 중 하나가 이것이었죠. 유대교는 율법주의 종교가 아니었고, 은혜의 종교였었다. 그렇게 샌더스가 얘기를 한 다음에 그러면 바울 학계의 주요 질문 중 하나는 이것이 되었습니다. ‘바울이 유대교 율법주의에 반대한 것이 아니라면, 도대체 그는 무엇에 반대했는가?’ 갈라디아서를 보시면 뭔가에 반대하여 말하고 있잖아요. 우리는 그동안 그것을 유대교 율법주의에 반대했던 것으로 해석을 했는데 그러면 뭘 반대한 거냐? 그게 주요 토론거리 중 하나였습니다. 이것에 대해서 상당히 다양하게 답변이 주어졌고 샌더스 이후에 우리가 알고 있는 제임스 던(J.D.G. Dunn)이나 톰 라이트(N.T. Wright) 같은 분들은 바울이 유대교 배타주의에 반대한 것이라고 했는데, 그것을 요새 새 관점이라고 하죠. 
     그런 논의가 계속되고 있다가 최근에 바울 학계에서는 옛 관점이냐 새 관점이냐에 대한 토론보다는 최근에는 제3의 관점, 새 관점도 아니고 옛 관점도 아닌 혹은 새 관점과 옛 관점 중간에 있는 뭔가에 대해서 논의를 하고 있습니다. 근데 후자의 관점에서 새 관점도 아니고 옛 관점도 아닌 그런 관점의 대표적인 해석자 중에 하나는 존 바클레이입니다. 우리는 바클레이의 가장 중요한 저작 중 하나인 “Paul and the Gift”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그동안 토론하지 않았기 때문에 먼저 존 바클레이의 은혜 개념을 고려하고 그의 해석과 칼빈의 해석을 좀 비교하는 방식으로 좀 생각을 해보고 싶습니다.
     바클레이의 새로운 점 중의 하나는 은혜라는 개념을 여섯 가지로 분류를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섯 가지가 뭐냐면, 42페이지 밑에 나와 있듯이 초충만성, 단일성, 우선성, 비상응성, 유효성, 비순환성이라고 하는 이 개념입니다. 그러니까 그동안 은혜라고 하면 값없는 무언가, 뭔가 뭉뚱그려서 그동안 생각이 되어 왔던 것으로 여겨졌지만 바클레이는 분류를 합니다. 그래서 마르시온, 펠라기우스, 어거스틴, 루터, 칼빈, 이렇게 교회사에서 중요한 성경 해석자들이 은혜의 여섯 가지 측면 중에서 어떤 측면을 부각시켰는지가 그의 저작의 전반부에서 등장을 하고 있거든요. 
     그것을 위해서 먼저 그의 여섯 가지 기준이 무엇인지를 좀 생각을 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초충만성입니다. 초충만성은 선물에 넘쳐 흐르는 성격을 지칭합니다. 두 번째는 단일성입니다. 단일성은 수여자의 유일하고 배타적인 작동 방식은 자비 또는 선함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선물 수여자가 다른 의도를 배후에 지니지 않고 선한 의도를 가지고 있다는 점을 나타냅니다. 우선성은 선물이 주어지는 시점과 연관됩니다. 선물이 증여가 선물을 받는 자의 요구보다 우선 발생한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이 측면은, 바클레이가 말하였듯이, 주로 예정이란 개념과 연결됩니다. 비상응성은 선물이 합당하고 적합한 자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받는 자의 가치를 고려하지 않고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뒤에 보면 나오겠지만, 바클레이가 바울의 은혜 개념에서 가장 중요하다라고 여기는 것, 그러니까, 바울은 은혜의 개념에서 이 부분을 방점 찍는다고 할 때 비상응성이라는 측면을 매우 바클레이는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바클레이 특징 중의 하나를 우선성과 비상응성을 구분한다는 겁니다. 바클레이가 아까 제가 말씀드렸다시피 E.P. 샌더스를 비판했을 때 E.P. 샌더스는 유대교의 은혜의 종교라고 주장을 했지만, 그 은혜가 무슨 은혜라고 구체적으로 정의하지 않았고, 특히 우선성과 비상응성을 구분하지 않았다는 것이 바클레이가 샌더스를 비판할 때 주된 요지 중의 하나거든요. 유효성은 선물이 원래 그 자체가 의도한 의도대로 주어지며, 성도들의 동인 안에서(within the agency of believers) 하나님께서 원인적 동인이라는 것입니다. 즉, 선물은 원래 주어진 의도대로 선물을 받는 자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원리입니다. 비순환성은 선물이 상호성, 호혜성과 무관하고 보답이라는 개념과 관련이 없다라는 것입니다. 바클레이는 답례를 바라지 않는 순수한 선물의 개념은 칸트적 개념으로서 기본적으로 근대적 발명품이라고 그렇게 말합니다. 사실 이게 아시겠지만 마르셀무스가 예전에 그렇게 얘기했던 겁니다. 선물과 은혜의 이러한 순환적인 측면에 대해서 계속 토론이 되어 왔고, 바클레이는 그것에 대한 연장선상에 있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바클레이는 바울에 있어서 선물은 비순환성을 나타내지 않는다고 봅니다. 
     이러한 은혜의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서 바클레이는 극대화라는 개념을 사용하면서 이 개념은 정의의 명확성이나 수사적 또는 이데올로기적 이점을 위해 개념을 끝까지 또는 극단적으로 끌어내는 경향을 지칭합니다. 이 극대화라는 개념이 바로 그 바클레이가 은혜라는 개념을 설명할 때 굉장히 특징적인 개념이거든요. 그런데 이걸 어떻게 번역할까, 극대화라고 하면, 일단 한국어 번역으로는 극대화라고 되어 있습니다. 저는 그냥 이것을 ‘방점을 찍는다’라고 하면 어떨까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한국어 번역, 새물결플러스에서 나온 『바울과 선물』의 한국어 번역본에는 ‘극대화’라고 되어 있지만, 저는 극대화라고 하면 무슨 말인지 약간 좀 이해가 안 되니까 저는 그냥 더 쉽게 말하면, ‘방점을 찍는다’ 정도로로 바꾸면 될 것 같습니다. 제가 그 용어를 사용하겠습니다. 
