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발표 | 양현표 박사 | 복음전도에 관한 칼빈의 신학과 프락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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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칼빈-개혁신학연구소
제1회 정기학술세미나

제3발표 | 양현표 박사


복음전도에 관한 칼빈의 신학과 프락시스


• 세미나 논문 pdf 자료 링크
: https://drive.google.com/file/d/1gkoDu2sFJOXY7fGByQ0e_dXCbORMu2gE/view?usp=drive_link

     네, 안녕하십니까? 저는 실천신학 교수입니다. 실천에 무슨 신학이 필요하냐, 하실 분들이 있을 것 같습니다. 실천만큼 신학이 필요한 영역이 없다라고 생각이 됩니다.  
     들어가는 말로 먼저 제가 용어를 좀 설명을 하고 몇 가지 지나가도록 하겠습니다. 
     첫째가 ‘프락시스’(praxis)라는 말입니다. 직역을 하면 실천이란 그런 뜻을 갖고 있는데, 실천이란 우리나라 말 안에 ‘프락시스’의 모든 개념이 다 들어가 있지 않습니다. ‘프락시스’는 ‘독시’(doxy)를 근거로 한 실천입니다. 그러니까 ‘독시’가 있고 ‘프락시스’가 있지 않습니까? ‘도그마’가 있고 실천이 있는데 그래서 ‘orthoxdoxy’, ‘orthopraxy’ 이런 말을 씁니다. ‘프락시스’라는 말은 단순히 실천이 아니라 이론, 그러니까 ‘theology’를, 신학을 기초로 한 실천을 우리는 ‘프락시스’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실천을 ‘orthopraxis’라고 해서 ‘정통 실천’이라고 이렇게 말을 하고 우리 목회자들은 그래서 실천에 있어서 우리의 약점이 뭔고 하면은 현장에서 실천하기 때문에 꿩 잡는 게 매가 되는 게 상당히 많습니다. 효과만 있으면 하려고 하고요. 그렇지만 우리가 ‘프락시스’라고 말을 할 때는 절대로 그건 아니고 반드시 신학에 기초한 ‘프락시스’, 그래서 정통 실천이 돼야 된다. 그래서 제가 ‘프락시스’라는 단어를 그래서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실천신학의 맹점이 실천을 강조하다 보면 이 이론을 무시하는 수가 있거든요. 그래서 ‘프락시스’라는 단어를 쓰게 됐고요. 
     또 이 논문에서 제가 쓰고 싶은 게 ‘복음전도’와 ‘선교’라는 두 단어입니다. 그것도 좀 논문에 잠깐 소개해 놓았는데 두 개념이 같으면서도 다르고 학자들마다 다르게 사용하고 흔히 사용하기는 선교라는 단어는 해외, 전도라는 다루는 국내, 이렇게 구별이 가장 보편적인 구별인데 사실 저는 이제 복음전도라는 큰 카테고리 안에 선교도 들어간다고 생각을 하거든요. 그래서 본 논문에서는 복음전도와 선교란 말을 혼용하겠다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15세기 때의 개념이나 그 뒤의 개념을 보면 칼빈을 이야기할 때 전부 다 선교라는 단어를 써서 연구를 했어요, 자료들이. 저는 그걸 복음전도로 다 바꾸고 싶은데 자료들이 다 선교라는 단어를 썼기 때문에 제가 필요에 의해서 복음전도와 선교를 혼용해서 쓰겠다라는 그런 전제를 미리 말씀드리고요. 
     또 한 가지 이 논문에서 혼용되는 게 ‘종교개혁가’와 ‘칼빈’이란 이 두 단어입니다. 사실은 이 복음전도 영역에서 칼빈을 다루다 보면 필연적으로 칼빈을 종교개혁가의 한 사람으로 취급하는 경우가 굉장히 많아요. 그러니까 “종교개혁가들이” 이렇게 표현을 해버려요, 칼빈을 포함해서. 그러다 보니까 이 실천신학에서 논문을 쓰면서 종교개혁가들과 칼빈이 본 논문에서 자료를 사용하다 보니까 혼돈될 수밖에 없다, 
     이 세 가지 용어에 대해서, 먼저 용어 사용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고 시작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본 논문의 주제는 과연 칼빈에게 복음전도를 위한 신학과 프락시스가 있었는가 하는 게 본 논문의 메인 질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질문은 칼빈을 포함한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을 향하여 제기하는 보편적인 질문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맨 먼저 칼빈이 가톨릭을 반대해서 나왔기 때문에 가톨릭 쪽에서는 칼빈과 종교개혁 진영을 비판해야만 됐습니다. 그중에 그 비판하는 영역 중에 하나가 너네 개혁신학자, 종교개혁 진영에는 칼빈을 포함해서 복음전도가 있느냐, 이 질문을 먼저 가톨릭에서 던지게 된 것이죠. 그래서 칼빈을 포함은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을 향하여 제기하는 보편질문이고, 이 질문은 가톨릭 신학자들에 의해서 제기됐고, 그리고 일부 개신교 선교학자들이 동조했던 그런 역사를 갖고 있습니다. 