     이러한 개념을 사용하면서 바클레이는 은혜의 어떤 측면이 극대화되어 이해되었는지를 관찰합니다. 그래서 은혜의 개념이 교회사에서 각기 다르 계속되었다고 바클레이는 주장을 합니다. ‘먼저 마르시온은 은혜의 단일성을 극대화하였다. 펠라기우스는 은혜의 우선성과 초충만성을 극대화하였다. 반면 어거스틴은 우선성, 비상응성, 유효성을 극대화하였다.’ 이렇게 말하면서 이러한 은혜에 대한 새로운 정의에 따라서 바클레이는 제2성전 유대교가 언약적 신율주의(covenantal nomism)로서의 재정의에 따라 은혜의 종교였다는 샌더스의 주장에 관하여 은혜의 개념이 다양성을 통하여 이러한 주장을 극복합니다. 즉, 샌더스의 주장과 같이 제2성전 유대교는 은혜의 속성이 분명히 존재하지만, 은혜의 우선성과 비상성을 구분하지 못했고, 모든 은혜의 속성이 비상응적 은혜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즉, 샌더스는 언약적 신율주의의 은혜 개념에서 우선성과 비상응성을 구분하지 않고 이 두 가지 관점에서 조망하였습니다. 바클레이는 제임스 던의 바울 해석도 이런 관점에 따라서 비판합니다. 
     던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그 던입니다.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이 반대한 것은 이방인 개종자가 유대교의 관점에서 요구되는 문화적 관점과 관련이 있다고 말합니다. 즉,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둔 초점을 다음과 같이 던은 설명합니다. “갈라디아서를 역사적으로 특정한 맥락에 놓고, 개인이 아니라 집단(여기서는 민족) 관계에 초점을 맞추고, 바울이 ‘유대교’와 거리를 두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인다는 점이 던의 ‘새로운 관점’ 읽기의 특징이다.” 곧, 던에 따르면 바울이 할례에 반대한 이유는 ‘행위의 의’를 적립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할례는 ‘유대인의 정체성을 구현하고 표현’하는 것이지만, 이방인 개종자들이 할례를 채택하려면 ‘유대인 개종자의 지위에 이방인 특유의 정체성을 완전히 동화시키고 흡수’해야 하는데, 이는 ‘유대인의 이데올로기적, 민족주의적 제국주의’의 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할례를 반대한 이유는 행위의 의를 적립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유대교 민족주의 혹은 배타주의에 반대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이 일단 던의 특징이었습니다. 바클레이는 던을 비판하는데 던이 은혜의 한 속성, 즉 은혜를 강조하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던이 여기서 주목하는 것은 은혜의 우선성이며, 이것이 은혜에 관한 ‘좋은 개신교 교리’의 본질이라고 가정하고 있다는 점이 현저하다.” 이와 달리 바클레이는 바울의 은혜 개념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러니까 바클레이는 던도 샌더스와 마찬가지로 은혜의 우선성과 비상응성이 두 가지를 구분을 못하고 있다는 것이 비판의 초점이라고 생각을 할 수가 있을 것 같습니다. 
     바클레이는 바울의 은혜 개념을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적 선물은 조건 없는 것이지만, 무조건적인 것은 아니다.” 조건이 없다는 것은 사전 조건이 없는 것이지만 무조건적인 것, 즉 후속 요구가 없는 것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다른 말로 바울은 그의 서신에서 하나님의 선물이 수혜자의 가치에 상응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비상응성을 강조하고 비순환성을 극대화하지 않습니다. 비순환성이라는 것은 받고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것, 그게 비순환성이거든요. 그러니까 바클레이의 주장에 의하면 바울의 은혜 개념은 비상응성이 극대화되어 있고 비순환성은 방점이 찍히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의 갈라디아서 해석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이 자신을 “증여”한 사건이며, 이 사건이 ‘하나님의 은혜’와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바클레이는 단일성과 비순환성을 제외한 모든 은혜의 특성들이 극대화되지만, 특히 비상응성이 은혜의 가장 중요한 특성으로 나타난다라고 봅니다. 바울의 은혜 개념에서 존 바클레이는 비상응성이 극대화된다, 비상응성에 바울은 방점을 찍는다고 말합니다. 이 점에 대해서 로마서를 말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로마서가 갈라디아서와 마찬가지로 은혜의 불일치를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믿을 만한 증거가 있다면, 로마서가 그 특이성이나 비순환성(은혜에 대한 필요한 반응으로서 신자들의 행위의 중요성을 배제하는)도 방점을 찍는다고 가정할 이유가 없다.” 바클레이는 로마서에서 바울이 은혜의 비상응성에 방점을 찍는다고 말하면서 다음과 같이 언급합니다. 46페이지 위에 부분입니다. “영생으로 이끄는 인내를 포함한 선행의 기초이자 틀인 그 적합성의 기초는 신성한 능력의 행위, 즉 그의 변화된 효과들이 심판에서 입증될 죄 많은 인류에게 주어지는 비상응적 선물이다. 이러한 적합하지 않은 선물의 목적은 율법이 없던 이방인들이 율법을 행하는 이들로 변화되고, 죄를 짓던 유대인들이 하나님께 드릴 결실을 맺을 성령으로 할례 받은 종들로 변화되는 것이다.” 결국 바클레이에 의하면 바울의 복음에서 극대화되는 것은 은혜의 비상응성입니다. 바클레이의 중요한 논리 중 하나는 은혜의 우선성이 비상응성을 포함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뒤에서 제가 바클레이의 해석에 비평하고자 하는 부분이 이 부분이거든요. 바클레이는 은혜의 우선성이라는 측면과 비상응성이라는 측면을 굉장히 날카롭게 구분합니다. 근데 저는 이 두 가지가 겹칠 때가 있다, 제가 나중에 말씀드리지만, 인간론적 비관주의가 나타날 때 은혜의 우선성과 비상응성은 겹쳐질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어쨌든 바클레이는 은혜의 우선성과 비상응성을 구분하여 제2성전 유대교와 바울, 그리고 이후의 해석자들의 견해를 분석합니다. 은혜의 우선성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은혜가 비상응적이기 때문에 은혜의 우선성은 어디에서나 전제되어 있지만 바울은 호다요트 혹은 어거스틴과 칼빈의 신학에서와 같이 예정론적 결론을 거의 내리지 않는다. 몇몇 바울의 본문들은 신자의 의지와 행위에서 은혜의 유효성을 암시하지만, 이러한 극대화는 갈라디아서와 로마서에서 특별한 관심의 대상이 아니다.” 
     바클레이는, 제가 바클레이의 책을 보면서 받게 된 인상은, 은혜의 우선성에 대해서 말할 때 주로 거의 예정과 관련돼서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근데 저는 은혜의 우선성이라는, 하나님께서 먼저 수여하시는 어떤 그런 선물이라는 측면에서 은혜의 우선성이 예정이라는 측면에만 나타나지는 않는 것 같거든요. 그래서 제가 뒷부분에서 그 부분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이와 같이 어거스틴-칼빈과 달리 바클레이는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은혜의 우선성과 유효성이 큰 관심의 대상이 아니라고 여긴다. 은혜의 우선성이 전제되어 있지만, 칼빈과 같은 예정론적 결론 가운데 은혜의 우선성이 이해되지 않는다고 여기며, 은혜의 유효성도 또한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특별히 구체적으로 다루어지지 않는다고 여깁니다. 바클레이는 은혜의 우선성과 비상응성을 구분하지만, 바울에게서 “은혜는 비상응적이므로 은혜의 우선성은 어디서나 전제된다”라고 말합니다. 
     반면 바클레이는 은혜의 유효성과 우선성을 구분하면서 유효성이 은혜에 있어서 갈라디아서와 로마서에서 주된 방점인 비상응성을 반드시 수반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유효성과 우선성이 비상응성과 겹치는 영역이 존재할 수도 있습니다. 또한 바클레이는 은혜의 우선성의 측면을 예정론과 결부시키는 측면이 존재합니다. 그러나 ‘은혜의 우선성은 예정론 이외의 다른 측면도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너무 은혜의 우선성이라는 측면을 예정이라는 측면에서만 한정해서 바클레이가 바울을 읽고 있을 때 그렇게 해석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반면 바클레이는 이런 측면들을 상세하게 다루지 않습니다. 특히 바클레이의 로마서-갈라디아서 해석에서 바클레이가 비상응성 이외에 유효성과 우선성의 측면을 구체적으로 고려하지 않는 것을 발견합니다. 우리는 아래에서 어거스틴-칼빈의 은혜에 관한 해석들을 고려하고 이후에 바울의 본문을 다루면서 바클레이의 해석을 재고하게 될 것입니다. 또한 아래에서 바클레이의 은혜의 범주에 대해서 재고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칼빈에 대해서 생각을 해 보고 싶습니다. 토드 빌링스(Todd Billings)에 의하면 칼빈의 견해에서 하나님에 대한 순종은 마지못한 순종이 아니 자발적 순종으로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반응입니다. 칼빈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는 하나님에 대한 감사의 원인이 되며, 이웃에 대한 봉사에 대한 상호작용으로 이어집니다. 즉 칼빈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는 상호성과 자발성의 상호작용과 연관됩니다. 바클레이는 칼빈이 어거스틴의 은혜 개념의 뒤를 잇고 있다고 여기기 때문에 먼저 어거스틴에 대한 바클레이의 평가를 간략하게 고려할 필요가 있습니다. 바클레이는 어거스틴에게서 자격없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비상응적 선물을 수여하신다는 것이 어거스틴의 은혜 이해에 있어서 중요한 기초라고 여깁니다. 어거스틴은 펠라기우스와의 논쟁을 통해서 은혜의 개념에 대한 극대화를 덧붙입니다. 어거스틴에게 은혜는 공로보다 우선하며 죄인에게 주어지는데, 이러한 우선성과 불일치(비상응성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에 대한 강조는 어거스틴의 삶 전반에 걸친 은혜의 특징입니다. 또한 바클레이는 다음과 같이 덧붙입니다. “은혜의 유효성은 곧 행위 이전에 믿음의 초기 행위 자체로, 그리고 믿음의 행위 이전에 신자의 예정으로 소급될 것이다. 덧붙여서 은혜의 유효성은 인내의 은사로서 일생을 통해 앞으로 확장되어 자유로운 인간 행위자를 오직 하나님께만 귀속되는 효과적인 행동의 연결 고리로 끌어들일 것이다. 따라서 이 은혜는 시간적으로나 논리적으로나 선행하는 것이 되어 인간의 공로를 가능하게 하지만 결코 그것으로부터 말미암지 않는다.”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은혜가 무상으로 수여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은혜가 아니라고 강조하는데, 여기서 “무상으로”라는 말은 그의 은혜의 극대화의 독특한 정점을 전달합니다. 즉, 우선적이고 비상응적이고 유효한 본질, 이것을 어거스틴은 무상 개념을 통하여 전달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반면 칼빈은 그리스도 안에서 무상의 그리고 공로 없이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했습니다. 반면 바클레이는 은혜의 초충만성과 비상응성을 강조하면서 수여의 일방성을 이상화시키는 데에만 칼빈이 관심을 두지 않는다고 언급합니다. 바클레이에 따르면 칼빈은 어거스틴의 영향 아래에서 예정 및 택자의 견인에서 나타나는 은혜의 유효성을 추적합니다. 칼빈은 일반 은총과 특별 은총을 구분합니다. “이 ‘하나님의 일반 은총’은 타락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충만하게 하고 지탱하도록 구성되었으며, 특정한 개인은 타락한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특별 은총”, 즉 특별한 은사와 재능을 받았다.” 바클레이에 의하면 칼빈은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인간적 성취의 무력함을 대조합니다. 칼빈은 신자들의 행위가 비록 의로운 행위일리라도 항상 죄와 더러움으로 얼룩져 있다고 말합니다. 바클레이는 다음과 같이 지적합니다. “이러한 불완전성 때문에 하나님의 은총이 다시 신자들의 행위를 받아들이는 데 결정적인 요소가 된다. 자비로운 아버지처럼 그분은 ‘불완전하고, 반쯤 완성된, 심지어 결함이 있는’ 행위도 기꺼이 받아들이시고, 그리스도의 완전함으로 ‘덮어’ 주신다. 더욱이 더 깊은 수준에서 보면, 우리가 하는 일에서 진정으로 선한 것은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산물이다.” 바클레이에 따르면 칼빈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예정은 이중적이며, 은혜는 의도적으로 그리고 차별적으로 분배됩니다. 