     최근의 연구는 칼빈을 포함한 종교개혁자들에게 강력한 복음전도 신학과 실천이 있었음이 최근에 논증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칼빈이 선교지도자로서, 또 제네바가 선교 중심기지였다라고까지 표현하는 연구결과가 최근에 나오고 있습니다. 다만 인정할 것은 16세기 당시의 여러 상황상 실제 선교를 프락시스하는, 실천하는 데는 개혁 진영이나 종교개혁 진영이나 칼빈에게 한계가 있었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그때 상황상. 이 문제는 뒤에서 이야기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래서 본 논문이 전개되는 과정이 첫째는 칼빈에게 복음전도를 위한 신학과 프락시스가 있었는가라는 이 질문에 대한 논쟁을 좀 소개하고 싶고요. 그리고 『기독교 강요』, 그리고 칼빈의 설교, 주석, 그리고 기타 저술에서 발견되는 칼빈의 복음전도에 관한 신학을 좀 소개하고 싶고요. 또 현대적인 의미의 해외 선교에 대한 실천이 부족했음을 인정합니다. 칼빈에게 있어서 그런 해외의 선교가 부족했음은 인정하고, 그리고 그 원인에 관하여 왜 부족할 수밖에 없었는가라는 그 이야기를 좀 소개하고 싶고요. 그리고 칼빈의 복음전도 프락시스가 전혀 없진 않았다, 그래서 몇 가지로 나누어서 칼빈의 복음전도 실천에 대해서 소개를 함으로, 그리고 결론을 칼빈에게 강력한 복음전도 신학에 있었고 또 칼빈에게는 복음전도 실천이 있었다라는 것을 결론 내리는 것으로 내용이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럼 두 번째로 칼빈의 복음전도 관련 논쟁을 좀 소개하고자 합니다. 오랫동안 칼빈에게는 복음전도가 없었다라는 편견이 지배적이었습니다. 그 시작은 물론 가톨릭으로부터 시작이 됐죠. 편견이 있었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이런 편견을 만들어 내는 것은 앞에서도 여러 번 언급했지만 ‘예정론’입니다. 예정론 때문에 칼빈주의자들, 칼빈에게는 복음전도가 없다라는 편견이 지배적이었죠. 이러한 편견을 최초로 만들어 낸 사람이 가톨릭의 추기경이었던 로베르토 벨라르미노(Roberto Bellarmino, 1542-1621)였습니다. 63쪽에 보게 되면 63쪽의 가운데 페라그래프를 한 번 읽겠습니다. 칼빈에게 복음전도 신학이 부재하다는 주장은 가톨릭 교회로부터 시작되었다. 가톨릭 신학자들은 종교개혁 자체를 폄하하기 위해 종교개혁자들에게 선교의 개념도 실천도 없다고 주장했다. 이렇게 주장한 최초의 인물은 가톨릭 추기경 로베르토 벨라르미노였다. 그는 당시 가톨릭 교회와 비교하여 개신교에는 선교가 없다고 주장했으며, 그러기에 개신교는 이단이라고까지 주장을 했습니다. 벨라르미노의 이러한 주장을 비판 없이 수용한 자가 선교역사학자 구스타보 바르넥(Gustav Warneck, 1834-1910)이었습니다. 그는 이런 표현을 썼습니다. “이상한 침묵”이라는 표현을 썼죠. 칼빈에게 복음전도가 부재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상한 침묵”은 뭔가 하면 칼빈이 지상대명령이나 사도행전 1:8을 설명하면서 교회의 선교적 사명에 대해서는 이상하게 침묵하고 있음을 지적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바르넥은 칼빈이 선교를 교회의 사명으로 인식하지 못했다고 단정했고, 나아가 칼빈이 비기독교 민족 가운데 기독교의 확장, 즉 선교에 대한 특별한 교육은 불필요한 것으로 여겼다고까지 주장을 했습니다. 이런 구스타보 바르넥의 주장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주장을 가톨릭 교회사가 슈미들린(Joseph Schmidlin, 1876-1944)이 이어받았고, 그리고 저명한 교회사가 케네스 라투렛(Kenneth Scott Latourette, 1884-1968)이라는 선교학자가 있는데, 이 학자도 그의 저서에서 이러한 경향을 이어 받았습니다. 16세기 종교개혁가들이나 칼빈에게는 선교에 대한, 복음전도에 대한 개념이 없었다라고 그렇게 썼죠. 성공회 선교사 스테판 닐(Stephen Neill, 1900-1984)도 개신교 사람들인데 벨라르미노의 견해를 수용했고요. 그 외의 윌리암 호그호그(William R. Hog), 하버드 케인(J. Herbert Kane), 알 만한 사람들이죠, 에리히 쉬크(Erich Schick) 같은 개신교 선교학자들이 종교개혁자들에게 선교가 없었다는 주장을 펼쳤습니다. 이런 상황이 있었죠. 