     또한 칼빈에게 있어서 은혜의 우선성이 강조되는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모든 실재의 창조자이시며, 창세 전에 예정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바클레이는 칼빈에게 있어서 은혜의 우선성은 “예정”의 교리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보았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칼빈은 특히 하나님의 뜻과 능력의 자유를 강조하고자 했다. 하나님은 누구를 자유롭게 선택하실 때 어떤 사전 가치 조건에 얽매이지 않으신다. 사실, 그의 자유로운 선택은 그가 누구에게도 빚진 것이 없고, 대가를 지불하지 않으며, 결코 빚진 자나 두 번째 주는 자가 아니라는 사실에 의해 확증된다.” 바클레이는 칼빈이 은혜의 주권성을 강조한다고 여기는데, 이러한 은혜의 우선성은 은혜의 비상응성으로 연결된다고 언급합니다. 칭의에서 은혜는 받을 자격이 없는 자에게 주어지고 그래서 칭의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나타냅니다. 
     칼빈은 성화에 있어서도 신자의 행위의 가치는 그들이 실제로 행한 가치에 부합하지 않습니다. 바클레이에 따르면 칼빈은 루터와 대조적으로 신자의 여정을 진보, 성장, 그리고 평생의 경주로서 이해합니다(Inst. III.3.9). 칼빈은 순종의 필연성을 강조하면서 순종은 은혜의 원인이 아니라 결과라고 말합니다. 칼빈은 어거스틴과 같이 은혜의 유효성을 강조하는데 신자의 새로운 삶의 가치 있는 특징은 성령의 선물에서 말미암으며, 신자의 행위의 가치는 전적으로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반면, 바클레이는 칼빈이 믿는 자의 행위의 동인을 ‘무’로 여기는 단동설을 옹호하는 것은 아니라고 언급합니다. 오히려 칼빈은 신인협력설을 피하고 하나님의 동인과 인간의 동인이 비경쟁적이면서 비분할적이라는 점에서 신자의 행위가 하나님의 것이며 동시에 신자의 것이라고 말합니다. 바클레이는 이러한 하나님과 신자의 동인의 관계를 energism이라고 명명합니다. 칼빈은 신자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반응할 수 있다고 인정함으로써 은혜의 비순환성을 극대화하지 않습니다. 또한 신자들 사이에서 상호성 혹은 호혜성을 옹호하면서 사회적 의무의 연대 속에서 인간의 선물의 순환성을 강조합니다. 
     바클레이가 칼빈의 은혜 개념을 우선성, 비상응성, 유효성이라는 범주로 이해한 것에는 칼빈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증진시켜 주는 면이 분명히 존재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바클레이의 칼빈 이해에 대해서 몇 가지 비평을 해보고 싶습니다.
     첫 번째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칼빈의 삼위일체적 관점 특히 기독론적 성격을 바클레이가 충분히 강조하지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칼빈은 은혜에 대해 말할 때 많은 경우 그리스도에 대해 논합니다. 칼빈은 “성령은 하나님의 은혜와 그리스도의 공로를 결합시킨다”고 단언합니다. 성령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시키는 결합”이시며 따라서 우리 안에 은혜를 계속적으로 머물도록 하기 위해서 머무십니다.
     두 번째로 칼빈의 신학에서 은혜와 그리스도의 계속적 중보의 관계를 바클레이는 강조하지 않습니다. 칼빈은 그리스도의 공로를 전가 받아 의인으로 간주되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위한 성령의 은밀한 조명과 설득을 설명하기 위해 “그리스도의 영”이라는 개념을 자주 사용합니다. 칼빈에게 있어 신자들의 친교와 소통은 각 신자가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간주됩니다. 결국 성령을 그리스도의 영으로 가르치는 칼빈의 가르침은 중보자 되신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그분의 직분을 성취하시고 선포하신 지속적인 중보에 의해 전개됩니다. 칼빈의 구원론에서 중요한 측면은 구원 서정의 모든 단계에서 중보자이신 그리스도께서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우리는 칼빈의 은혜 개념에서 우선성과 그 복잡성에 대하여 고려할 필요가 있습니다. 칼빈은 중세 신학자들과 달리 은혜를 심령 속에 주입된 자질로 여기지 않습니다. 칼빈은 로마서 5:15 주석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은혜는 하나님 안에 있으며, 은혜의 결과가 우리 안에 있는 것이다.” 칼빈에게 있어서 은혜의 우선성은 ‘예정’이라는 측면뿐 아니라 ‘전적 타락’이라는 측면에서도 중요합니다. 칼빈이 로마서 5:14 주석에서 인류의 타락에 대한 강조의 약화가 그리스도의 은혜를 약화시킨다고 언급합니다. 칼빈은 로마서 3:24에 관하여 아리스토텔레스의 원인론을 사용하여 다음과 같이 언급합니다. “본 절[롬 3:24]은 하나님의 긍휼이 동력인이요, 피를 흘리신 그리스도께서 질료인이며 말씀으로 잉태된 믿음이 형상인 또는 도구인이며, 하나님의 공의와 선하심에 의한 영광이 목적인임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위의 언급에서 칼빈은 하나님과 인간에게 있어서 구원의 동인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한다. 근본적으로 하나님께서 구원의 원인이시고, 인간의 동인, 즉 믿음을 도구인으로 칼빈은 여긴다. 칼빈은 ‘은혜’는 ‘의의 효력’에 대한 동력인으로 이해한다. “이처럼 바울은 모든 것이 하나님께 속하며, 우리 자신들에게는 아무것도 나오는 것이 없다는 표현을 두 번이나 사용하였다.” 로마서 3:24 주석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로마서 5:2 주석에서 칼빈은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라는 표현을 주석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이는 곧, 그리스도께서 전혀 무가치한 자들을 만나 주시며, 그리고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그의 손을 내미신다.” 이러한 언급들을 통해서 우리는 칼빈의 은혜관에서 은혜의 우선성과 은혜의 비상응성은 분리하기 어려운 개념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바클레이는 은혜의 우선성과 은혜의 비상응성을 너무 날카롭게 나누고 있는데, 제가 바울을 읽을 때나 혹은 칼빈이 이미 말하고 있지만, 은혜의 어떤 측면에 있어서 우선성과 비상응성은 물론 구분되는 개념이지만 겹치는 개념의 분명 존재하는 것 같다고 저는 그 부분을 말하고 싶습니다. 
     또한 칼빈에게 있어서 예정뿐 아니라 율법의 수여와 성육신도 은혜론의 영역에서 다루어진다는 것을 고려해야 합니다. 먼저 타락 전에 아담에게 주어진 모든 혜택들은 그것을 향유하면서 “하나님의 부성애적 사랑”을 깨닫도록 주어져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외적인 굴레로서 단지 지켜야 하는 요구 규정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 속에서 그 은혜를 누리도록 주어져 있는 것이라고 창세기 2:9 주석에서 칼빈은 이렇게 말합니다. 『기독교 강요』 2.7.12에서 언급하듯이 죄를 고발하기 위해서만 율법이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은총의 약속”을 내재합니다. 다른 말로 율법은 그리스도인에게 ‘살리는 법’으로서 은혜로 주어져 있는 것입니다.
     토드 빌링스에 의하면 성육신에서 은혜의 개념을 발견한 칼빈의 해석은 어거스틴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어거스틴은 “인간을 하나님과 연합시키고, 육체가 영원하신 말씀에 결합되어 하나의 인격이 되신 성육신 사건은 인간적 공로에 의한 것이 아니라 어느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하나님의 자발적 의지로 말미암은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빌링스는 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러나 구원을 통해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께 참여하게 되며 그리스도의 새로운 인성에 참여할 수 있게 된다.” 빌링스가 언급하듯이, “칼빈의 경우에는 ‘그리스도와의 교통으로서의 구원’이라는 측면을 강조하기 위해 기독론적 통찰에 기반한 인간론을 전개한다.” 이와 같이 칼빈의 은혜의 개념에서 우선성은 매우 복합적 측면을 지닙니다. 바클레이는 이와는 달리 우선성을 예정과 관련된 측면으로 너무 협소하게 정의를 내리고 있다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요컨대 하나님의 은혜는 창세 전부터 나타나기 때문에 기원의 견지에서 우선적 성격을 지니며, 인간의 타락으로 인하여 행위로 구원에 이를 수 없으므로 하나님께 부여된 선행적 성격을 지닙니다. 또한 율법의 수여로 인하여 ‘살리는 법’으로서 은총의 약속을 수여 받았고, 그리스도의 성육신으로 인하여 우리가 그리스도와의 연합 가운데에서 은혜로 받게 될 것에 대한 원형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러한 전망 가운데에서 다음의 질문을 제기하고자 합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어떠한가? 그렇다면 제가 읽은 바울을 좀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제가 읽는 바울을 여기 제4장에서 굉장히 간략하게 언급했는데, 그 방법론은 이렇습니다. 일단 유대적 지형도를 살피고, 바울 앞서 선행하고 있는 어떤 유대 신학들의 지형도를 살피고, 그 유대 신학의 지형도에서 바울이 가지고 있는 은혜 개념이 어떤 신학과 공통점과 차이점을 지니는지를 생각해 보는 거거든요. 그 방법론에 따라서 제가 바울의 은혜 개념을 해석했을 때 바울의 은혜 개념은 칼빈 쪽에 가까운지 아니면 바클레이의 해석 쪽에 가까운지를 좀 제가 생각을 해보고 싶습니다. 아주 간략하게 제가 썼습니다. 
     우리는 바울을 검토하기에 앞서 두 가지 유대문헌에서 은혜의 우선성과 비상응성의 측면을 고려하고 이후에 바클레이의 범주들과 바울을 고려할 것입니다. 제가 두 가지를 고른 이유는, 제4에스라서(4 Ezra)와 LAB는 ‘위(僞)-필로’라는 문헌입니다. 이 두 가지가, 특히 유대의 신앙 안에서 인간론적 비관주의를 나타내거든요. 저는 바울이 인간론적 비관주의를 나타낸다고 생각하는데, 스스로 구원받을 수 없다라고,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존재라고 생각한다는 점에서 인간론적 비관주의를 나타낸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유대 신앙 안에서 인간론적 비관주의가 충분하게 나타나는 몇 가지 문헌들이 드리는데, 그중에 제4에스라서와 LAB(위-필로)를 좀 생각해 보고 싶습니다. 