     그런데 이상하게 이런 학자들의 주장이 사실인가, 최근에 와서 다 뒤집어지고 있습니다. 지금 뒤집어 져 있습니다. 그래서 고신대 교수 황대우 교수는 루터, 마틴 부처 등의 글에서 선교에 대한 개념이 충분하다고 논증하고 있고요. 또 원로 우리의 칼빈주의자 학자인 정성구 박사께서는 칼빈주의와 선교 사이에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밀접한 관계가 있다라고 주장을 했고요. 또 네덜란드의 신학자 빌렘 당크바(Willem F. Dankbaar)는 말하기를 칼빈이 제네바를 사도적 중심지, 즉 유럽 모든 나라에 참된 복음 선포를 확산한 힘을 공급하는 그런 지역으로 만들었다. 또 스탠포드 리드(W. Standford Reid)도 칼빈이 인도, 중국, 아프리카 등의 해외에 선교사들을 파견한 적이 없다는 이유를 들어서, 그러니까 그가 해외 선교사를 파송했다는 그런 사실을 없다는 그 점을 들어서 그가 선교에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부당하다라고 이렇게 리드는 이야기했고요. 또 에린스트 피스트러(Ernst Pfisterer), 사무엘 즈웨머(Samuel Zwemer), 폴 아비스(Paul D. L. Avis), 찰스 채니(Charles Chaney), 필립 휴즈(Philip E. Hughes) 등의 이런 저명한 학자들에 의해서 칼빈의 신학과 생애가 복음전도적이었고, 그의 모든 삶과 그의 저술 안에는 복음전도 신학이 충만하다라고 논증함으로 최근에 들어서 칼빈의 이런 편견이 뒤집어지고 있다라고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그런데 이런 이견을 가진 학자들의 이 논쟁이 지금도 이어지고 있고요. 그래서 가톨릭을 중심으로 한 그들을 이어받은 최신 개신교 선교사들, 초기 개신교 선교 학자들의 이론이 지금 많이 뒤집어지고 있는데, 그런데 이런 논의를 우리가 지금 어떻게 봐야 될 것인가라고 생각을 해봐야 되겠습니다. 그래서 첫째가 당시 가톨릭 교회 선교와 비교하여 선교가 없었다는 점은 설득력이 있습니다. 분명합니다. 그런 프락시스가 약했던 것만은 분명합니다. 가톨릭은 그들의 그 천 년 세월 동안 선교를 담당한 조직들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서 도미니크회, 프란체스코회, 예수회, 이런 수도원 운동들이 그들은 이미 조직력을 갖추고 천 년 이상을 선교를 해왔던 그런 기관이나 단체들, 교단들이 있었다는 얘기입니다. 그들의 역사만큼이나 그런 교단들이 있었죠. 그런데 이제 종교개혁 진영은 그게 없었죠. 전혀 없었으니까 그런 일들을 체계적으로 할 수 있는 시간도 어떤 전통도 없었던 것입니다. 칼빈이 현대적 개념의 해외선교나 당시 가톨릭 교회가 실천했던 형식의 선교에 있어서 미흡한 점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구체적 실천이 없다고 해서 칼빈에게 복음전도 신학이 아예 없다고 보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실천이 없는 게 아닙니다. 그 실천은 뒤에 가서 설명을 하겠습니다. 데이비드 보쉬(David Jacobus Bosch)가 말했는데, 칼빈에게 선교가 없었다는 벨라르미노의 평가를 비판했는데, 그가 말하기를, 선교는 먼 나라의 어떤 특수한 그리스도의 대사를 파송하는 것 이상의 것임이 분명하다. 개혁주의자들에게 있어서는 구라파도 선교지역이었다. 선교는 교회가 세계 속으로 들어가기 위하여 경계선을 넘는 것이다라고 정의함으로 종교개혁가들의, 칼빈을 포함한 종교개혁가들의 어떤 복음전도적 신학을 강력하게 변호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당시 선교 프란시스가 부족했던 것만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그 시대의 상황적 이유이었지 결코 신학적 이유는 아니었다는 것이죠. 그래서 칼빈의 신학 안에는 복음전도에 대한 개념과 당위성과 그리고 열정이 충분히 담겨 있음을 그의 여러 저서를 통해 우리는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굉장히 중요한 논증인데요, 역사적으로 17세기 이후, 특별히 19세기에 활동하였던 칼빈주의자들은 누구보다도 열심히 세계의 선교에 앞장섰던 사람들입니다. 역사적으로 위대한 선교의 열매를 맺은 사람들의 대부분이 칼빈주의자들이었습니다. 만약 칼빈에게 선교신학이 없었다면 그의 후손들이 이처럼 선교에 열심을 낼 수 있었겠는가? 신학적으로도 뒷받침됩니다, 이것은. 뒤에 가서 설명을 하겠습니다. 보쉬는 칼빈이 거의 의심할 수 없을 정도로 확실히 복음전도 신학을 갖고 있었다고 주장한 대표적인 선교학자입니다. 