     그런데 제4에스라서는 바울과 좀 다릅니다. 왜냐면 지금 그냥 간단하게 말씀드리면 제4에스라서는 ‘인간의 마음 속에 악한 마음이 있다. 그래서 이스라엘 실패한 것이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에게 악한 성향이 있지만 선행을 선택할 수 있는 능력도 동시에 존재한다고 하는 측면에서 제가 생각할 때 충분하게 바울처럼 인간론적으로 비관주의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제4에스라서는 그렇다는 거죠. 
     근데 반면에 바울의 인간론적 비관주의는 위-필로와 가장 유사한 것 같습니다. 제가 위-필로 부분만 읽겠습니다. 이스라엘에서 반복된 실패에도 불구하고 주어지는 하나님의 계속적 자비하심이 초점에 맞추어집니다. 위-필로에서는 불순종한 이스라엘의 자격 없음과 이것에도 불구하고 그 백성을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하기 때문에 바클레이의 언급과 같이 비상응성이 극대화되는 것으로 여길 수 있습니다. 반면 은혜를 주시는 시점에서 하나님의 선물의 선행성도 함께 강조되기 때문에 우선성도 함께 극대화됩니다. 우리는 위-필로에서 이스라엘의 실패와 죄악이라는 측면에 있어서 은혜의 우선성과 비상응성이라는 두 주제가 서로 완전히 구분되지 않으며 겹쳐 있다는 점을 발견합니다. 우리는 제4에스라서와 위-필로의 경우에서 은혜의 우선성과 비상응성은 구분되지만 또한 겹쳐 있는 부분도 있습니다. 특히 위-필로에서 그렇습니다. 
     앞 섹션에서 우리가 검토했듯이 칼빈에게 있어서 은혜의 우선성과 비상응성의 관계가 반드시 언제나 엄격하게 구분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제가 받게 된 인상은 그것이었습니다. 칼빈에게 있어서 은혜의 우선성은 단지 하나님께서 예정에 있어서 ‘부동의 원동자’ 혹은 ‘우선적 원인’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칼빈의 은혜 개념에서 우선성은 ‘요구할 수 없는 자에게 먼저 베푸시는 혜택’이라는 개념과 연관이 됩니다. 은혜의 우선성을 이렇게 재정의 내린다면 바클레이의 주장과 달리 우리는 은혜의 우선성과 비상응성과 긴밀한 연관 관계를 지닐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바클레이는 자신이 선물의 범주를 구분할 때 어떤 기준에 따라 나누었는지를 소개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가장 궁금한 것 중의 하나가 바클레이의 책 『은혜와 선물』을 보면, 은혜의 여섯 가지 기준이 나오는데, 무슨 기준으로 여섯 가지를 나눴는지 설명이 없습니다. 그냥 나오거든요. 그래서 제가 그 범주에 대해서 처음에 범주를 구분할 때 그 범주 구분에서 좀더 생각할 부분이 있지 않았을까라는 취지가 제가 지금 말씀드린 것입니다.
     바클레이가 무슨 기준으로 선물의 개념을 여섯 가지 범주로 나눠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클레이의 은혜의 범주가 적절한 것인지 고려해야 합니다. 바클레이가 생각하는 것보다 사실 좀 더 복잡한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은혜의 우선성과 비상응성의 범주가 서로 구분되는 측면이 존재하지만 서로 겹쳐져 있는 측면도 존재하지 않을까? 특히 인간론적 비관주의가 많이 나타나는 경우, 위-필로, 아니면 바울 같은 경우 그렇습니다. 그래서 저는 새로운 기준을 하나 말씀드리고 싶은데 그건 소여성이라고 하는, givenness라고 하는 그러한 기준을 한번 생각을 해보고 싶습니다. 소여성이란 말 그대로 “주어져 있음”을 의미합니다. 마르셀 모스가 주장하듯이 선물에 강제적, 타산적 함의가 존재한다고 할지라도 선물을 우리가 벌어 내거나 생산한다면 그것은 선물이라고 여길 수 없습니다. 선물에 교환적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를 살피기에 앞서 선물은 우선적으로 ‘주어져 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합니다. 즉, ‘선물은 우리 앞에 와 있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출발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존재는 우리가 만들어 내기 전에 발현되는 것입니다. 곧 선물의 가장 중요한 특성 중 하나는 선물을 받는 자의 자질 혹은 선물의 교환 가능성을 논하기 전에 ‘주어져 있는 존재’, 선물이란 것은 주어져 있다라는 걸 생각해봐야 한다는 것인데, 다시 말해서 소여성이란 선물은 존재가 그 사건 자체로서 발생하여 주어져 있는 것 혹은 사실이나 대상으로 나타나기 이전에 주어진 경험의 측면을 강조합니다. 소여성은 선물이 받을 자격이 있는 자와 없는 자를 구분하기 이전에 이미 주어져 있는 측면을 고려하기 때문에 비상응성 혹은 상응성의 측면과 연결되며, 선물의 주어져 있음은 선물을 받는 자의 받으려는 혹은 벌어들이려는 시도보다 우선하기 때문에 우선성의 측면과도 연결됩니다.
     필자의 견해로는 칼빈의 바울 해석은 은혜의 우선성과 비상응성을 구분하고 있지 않지만, (이 해석이 제가 생각했을 때는 그렇게 틀린 해석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게 오히려 맞는 해석이라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창조, 인간의 타락, 율법의 수여, 성육신과 십자가 사건에 있어서 하나님의 우선적 역할과 받을 자격이 없는 혹은 받고자 요청하기 이전에 이미 주어진 상황을 동시에 극대화하고 있기 때문에, 위-필로의 경우와 같이 우선성과 비상응성의 구분은 큰 의미를 가지기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즉, 우선성과 비상응성의 구분이 큰 의미가 없는 경우는 하나님의 선행하는 은총이 자격 없는 자에게 베풀어진다는 측면을 강조할 때입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론적 비관주의가 두드러지는 맥락에서입니다. 오히려 이 두 가지 측면(우선성과 비상응성)을 한 가지 범주(소여성)로 고려했을 때 우선성과 비상응성이 엄격하게 구분되는 범주가 아니라는 점을 알게 됩니다. ‘소여성’은 서구 학계에서 선물 논의에서 매우 중요한 범주로 간주되는데 바클레이가 이 범주를 논의하지 않는 것은 흥미로운 현상으로 보입니다.