     자, 그러면 이런 논쟁 끝에 세 번째로 칼빈이 직면한 복음전도 프락시스에 있어 장애물을 한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왜 그러면 칼빈에게는 그토록 강한 복음전도 신학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복음전도 실천에 있어서는 약할 수밖에 없었겠는가. 이 상황을 우리가 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크게 상황적 차원과 신학적 차원,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다 모았습니다. 제가 모든 자료를 다 모았기 때문에 우리가 이해할 수, 받아 드릴 수 없는 이유도 있고요. 받아들여야만 하는 이유도 있습니다. 대체로 상황적 차원의 이유들은 우리가 다 받아들여야만 됩니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칼빈의 대적자들, 칼빈의 비판자들이 제기한 신학적 차원의 이유는 우리가 받아들이기가 어렵다라고 이렇게 말씀하고 싶어요. 자, 상황적 차원이 뭔가 하면 당시 개신교 교회는 생존이 더 급한 시기였다. 이런 게 우리 쪽, 칼빈의 후계자들이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렇죠. 당시에 개신교, 칼빈을 비롯한 종교개혁 진영은 생존하기도 바빴습니다. 그래서 그런 상황적 차원을 우리가 무시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저는 교회개척 교수인데 목사가 생존을 못하면 교회가 문을 닫습니다. 그런데 결론적으로 목사의 생존은 하나님 나라 확장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현대도 그렇습니다. 현대도. 그래서 당시 종교의 진영, 칼빈을 포함한 종교의 진영들이 생존 자체가 급했습니다. 수많은 대접자들과 싸우고 자리잡기 위해서 프락시스까지는 가기 어려웠던 상황이었다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두 번째로 또 한 가지는 당시 해상권을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제네바나 프랑스의 칼빈이 활동을 했었는데 해외에 선교를 나갈 수 있는 조건이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가톨릭의 핵심국가인 포르투갈하고 스페인이 해상권을 다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아갈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는 것이죠. 이것도 매우 중요한 상황적 이유이었습니다. 세 번째가 선교기관 역할을 감당했던 수도원 같은 조직이 없었다는 것이죠. 그런 조직이 아직 세워지지도 않고, 그래서 선교가 개인적인 영역에서 갈 수는 있었지만, 가톨릭이 했던 천주교회에서 했던 그런 조직적인 그런 단체들로 아직 구성돼 있지 않았을 그런 상황이었던 것이죠. 그리고 1555년에 체결된 아우크스부르크 조약도 칼빈의 선교에 굉장히 장애였습니다. 그 조약의 핵심이 뭡니까? 왕이 믿는 종교를 백성도 믿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게 아우크스부르크 평화조약인데, 그러니까 백성들은 선택권이 없었습니다. 무조건 지배자가 나는 가톨릭이 다라고 하면 다 가톨릭이 되고, 나는 개신교다라고 하면 다 개신교를 믿어야 되는 그런 상황들이 있었는데, 그게 유효했기 때문에 칼빈의 선교 프락시스에 장애요소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이런 한 네 가지 요소가 상황적 요소로 제기될 수 있겠고요. 신학적 차원에서는, 대체로 신학적 차원은 칼빈의 비판자들이 하는 이야기입니다. 칼빈의 예정론이 복음전도를 약화시켰다. 개신교는 지상대명령을 사도들에게만 주어진 명령이라고 여겼다. 종교개혁자들의 팽배했던 임박한 종말론이 복음전도를 불필요하게 만들었다. 네 번째로 중세의 금욕주의와 신비주의를 개신교가 포기함으로 선교의 열정을 가질 수가 없었다. 이런 신학적인 이유를 들어서 칼빈에게 복음전도 프락시스가 없었음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그럼 이제, 설명을 뒤에 가서 조금 더 자세히 하겠지만, 예정론은 복음전도를 무용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 예정론은 복음전도의 기폭제입니다. 그 설명은 뒤에서 좀 하겠습니다. 두 번째로 종교개혁자들이 지상대명령을 사도들에게만 주어졌고, 사도들에 의해 이미 땅끝까지 복음이 전파되었기에 더는 복음전도 행위가 필요하지 않다고 여겼다라는 가톨릭교의 진영의 주장은 전혀 설득력이 없습니다. 혹자들은 개신교가 사도 계승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사실은 개신교에서는, 종교개혁 진영은 교황권을 인정하지 않아야 될 것 아니겠습니까? 교황권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이제 교황권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다 보니까 가톨릭에 주장하는 사도 계승권을, 사도의 가치를 떨어뜨리야만 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사실이라고 저도 판단됩니다. 만약에 사도의 가치가, 사도가 대승된다고 하면 교황을 인정해야 되거든요. 그러다 보니까 사도의 계승권을 부정하다 보니까 사도들에게 주어진 명령까지도 개신교에서는 받아들이지 않았다라는 게 가톨릭의 주장입니다. 그래서 종교개혁 진영에서는 복음전도가 없다, 사도들에게 주어진 명령을 실천하지 않는다, 이런 신학적인 공격을 했거든요. 이것이 사실은 근거가 없는 것입니다. 사실 칼빈의 많은 저술들을 보면 지상대명령에 대한 그런 강조점이 있기에, 이런 주장도 설득력이 없다고 보입니다. 