     우선성과 비상응성을 구분했기 때문에 나타나는 흥미로운 현상 다른 한 가지는 바클레이의 필로(Philo) 해석에서 발견됩니다. 이 필로는 알렉산드리아의 필로입니다. 유대 저자죠. 바클레이는 필로를 은혜의 우선성을 극대화한 대표적 인물로 여깁니다. 왜냐하면 필로는 하나님께서 세상의 최초의 원인이라는 측면을 극대화하기 때문입니다. 반면 필로에게 있어서 선물은 그럴 만한 자격이 있는 자에게 주어집니다. 이러한 바클레이의 관찰은 ‘선택’이라는 측면에서 필로는 하나님을 제1원인으로 여기고 있기 때문에 설득력 있는 측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필로는 선택의 원인은 하나님에게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받을 만한 자질이 있는 이들을 선택한 것이라고 말한다고 말합니다. 필로의 선택의 개념은 그거 거든요. 필로는 당연히 기독교인이 아니기 때문에, 유대인입니다, 그것을 감안하고 들어 주시기 바랍니다. ‘선택의 원인은 하나님께 있지만 받을 만한 자질이 있는 자들을 선택한다.’ 이것이 기본적인 필로의 아이디어거든요. 그러니까 필로 저작에서 하나님께서 우선적 원인이라는 점에서 은혜의 우선성이 극대화되는 측면이 존재하지만 그러나 인간의 자질이 은혜를 받기에 선행한다는 측면에서 은혜의 우선성을 동시에 반감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바클레이의 기준에 따르면 지금 필로도 은혜의 우선성이라는, 예정, 제1원인, 부동의 운동자 그렇게 되어 있기 때문에 우선성이라고 말하지만, 이게 사실은 약간 좀 다른 범주가 필요한 것이 아닌가라는 그런 생각이 듭니다. 즉, 신적 원인에 대한 인정과 선택에 있어서 자질의 중요성이라는 두 가지 상반된 측면이 등장하는 것이 필로의 사상의 특징입니다. 여기에서 전자(신적 원인)가 후자(인간의 자질)에 비해서 우선한다고 할지라도 후자의 측면도 함께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 바클레이의 정의상 은혜의 우선성이 극대화되기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문제의 원인은 범주의 모호성 혹은 혼동으로 인하여 발생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바클레이는 은혜의 시점에 대한 범주인 우선성을 예정과 관련된 부분으로 좁게 정의를 내리면서, 전적 타락과 관련된 측면에서 은혜의 우선성을 표현할 수 있는 범주를 비상응성을 제외하고 고려하지 않습니다. 전적 타락과 관련된 바클레이의 범주는 대체로 비상응성에 한정됩니다. 비상응성은 받는 자의 가치를 고려하지 않고 주어지는 선물의 특성을 지칭합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받을 자격이 없는 죄인이 받는 선물이라는 측면을 비상응성이라는 범주에서 표현합니다. 그러나 위의 칼빈의 해석에서 보듯이 은혜의 시점의 선행성의 측면은 받을 자의 가치라는 측면에만 한정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전적 타락이라는 범주를 고려한다면(바클레이도 인정하듯이) 인간의 사악함과 교만함(칼빈의 표현에서 온 것입니다)으로 인하여 선물을 요구하지 않았음에도 선물이 주어졌다는 측면을 ‘은혜의 우선성’이라는 범주가 보다 구체적으로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고 필자는 봅니다.
     그렇다면 바울에게 있어서 은혜의 우선성과 비상응성이 겹쳐진 지점이 발견되는가? 필자는 이런 여러 구절에서 발견한 대로, 예를 들어서 로마서 5:8 같은 경우, 제가 읽어 보겠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였느니라.” 바클레이는 이 구절을 하나님의 은혜의 비상응성이 극대화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비상응성, 받을 자격이 없는 자에게 주어지는 은혜의 특성을 비상응성이라고 하거든요. 그게 극대화되었다는 것입니다. 우선성은 극대화되었다고 생각하지 않거든요.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측면에서 선행하는 원인이 없는 가운데서 즉 로마서 5:10에서 말했듯이 우리가 원수되었을 때 선행한 원인이 없었지만 하나님의 은혜가 주어졌다, 선물이 주어졌다라고 말한다는 측면에서 하나님께서 은혜의 원인이 그러므로 되어졌으므로 선행하는 원인이 없음 불구하고 은혜의 원인이 되었으므로 바클레이의 설명과는 달리 은혜의 우선성도 극대화되어 있고, 이 범주에 따르면 은혜의 우선성과 은혜의 비상응성은 사실은 그렇게 구분되기 어려운 것이 아닌가, 이 구절에 있어서는? 그런 생각이 듭니다. 로마서 3:21-24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구절들에서는 바클레이는 가치와 상관없이 주어지는 선물로서 그리스도 사건의 정당성을 바울이 논의한다고 봅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이 구절들이 은혜의 비상응성을 극대화하는 것으로 바클레이는 해석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위에서 수정한 은혜의 범주에 의하면 본 구절에서 우리는 은혜의 우선성에 대한 극대화도 발견합니다. 