     임박한 종말론은 그 성격상 복음전도를 포기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복음전도의 열심을 내게 하는 것이죠. 그런데 이건 공격을 위한 빌미라고 생각이 들고요. 사실 저는 개인적으로 생각할 때 칼빈을 비롯한 종교개혁자들에게 임박한 종말론이 있었는가 하는 것조차도 저는 조금 의심합니다. 정말 제가 이 칼빈의 후예로서 1981년부터 살아왔는데 임박한 종말론이 있습니까?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이 자료들을 찾으면서 그런 걸 좀 보았습니다. 그래서 칼빈이 복음전도 실천에 전력을 다하지 못한 이유를 찾기 위해서는 당시 제네바 상황을 좀 살펴봐야 합니다. 한마디로 칼빈은 제네바 외의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릴 여유가 없었죠. 칼빈은 그 자신 역시 제네바에 거주하는 한 이주민으로서 그의 종교개혁을 위해 싸워야만 했습니다. 제네바 시의 관리들, 제네바 시의 토착세력들, 그리고 제네바 시의 가톨릭 세력들과 싸워야 했죠. 또한 제네바의 시가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급속히 늘어난 이주민 인구가 있었습니다. 당시에 제네바가 개신교의 도시가 되니까 물밀듯이 유럽 각지에서 이주민들이 제네바로 찾아왔거든요. 그래서 인구가 급증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이 제네바 시를 복음화하는 데도 아주 정신이 없었던 게 칼빈의 일생이었다고 저는 생각이 되고요. 그래서 그러한 급속히 늘어나는 이주민 인구와 이에 따른 그들의 긴급한 필요를 채우는 것만으로 칼빈의 목회 사역은 벅찼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시대적 우선순위라고 할 수 있는 제네바 교회를 확립하는 데에도 여력이 충분하지 않았던 것이죠. 그래서 해외선교나 이방인 선교에 눈을 돌릴 상황적 환경이 되지 않았다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래서 이런 어떤 복음전도 프락시스의 장애물들을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는 것도 있고, 우리가 인정해야만 되는 것들도 있고, 대체로 상황적 이유들은 우리가 인정하게 되는 것이고, 신학적 이유들은 우리가 받아들이기 어려운 그런 상황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예정론을 독립시켜 제가 분량을 좀 할애했습니다. 왜냐하면요, 예정론은 정말 칼빈의 모든 논쟁의 어떤 중심에 있겠지만, 특별히 복음전도와 관련해서는 더 큰 논쟁의 중심에 있거든요. 예정론 때문에 너희들은 복음전도가 없다라는 게 정말 우리 복음전도학계 안에서는 알미니안들이나 진보진영의 아주 핵심적인 공격의 빌미거든요. 너희들 예정되어 있는데 무슨 전도가 있느냐, 그냥 놔도도 되는데, 이게 그들의 공격의 빌미거든요. 그래서 복음전도학에서는 더 큰 이슈가 되기 때문에 칼빈과 관련해서 좀 소개를 하고자 합니다. 논쟁의 핵심은 구원받을 자가 이미 결정되어 있는데 복음전도가 왜 필요한가라는 게 논쟁의 핵심이겠습니다. 우리가 한 가지 알 수 있는 것은 앞에서 『기독교 강요』가 많이 언급되었습니다마는, 예정론이 칼빈의 주요 논제는 아니었습니다, 시작할 때.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임상학적 결론을 보고 그 결론을 보고 귀납법적으로 끌어가는 것이 예정론이다. 그러니까 칼빈이 생각하기에 아무리 전도해도 안 믿는 사람이 있거든요. 그러니까 이 사람으로부터 이런 현상으로부터 귀납법적으로 끌어가는 것이 예정론이다라고 말할 정도로, 예정론이 『기독교 강요』 초판에는 한 줄인가 두 줄밖에 나와 있지 않다라고 그렇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1536년 출간된 『기독교 강요』는 초판에는 예정론이 독립적인 항목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예정론이 칼빈신학의 중심 개념이 아니었음을 여러 학자들이 주장하고 있습니다. 예정론을 독립적으로 다룬 1539년판에 『기독교 강요』가 출판된 이후 예정론을 두고 논쟁이 확대되었던 것이죠. 그래서 첫째로 우리가 복음전도 신학에서 접근할 때 예정론을 가지고 문제 삼는 것을 우리가 인정하지 않으려고 애씁니다. 왜냐하면 칼빈의 원래 초판에 나와 있지 않고, 그래서 발전하는 과정 속에서 나왔기 때문에 칼빈의 어떤 주된 신학이 아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만큼. 신학계에서 예정론을 펠라기안주의나 알미니안주의에서 공격한 것만큼 칼빈에게는 중요한 어떤 신학적 주제가 아니었다라고 저는 여러 학자들의 근거를 필요로 해서 이렇게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예정론을 근거해서 칼빈의 복음전도론이 없다라고 주장하는 것은 무리라는 것을 제가 말을 하고 싶은 것이죠. 그렇다고 해서 무시할 수는 없죠. 그래서 예정론을 우리가 받아들이고, 논쟁을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과연 칼빈의 예정론은 복음전도 무용론을 주장하는가? 아니라는 것이죠. 물론 칼빈주의도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크게 세 종류의 칼빈주의가 있겠지만, 그러나 우리는 이제 True Calvinism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우리를 Historical Calvinism이라고 합니다. 역사적 칼빈주의죠. 그러나 이에 반한 Hyper Calvinism도 있습니다. Hyper Calvinism은 칼빈주의의 예정이라는 단어에만 집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실제로 Hyper Calvinist들은 말하기를, 우리는 전도할 필요가 없다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런데 여기 칼빈주의 전문가가 앉아 계시지만, 제가 생각하기에 Hyper Calvinism은 칼빈주의가 아닙니다. 다른 신학이에요. 다른 인본주의 신학이죠. 그래서 Hyper Calvinism이 말하는 그 주장을 우리가 칼빈주의로 해서 변호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비판자들은 Hyper Calvinist들을 사용합니다. 그들에게 Calvinist라는 말이 붙으니까.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 칼빈주의도 물론 있습니다. 그러나 정통적, 역사적 칼빈주의, 우리들을 이야기합니다. 복음전도에 있어서 인간의 역할과 책임을 하나님의 주권 못지않게 강조하는 게 True Calvinism의 후손들입니다. 하나님의 주권 못지않게 우리의 책임까지도 복음전도에 있어서 책임을 지는 것이죠. 그래서 예정론은 복음전도를 회피하고 싶은 사람들에 의해 오용될 소지가 물론 있습니다. 칼빈은 말하기를 예정론이 그 누군가가 유기되었다고 판단하는 근거로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고 경고했습니다. 그런데 예정론은 우리가 개인적으로 적용할 때 내가 선택되었다라는 데 적용해야지, 누가 유기되었다라고 판단하는데 적용하지 말라고 그걸 경고한 것입니다. 그걸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즉, 선택과 유기가 타인의 구원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오용되는 것을 칼빈은 경계하는 것입니다. 선택 교리는 자신이 선택되었다고 확신하는 교리이지 타인이 유기되었다고 판단하는 교리가 아닙니다. 우리는 누가 유기되었는지 알 수 없으며, 따라서 판단해서도 안 됩니다. 달리 말하면, 칼빈주의자는 모든 인간이 구원받기를 원할 뿐입니다. 그러기에 칼빈주의에는 마치 모든 사람이 선택된 것처럼 여기고 그 선택을 실효성을 위해 자신이 복음전도의 도구로 사용된다는 확신 속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정론은 결국 복음전도의 추진력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전도신학에서 바라보는 예정론입니다. 다른 많은 영역에서 예정론을 바라보겠지만, 복음전도와 신학이라는 학문에서, 전도학이라는 학문에서 예정론을 바라보는 우리 칼빈주의자 복음전도학자들이 바라보는 관점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사실 뭐 여기서 이런 말씀을 드리긴 뭐하지만, 칼빈주의자들이 가는 곳에는 다 양적인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지금까지. 대한민국도 마찬가지고요. 왜냐하면 우리들은 교리를 갖고 있으면 교리가 우리 삶 속에 적용돼야 된다고 생각을 합니다. 교리 따로, 실천 따로 갈 수가 없거든요. 그런데 칼빈주의자들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예정에 의해서 내가 어디 목회하러 갔습니다. 목회하러 갔으면 그게 우연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죠.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보내셨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생각해야 되냐면, 나를 통해서 여기서 구원시킬 누군가를 하나님이 예정해 놓았다라고 믿어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예정론을 믿고 있는 칼빈주의자 목회자들의 자세, 실천의 자세이어야만 한다고 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날마다 우리는 교회를 개척해놓고 어두컴컴한 교회당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거리로 나가야죠. 사람들을 만나서 이 사람인가, 이 사람인가? 하나님이 예정으로 나를 통해 구원해줄 사람이 이 사람인가, 이 사람인가? 우리는 알 수 없기 때문에 모두 다 선택받았다고 우리가 간주하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 그중에 누군가는 예정돼 있는 사람은 나를 통해 유효한 부르심이, 소명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죠. 그러니까 실제로 진정한 칼빈주의자라고 한다면 전도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가서. 그래서 이제 이게 여기까지가 연결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칼빈주의자들이 가는 곳에는 언제든지 양적인 부흥이 역사 속에 일어났습니다. 제가 좀 소개를 논문 안에도 해놨는데, 칼빈주의자들이 가는 곳에는 양적인 부흥이 항상 일어났던 것을 우리가 알 수가 있습니다.그래서 제임스 패커는 칼빈주의의 5대 교리에 나타난 주권적 예정이 절대로 전도와 선교를 향한 우리 인간의 열망과 책임을 희석시키기 위한 것이 아님을 분명하게 설명했습니다. 
     그러면 칼빈에게 복음전도 신학이 없는가? 아닙니다. 넘쳐납니다. 그런 내용들을 거기에 쭉 좀 적어놓았습니다. 조엘 비키를 비롯해서 우리나라 학자 이정숙, 또 아브라함 카이퍼, 최정만, 이런 사람들의 성경 해석에 대한 관점들을 쭉 하면서 칼빈에게 복음전도 신학이 넘쳐난다 이야기하고 있고요. 또 칼빈의 복음전도를 강조하는 많은 주석과 설교들이 최근에 많이 발굴되고 또 해석되고 있다는 것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또 두 번째로 우리가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은 과연 칼빈이 주님의 지상대명령을 1세기 사도들에게만 주어진 명령으로 여겼는가? 가톨릭에서 비판하고 있는 내용이고, 일부 개신교 선교학자도 뒤따르고 있는 내용인데,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칼빈은 지상대명령을 사도들에게 주어진 명령으로 제한하지 않았다라는 것이죠. 모든 시대 모든 지상 교회가 지상대명령을 따라야 하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는 지상대명령을 주석하면서 우리는 이것이 주님의 사도들에게만 하는 말씀이 아니라는 점을 명심해야겠다. 주님께서는 한 세대만이 아니라 세상 끝날 때까지 자신의 도움을 약속하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가톨릭 신학자들의 비판은 사도 계승권을 거부함으로 그들의 교황을 인정하지 않았던 개신교에 대한 흠집내기에 불과하다고 보입니다. 사도라는 직분히 계승되지 않는 것과 사도 주어진 명령이 계승된다는 것은 엄연히 다른 차원의 문제입니다. 칼빈은 사도직은 계승되지 않았지만 사도들의 직무는 목사와 교사에게 그대로 계승된 것이라고 그렇게 보고 있습니다. 