     바울은 “율법으로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할 육체가 없다”라는 측면에서 율법 이외에 한 의가 나타났다는 것은 단순히 자격 없는 자에게 선물이 주어졌다는 것뿐만 아니라, (바클레이는 이 구절에서 은혜의 비상응성, 즉 자격 없는 자에게 선물이 주어졌다, 은혜가 주어졌다, 그 측면을 강조하는데) 사실은 율법을 지키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죄인이지만 우리에게 이런 은혜가 주어졌다는 그 측면에서 [은혜의] 우선성도 동시에 고려해야 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게다가 바울의 입양 개념이 종에서 아들로 입양되며, 상속자로 지명된다는 점에서, 상속자로서 신자가 선물을 받기 위한 선행조건을 갖추고 있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이 점은 자격 없는 자가 선물을 받는다는 은혜의 비상응성을 극대화하지만 동시에 선행하는 조건이 없었음에도 하나님께서 선물의 원인이 되셨다는 점에서 은혜의 우선성 또한 극대화합니다.
     이러한 측면은 바울의 은혜 개념의 복잡성을 암시합니다. 요컨대 제4에스라서와 호다요트(1QHa)는 인간의 실패를 강조하지만, 선을 행할 능력을 긍정하거나, 소수의 선한 자가 남아 있다는 점을 강조하기 때문에 은혜의 우선성과 비상응성이 구분됩니다. 반면 필로에게서는 하나님께서 은혜의 제1원인이시지만 선물을 받을 만한 인간의 자질이 동시에 강조된다는 측면에서 바클레이의 주장과 달리 은혜의 우선성이라는 범주가 전적으로 극대화되는 것은 아닙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위-필로와 같이 인간의 실패와 그것에도 불구하고 부어 주시는 하나님의 변하지 않는 자비를 강조하고 있다는 맥락이 등장하고 있는데, 이런 인간론적 비관주의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신다라고 하는 그런 측면에 있어서 은혜의 우선성과 비상응성이 겹쳐져 있는 부분이 있고 그것을 고려해야 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우리는 본 글에서 칼빈의 은혜의 개념을 검토하면서 은혜의 개념의 복잡성을 고려하였습니다. 우리는 칼빈의 은혜 개념에서 항상 우선성과 비상응성이 전적으로 구분되는 요소가 아니라는 점을 고려하였습니다. 칼빈의 은혜의 우선성의 개념이 항상 예정과 관련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보았습니다. 오히려 칼빈의 은혜의 개념은 창조, 율법, 성육신의 측면에서 다양하게 나타나며, 은혜의 우선성은 선행하는 자질이 없는 죄인들에게 베풀어진다는 점에서 비상응성과 우선성이 겹쳐진다는 측면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제4에스라서, 호다요트와는 달리 위-필로와 바울에서는 은혜의 우선성과 비상응성이 겹쳐져 있다는 점을 언급하였습니다. 
     우리는 필로(Philo)의 경우를 고려하면서 은혜의 우선성이 언제나 하나님의 제1원인과 주권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비상응성과 우선성이 겹쳐지는 선물의 속성을 “소여성”이라고 정의를 내렸습니다. 소여성은 주어져 있음을 나타내며, 특정한 사건 이전에 주어져 있는 경험을 나타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는 바클레이가, (제가 받는 인상은 이렇습니다. 바클레이는 왜 우선성과 비상성을 항상 구분하는가? 우선성은 그거지요, 하나님께서 선행하는 조건은 없으시지만 하나님께서 먼저 주셨다. 비상응성은 우리가 상응하는 자질이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격 없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이 두 가지 측면이 사실은 겹쳐져 있는 것이 아닌가, 바울에게 있어서, 바울처럼 인간적 비관주의가 극대화되고 있는 맥락에서는 이 두 개의 측면이 겹쳐져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그는 그런 생각이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그는 바울이 자격 없는 자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개념을 극대하지만 인간이 선행하는 은총을 극대화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유대 문헌에서 보면 유대 문헌 같은 경우 항상 있는 인간론적 비관주의가 극대화되지 않거든요. 그런 경우에서는 사실은 바클레이가 말하는 범주에서 우선성과 비상응성이 좀 겹쳐지지 않은, 좀 구분되는 측면이 그 부분에는 있지만 사실 바울 같은 경우는 그런 유대적, 인간론적 낙관주의를 표방하는 유대적 측면에는 분명히 차이점이 있는 것 같거든요. 그러면 그 범주는 좀 사용하기 어려운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바클레이가 샌더스의 유대교 해석에서 비상응성과 우선성이 구분되지 않았다고 지적했는데, 샌더스의 문헌을 보면 상당 부분 사실 탈무드 문헌 같은 인간론적 낙관주의를 표방하는 측면이 있기 때문에 그 측면에서 정당한 비판일 때가 있습니다, 바클레이가 샌더스의 비판할 때. 그런데 비상응성과 우선성이 언제나 구분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그의 은혜의 범주를 재고할 여지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넘쳐흐르는 것이고 자격 없는 자에게 주어진 선물이라는 점을 바클레이는 바르게 강조합니다. 반면 신자가 선을 행할 능력이 없을 때 하나님의 선행하는 은총이 주어졌다는 은혜의 시작 지점에 대한 바울의 가르침은 바클레이에 의해서 바울의 은혜 개념에서 극대화된 개념으로 소개되어 있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제가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바클레이의 바울의 은혜 해석과 칼빈의 바울의 은혜 개념에 대한 해석 중에서 저는, 제목이 사실 이거였거든요, “칼빈의 바울 해석에 관한 소고”였는데, 바클레이의 해석보단 저는 칼빈이 바울을 더 잘 읽은 것이 아닌가라는 그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칼빈이 바울의 인간론적 비관주의를 보다 더 세밀히 관찰했고, 그 가운데서 하나님의 은혜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보았기 때문에, 제가 해석하는 1세기적 맥락에서의 바울의 해석에 비추어볼 때에도 바클레이의 해석보다는 칼빈의 해석이 보다 더 좋은 해석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긴 시간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