     여섯번째로 칼빈의 복음전도를 위한 프락시스를, 실천을 한번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지금까지의 논쟁도 살펴보왔고요. 거기에 대한 변론도 말씀드리였고요. 그 다음에 신학, 칼빈의 여러 저술 안에 들어있는 신학을 살펴보았습니다. 복음전도의 신학. 그러면 그 모든 것을 통채로 해서 칼빈의 복음전도에 관한 구체적인 실천이 뭐가 있었는가? 이 문제를 이제 살펴볼 차례가 되었습니다.첫 번째가 종교 개혁 그 자체를 복음전도의 한 프락시스로 간주할 수 있습니다. 칼빈의 임무는 가톨릭 교회의 신학과 실천의 비성경적 오류를 지적하고 오직 성경에 근거한 참된 교리를 세우는 것이었다라는 의미죠. 교회개혁은 교회의 본질로의 회복이고요. 복음전도는 교회의 본질 중에 하나입니다. 따라서 교회의 개혁이야말로 진정한 복음전도라는 논리가 형성됩니다. 그러기에 칼빈의 종교개혁은 다름 아닌 복음전도 프락시스다라고 이렇게 주장하고 싶습니다. 여러 학자가 칼빈의 종교개혁이야말로 복음전도이었다고 근거를 가지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프레드 클로스터(Fred H. Klooster), 스콧 헨드릭스(Scott H. Hendrix), 이런 사람들을 좀 소개를 해놓았습니다. 그래서 종교 개혁자들 입장에선 그들의 모국이었던 유럽 또한 복음전도가 필요한 땅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종교개혁이야말로 위대한 선교운동의 시작점이라고 하기에 부족함이 없다라고 주장하고 싶습니다. 결론적으로 종교개혁은 참으로 복음전도 사역실천의 큰 어떤 행동이었다라고 이렇게 주장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가 제네바, 제네바 복음운동이죠. 그래서 제가 굳이 선교란 말 대신에 복음전도를 사용하는 의미는 선교라는 단어 안에 우리가 너무 편견이 있기 때문입니다. 해외의 선교, 우리 본토가 아닌 다른 곳으로 다른 나라에 가는 것만이 유일한 선교라는 게 너무 우리 식 속에 강하게 잡혀져 있기 때문에 제가 선교라는 말 대신에 굳이 복음전도라는 말을 많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제네바의 복음전도. 칼빈은 조국 프랑스를 떠나 난민이 되어서 1936년 제네바에 최초로 종착했습니다. 스트라스부르에 머물렀던 3년을 제외하고 총 25년 동안 늘 제네바의 개혁자로 살았습니다. 제네바를 성시화하려는 그의 삶은 다름 아닌 복음전도자로서의 삶이었죠. 처음 칼빈이 제네바에 도착했을 때 제네바는 영적으로 폐허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이들은 종교적 권위를 거부하였고, 돈, 장사, 그리고 스포츠만을 추구하였습니다. 도덕이 땅에 떨어졌으며, 시민들의 성경 지식은 형편이 없었고, 교회의 치리는 있으나 마나였습니다. 칼빈이 싸워야만 했던 세력은 적어도 제네바에서 세 세력이었습니다. 첫 번째는 제네바 자손이라고 불리는 제네바 토착세력이었고요. 두 번째는 1천 년을 지탱해 온 가톨릭 교회이었습니다. 그들은 칼빈과 신학적 논쟁을 일삼았죠. 
     세 번째는 리버튼이라고 불리는 자유파 방종주의자들이었습니다. 이러한 반대세력에도 불구하고 제네바 시는 미셔너리 센터가 됐습니다. 선교센터가 되었습니다. 그는 도망자로 조국 프랑스를 떠나 난민으로 제네바에 왔지만, 그의 삶은 다름 아닌 선교사의 삶을 살았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러면 칼빈은 어떤 방식으로 제네바를 선교센터로 만들었는가? 칼빈이 사용한 네 개의 기관을 통해서 선교센터로 만들었고, 복음전도를 활성화시켰조. 첫 번째 기관은 제네바 목사회라고 할 수가 있겠죠. 두 번째는 제네바 종합 구빈원입니다. 세 번째는 제네바 컨시스토리, 네 번째는 제네바 아카데미입니다. 여러분들이 익숙한 단어이고, 또 이 단체들이 무엇을 하는 단체이고, 칼빈이 이러한 단체들을 어떻게 활용했는지에 대해서 간단하게 논문에 써놨습니다. 한 번 참고해 보시면 되겠습니다. 제네바 목사회, 제네바 종합 구빈원, 제네바 컨시스토리, 제네바 아카데미, 이 네 개의 기관을 통해서 칼빈은 제네바 시를 성시화하고 복음화하는 데에 열정을 보였습니다. 요약한다면 목사회는 필요한 국가나 지역의 목사를 파송하였고, 종합 구빈원은 제네바의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을 돌보았고, 컨시스토리는 제네바 시민의 도덕성을 바로 세우고, 아카데미는 제네바는 물론 유럽 전역을 위한 복음 전도교육기관의 역할을 담당하였습니다. 칼빈은 제네바를 하나님의 도시로 만들기 위해 이 모든 기관들을 강력한 복음전도 도구로 사용했고, 제네바와 전 유럽 전역에 하나님의 나라를 구현하기 위한 종합선교센터로 활용했던 것입니다. 
     세 번째로 브라질의 목회자 파송인데요. 시간이 없어서 이 부분은 조금 제가 간략하게 설명을 하겠습니다. 프랑스도 당시에 제국주의 대열에 끼어든 것입니다. 그래서 브라질의 제국주의 영토확장을 위해서 프랑스의 사람들을 보냈습니다. 대처로 이제 개신교 교도들이 많이 거기에 참여했고, 죄수들도 거기에 참여를 했습니다. 그 식민지 책임자가 제네바에 요청을 한 것입니다. 목회자를 좀 보내 달라. 그래서 칼빈이 그 이야기를 듣고 자기 조국의 일이기 때문에 이제 몇 목회자로 이렇게 보내게 됩니다. 이걸 최초의 선교라고 이야기 합니다. 브라질로 보냈습니다. 근데 이걸 실패했습니다. 근데 사실 자세한 내용들은 논문을 읽어보시면 알겠지만 저도 이것을 칼빈의 복음전도 프락시스라고 볼 수 있느냐 없느냐에 대해서 약간의 의구심을 던집니다. 실제로 정직하게 우리가 자료에 접근해야 되는데. 가서 실패했고요. 원주민하고 접촉한 것도 없고요. 다만 프랑스 이주민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가 빌가농이라는 그 책임자가 가톨릭으로 변절을 해버립니다. 그래서 다 순교당하고 쫓겨나고 이런 모습들이 있는데 그래서 이것을 복음전도의 모습이라고 볼 수 있느냐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싶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우리 개신교 학자들이 이것을 칼빈의 프락시스로, 복음전도 프락시스로 이렇게 간주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네 번째로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복음화입니다. 많은 목사들을 프랑스로 보냈구요. 또 유럽에 그 제네바 아카데미에서 공부한 수많은 사람들이 유럽으로 다 퍼지게 됩니다. 다 퍼지게 되어서 유럽 전체의 개혁교회, 칼빈의 후예들을 만들어 내고, 사실 나중에는 네덜란드로 이게 가서 ‘도르트 신경’이 만들어지게 되고 하는 수많은 역사가 ‘제네바 아카데미’를 통해서 유럽 전역에 다 이렇게 퍼지게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이러한 제네바 아카데미의 역할과 칼빈의 영향, 이런 모든 것들을 통해서 유럽 개신교가 부흥하게 되고 양적으로도 부흥하게 되는 모습 보게 돼서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복음화, 이것이 상당히 큰 복음전도 프락시스다라고 말하고 싶고요. 
     다섯 번째로 출판 및 문서를 통한 복음전도입니다. 칼빈의 가장 효과적인 복음전도 방법은 문서선교였다고 보입니다. 그래서 칼빈의 서신들, 논문들, 주석들, 그리고 그의 불후의 명저 『기독교 강요』 등은 클러스터라는 학자의 말대로 선교적 성격의 문서들이었다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특별히 『기독교 강요』를 저술한 이유가 교회를 개척하고 명목상의 신자들을 복음화하고 세속화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한 목적에서이다라고 저희의 복음전도 신학에서는 그렇게 주장하고 있습니다. 사실 저는 그걸 실제로 본 적은 없습니다마는, 『기독교 강요』 초판은 포켓에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작은 사이즈였다고 합니다, 초판 나온 것은, 사이즈가 작아서 포켓에 들어갈 수 있었다고. 지금처럼 우리가 생각하는 큰 장서가 아니라, 그렇게 만들었다. 그래서 우리들이 보기에는 그것부터가 칼빈의 어떤 복음전도를 위한 사람들이 들고 다니기 편하고 읽기 편하게 만든 그런 거였다라고 하는데, 사실 본 적이 없어서 그 말이 맞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게 포켓 사이즈로 만들었는지, 그게 사실인지는 제가 잘 모르겠습니다. 근데 오늘 자료에 있는 것을 제가 보고 그런 걸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설교를 출판해서 제네바의 프랑스 난민에게, 그리고 프랑스 본토 전역으로 전했구요. 또 잘 알려주지 않는 사실은 성경 번역에도 칼빈이 깊이 관여를 했어요, 그 인생에서. 그래서 성경 번역에도 관여를 했었고, 이런 출판 및 복음전도를 통한 것입니다. 
     그래서 다섯 가지, 즉 종교개혁 그 자체, 제네바 복음전도,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복음화, 출판 및 복음전도, 출판문서전도 이런 것들이 칼빈의 복음전도 프락시스로 제시될 수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나가는 말입니다. 칼빈은 단지 사상가나 신학적 사변가로만 살지 않았습니다. 그는 행동가였죠. 그는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실제로 애썼던 전도자였습니다. 다만 그의 시대 상황이 그로 하여금 현대적 개념의 복음전도에는 미흡하도록 그런 상황이 영향을 끼쳤고요. 그는 신학적으로 복음전도 신학을 분명히 소유했고, 그것을 가르쳤다고 보입니다. 그리고 그는 종교개혁을 통해, 제네바 사역을 통해, 브라질과 프랑스 사역을 통해, 그리고 문서 사역을 통해 복음전도 프락시스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런 칼빈의 후예들은 그들이 처한 환경 속에서 복음전도자로 자리매김 했구요. 우리 대한민국의 교회의 성장 또한 칼빈의 후예들의 공로가 크다고 이렇게 확신을 합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가 칼빈의 후계자라고 한다면 복음전도를 하지 않을 수 없다라는 것을 결론을 내리면서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